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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닥터 와이 Feb 12. 2019

행려 환자를 위한 기도

모든 사람을 괴롭히는 그에게 애정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날 나는 응급실 야간 당직을 서고 있었다. 응급실에 환자가 오면 응급의학과 의사가 초진을 보고, 내과적으로 입원이 필요하다면 내과 응급실 당직에게 전화를 한다.

"이러 이런 환잔데요, 입원이 필요해 보입니다."

새벽 3시. 나는 자다가 전화를 받고 깨 대답했다.

"네·····. 입원시키겠습니다."

 응급실 당직 서 본 의사 모두가 공감하리라 확신하는데, 모든 당직 중에 응급실 당직이 가장 고되고 짜증 난다. 새벽이 되고, 두어 시간에 환자 한 명씩 오면 그 날 잠은 다 잤다 봐야 한다. 안 그래도 부족한 수면에 예민해지는 당직인데, 이 날은 특히 더 심했다. 모든 사람이 힘을 모아 나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60대 초반의 노숙자. 빼빼 말라 볼품없는 외모. 악취. 길에 누워 있었다고 하고, 아파 보였고, 119 구급대가 신고받고 데리고 왔다. CT를 찍었다. 새하얗게 먹은 폐. 아마도 활동성 결핵. 결과를 확인하자마자 다들 "어랏" 하고 외마디 뱉었겠지. 그리고 발 빠르게 그를 격리실에 털어 넣고 소리쳤을 것이다. "야, 빨리 내과 콜 해!" 그래서 나는 이렇게 또 응급실에 불려 내려왔다.

이런 CT 결과까지 봤는데 당연히 입원시켜야 했다. 활동성 결핵도 그렇거니와, 다른 감염까지 합쳐져 폐에 물이 다량 고여 있었기 때문이다. 항결핵제와 항생제가 필요하고, 수액치료도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빨리 입원시키고 다시 가서 자면 되겠군.' 나는 고민하지 않고 '입원결정' 버튼을 클릭했다.

 그 클릭을 할 때 좀 조심했어야 한다. 클릭한 지 1분도 채 되지 않았는데 내 옆에 원무과 직원이 서 있었다.

 "선생님, 이 환자 꼭 입원해야 하는 분이시겠죠?"

 "네. 그렇습니다만. 왜 그러시죠?"

 "사실은요······."

 행색을 보면 당연한 얘기겠지만 그는 엄청나게 가난한 사람이었다. 보호 1종 환자이기도 하고, 그 적디 적은 치료비를 내지 않고 도망한 전력도 있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내 결정으로 병원은 큰 손해를 볼 게 확실해 보였다. 잠깐 급한 불만 끈다 해도 단기 입원만 시키고 내보내는 게 가능할지 확신도 없었다. 시술로 폐의 물을 뽑아야 할 수도 있고, 안정되기까지 오래 걸릴 수도 있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입원결정이 주저됐다. 나를 먹여주고 보호해 주는 병원에 폐를 끼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행려환자 받아주는 국가에서 운영하는 데가 여기여기 있는데요. 한 번 전원을 고려해 보시면 어떨까요?"

 "그런 데가 있었나요? 연락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원무과에서 알려 준 병원들은 모두 이런저런 이유로 전원을 거부했다. 병실이 없고, 담당자가 없고, 어떤 경우는 의사 자체가 없고······. 모두에게 거절당하고 나니 '막 만들어 낸 이유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상했다. 내 속은 쓰렸지만 어쨌든 그들의 이유는 일단은 전부 납득할 만한 것이었다. 나는 순순히 물러나야 했다. 그렇게 한 시간이 흘렀다. 빨리 입원시키고 좀 자고 싶었는데, 한 시간의 헛수고 끝에 돌아온 원점······. 내 실패를 들은 원무과 직원은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할 수 없죠, 뭐. 전원도 안되고, 의사 소견이 그런데 퇴원도 못 시킨다면 입원해야겠죠."

 그렇게 해서 현실의 허락을 얻은, 의학적 소신에 입각해 '입원결정'을 클릭할 수 있었다. 그런데 두 번째 시도에도 역시 조심했어야 했던 걸까. 환자가 병실로 올라가고 한 시간이 지나 다시 잠에 막 들어가려 하는 순간 걸려 온 전화에 잠에서 깼다. 병동의 간호사 스테이션이었다.

 "선생님. 보호자도 없고 이런 사람 격리병실 올리시면 정말 곤란해요. 우리가 어떻게 봐요. 1인실에 보호자는 없는데 거동도 못하고. 다른 병원 받아주는 데 없대요?"

 아니, 입원까지 한 병실 환자를 내쫓을 수는 없지요. 하지만 그녀도 속상해서 하는 말인 것을 안다. 간호사를 결코 타박할 수는 없었다. 돈 문제가 아니었다. 그 보다도 더 현실적인 문제였다.

 그나마 인원이 많은 낮 동안에도 간호사 예닐곱이 병동을 순회하며 봐야 하는 환자 수는 대략 40명. 야간에는 2명이 고작이다. 그런데 이 인원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이 환자에게 달려 붙을 여유는 없었다. 주사 라인 잡고 소독하는 의료행위 외에도 힘든 일들이 쌓여 있다. 밥 먹이고 똥 치우고 수 시간에 한 번씩 체위변경을 해야 한다. 돈 없는 사람이니 간병인을 쓸 수도 없고, 1인실에 격리해야 하니 잠깐 봐 달라 부탁할 옆 침대 간병인도 없다. 무엇보다 이 환자 하나 때문에 다른 환자들이 방치될 가능성이 높았다.

 모두가 거부하는 환자. 게다가 다른 환자의 치료에 해를 끼치는, 그야말로 천덕꾸러기였다.


모든 이가 거부하는 천덕꾸러기가 입원했다

Photo by Andre Iv on Unsplash




 날이 밝아 공공 의료기관들에 공식 문의했으나 다시 납득할만한 이유로 모조리 거절을 당했다. 모두가 전원을 원했으나 환자가 갈 곳은 없었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가 데리고 있어야 했다.

 그로부터 모두가 이 환자 때문에 나름 각자의 고통을 받았다. 의사 입장에선 병세가 워낙 중해 치료가 쉽지 않아 힘들었다. 간호사들은 과중한 노동으로 인한 피로를 호소했다. 원무과 보험과는 비급여 치료가 나기라도 할 까, 기간이 길어지지는 않을까 전전긍긍했다. 모두가 볼멘소리를 냈다. 이들을 애써 못 본 체 무시하며 치료를 계속하는 수밖에 없었다. 종일 동료의 고통을 못 본 체 하려니 밥을 먹어도 입맛이 썼다. 환자가 빨리 퇴원해야 끝나는 고통이었다.

 그러던 입원 4일째.

 잠만 자던 그가 드디어 눈을 떴다. 이를 발견한 간호사가 병동에서 전화로 알려왔다. 나는 심드렁하게 알았다고 대답하고 바로 찾아가 보지도 않았다.

사실 기적 같은 일 비슷한 것도 아니었다. 다행히 치료에 반응한 것이었고, 컨디션이 좋아지니 정신이 든 것이다. 초반에 너무 마음고생을 했는지, 별다른 보람도 없었다.

 나를 지나치게 괴롭히는 그에게 애정을 잃은 것이었을까? 나뿐만이 아니었다. 간호사들도 그의 회복에 기뻐하거나 그런 눈치는 전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깨어난 그의 태도가 지나치게 거만해 도와주는 이들을 분노케 했다.

 그는 혈세로 입원해, 비싸서 구경도 못할 1인실(결핵으로 격리되었다)에 상전처럼 누워, 외로워서인지 별 일이 없을 때도 콜벨을 눌러댔다. 다 먹은 우유 팩 빨리 치워달라고 의사를 부르고, 식판 어서 안 가져가냐며 “간호사!” 하고 소리쳤다. 선의를 가지고 일하던 의료진들도 그의 뻔뻔함에 지쳐갔다.

눈치 또한 정말 없는 양반이었다. 꾹 참고 자기 똥 기저귀 치우는 간호사에게 “내가 한 때 잘 나갔던 사람인데” 하고 치근대기 일쑤였다. 오랜 기간 길에서 외로이 지내던 신세였다가, 깨끗한 병원에서 젊고 예쁜 간호사를 보고 뱉은 말이겠지만, 간호사들이 자기를 참는 만큼은 인내했어야 했다. 간호사들은 분통을 터뜨렸고 가끔 우는 신규 간호사도 있었다. 이런 일이 생기면 수간호사는 훌쩍이는 막내를 안고 내게 원망을 담은 전화를 걸곤 했다. ‘입원장을 클릭한 원죄’ 때문이랄까. 나는 아무 군말 없이 뒤처리에 나서야 했다.


환자분, 자꾸 이럴 거예요?


아마도 그는 오랜만에 힘을 회복했던 것이고, 좋은 기분을 뽐내고 싶었을 터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회복 과정이 타인을 힘들게 만드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오랜 노숙 생활로 폐만 끼치는 삶에 완전히 적응해서였겠지만, 병원에서 이런 행동은 용납될 수 없었다.

 나도 화 낼 줄 알았다. '환자분'이라고 불렀지만 '어이 아저씨'에 가까웠다. 벌써 몇 번째 타박이었다. 이번에는 좀 심하게 다그쳤다. 그는 듣기 싫다는 듯, 아무 말 없이 등을 돌려 누웠다. 처음에는 맞대어 화냈던 사람이었다. 이제는 자기 잘못한 것도 아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은 몇 일간이나 지속됐다. 시무룩한지 그 마음은 잘 모르겠다만, 폐만 끼치는 자기 입장을 조금은 알게 된 모양새라 간호사들은 좀 살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제야 동료에 대한 미안함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내가 근무하는 병원은 종교재단의 소유였다. 그리고 내 신앙은 우리 병원의 종교와는 전혀 접점이 없었다. 다행히도 근무하는 내내 병원 측은 직원들에게 사내 포교가 전혀 없었는데, 처음 입사할 때는 그런 일이 있지나 않을까 하여 약간이나마 걱정되는 마음이 있었다. 때문에 나는 우리 병원에 입사하는 것을 내 믿음에 대한 하나의 도전으로 보았다. (기우) 이 도전을 이기기 위해 나만의 노력이 있어야 할 터였다. 나는 환자를 위해 기도해주기로 결심했다.

 모든 환자들에게 내 믿음을 강요할 수는 없었고, 간호기록지에 쓰여 있는 종교란을 참고해 기도해 드려도 될지를 묻고 진행했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많은 환자들이 감동했다고 했다. 치료자의 기도가 흔하지 않은 경험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감동받은 쪽은 오히려 나였다. '온전한 치료'를 언급할 때면 울컥하곤 했다. 절대자만이 할 수 있는 그 '온전한 치료'는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내면을 압도하는 힘이 있었다.

 그는 얌전히 굴기로 결심한 이후 별문제 없이 지내고 있었다. 한편 나는 그의 시무룩한 모습에 미안한 마음을 가졌던 것 같다. 당연히 나와는 매일 만나면서도 서먹한 사이였고, 치료자와 환자의 관계 이상 이하도 아니었다. 한편 치료에 있어서는 초조한 마음이 있었는데, 탈수가 좋아지면서 반짝 좋아지는 것 같았지만 염증 수치 등은 전혀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승압제도 쓰고 있었는데 약을 끊고서는 살아 있을 수가 없는 상태였다.

 정신적인 문제도 있었다. 하루 종일 격리실에 처박혀 갑갑한 신세를 고려하면 (물론 혼자 걸을 힘도 없지만)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져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우리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기도를 가져갔다.

 시작은 가벼운 대화였다. 과거에 잘 나가던 사람이라니, 예전 배경이 궁금하기도 해 물어보았다. 그는 한 번도 이런 질문 한 사람이 없었다고 하며, 화색을 띠고 자기 살아온 이야기를 꺼냈다. 어린 시절부터 시작한 연대기적 설명에 나중에는 다소 지쳐갔지만 (게다가 격리실에서 엄청나게 답답한 N95 마스크를 끼고 긴 시간 이야기를 듣는다는 게 결코 쉽지 않았다), 관계 회복이라는 큰 목표를 가지고 병실에 들어온 만큼 참아 내야 했다. 몇 분이나 듣고 있었을까. 그는 깜짝 놀랄 만한 흥미로운 이력을 꺼내 보였다.


그리고 내가 공중파 방송 성우였는데 말입니다

 그의 나이를 생각해 보면 한창 활동했을 시기는 80-90년대.

성우가 외화, 만화영화 등 수많은 장르에서 역할을 하며 승승장구하던 시기였다. 프리랜서도 아니고 공채 성우라니 당연히 잘 나가던 사람이 맞았다. 자기 예명을 알려주길래 검색해 보았더니 살이 통통하게 찐 모습만 현재와 달랐지 동일인이었다. 그의 동기라는 사람들도 다 내가 한 번쯤은 들어 본 쟁쟁한 사람들이었다. 대한민국 어느 곳에서든 TV만 켜면 자기 목소리가 들리던 그 빛나는 시기가 가고, 이렇게 빼쩍 비틀어진 늙은 노숙자가 되어 어린 의사에게 타박을 듣는 신세가 된 것이다.

 사업 때문에. 흔한 이야기였다.

 흔한 사업의 실패로, 하나밖에 없던 인생, 그것도 남들 것보다도 빛나던 것이었는데, 그래서인지 남들의 실패보다도 더 큰 실패처럼 느껴졌다고 한다.

그런데도 그는 지난 인생을 떠올리며 울지 않았다. 이미 여러 번 되뇌어 반복해 씹었던 자기 인생이었을 터였다.

"제가 기도 해 드리면 어떨까 하는데요."

“아이고, 선생님이 기도를 해 주신다니요.”

 그는 매우 기뻐했다. 다행이었다. 나도 내 제안을 행복해하며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에 기분 좋았다. 우리는 눈을 감고 각자의 두 손을 모았다.

 나는 그에게 엿들은 인생을 모아, 그가 조물주에게 하고 싶었을 언어로 기도했다.


“이 모든 병과 고통에 감사드립니다. 인생의 긴 상처에 고통받았지만, 시련에 울분과 원망뿐인 삶이었지만, 이 병을 통해 제가 인생을 다시 돌아보게 됩니다. 이런 기회를 주심에 감사합니다. 의사는 최선을 다하고 있으나, 제 목숨은 당신께 달려 있습니다. 이 병에서 낫게 해 주신다면, 남은 생을 당신의 사랑을 다시 느끼는 계기가 되게 해 주십시오.

하지만 부디, 지금 이 병에서 낫기를 원합니다. 간절히 원합니다. 그럼에도 모든 것은 당신의 뜻대로 ······.”


 그는 내 기도가 채 끝나지도 않았는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말을 쉴 때마다 소리쳤다.

 "아멘!"

 "아멘!"

 그는 바짝 말라버린 몸 구석구석을 짜내 목이 터져라 질러댔다.

승압제가 없으면 당장이라도 끊어질 가녀린 목숨이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힘이 넘치는 듯했다.




<본 글은 월간 시사문단 4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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