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의사가 존경받지 못하는 경향도 있고, 생각만큼 돈도 잘 못 번다고 하지만, 그래도 나는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이 좋은 점들이란 게 겪어보기 전에는 모르는 포인트가 있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이유가 뭔지 짐작들 하실까?
드라마처럼 멋지게 사람 살려서? 그래서 환자들이 고맙다고 연신 절하니까? 주위에 쭉빵녀가 넘쳐나서? 돈이 쏟아져서?
아니, 그런 게 아니다.
먼저 앞에 이유들 많이들 듣던 이야기다. 한 번 살펴보면,
1. 일단 의사라고 해도 사람 안 살리는 직종이 대부분이고 (게다가 그런 과는 소송 많이 당해서 인기도 별로 없음)
2. 타고난 찐따 의사면 어쨌든 쭉빵녀는 구경도 못하며 (여자들도 찐따 의사는 싫다고 한다)
3. 돈도 투자한 만큼 못 번다. 빨라야 의대 6년. 등록금은 일반대학의 2배, 의전원은 의대의 2배. 레지던트 5년간 버는 월급은 기대보다 매우 적은 편- 계산해 본 누군가는 시급 1000원 정도라 하더라ㅜㅜ 아무튼 즉 적어도 11년, 남자의 경우 13년간 수익이 보잘것없다. 밖에 나와도 같은 나이의 대기업 친구들보다 적다-게다가 걔들은 이미 돈 많이 모아둬서 더 비교된다. 거기다가 개업이라도 한다 치면? 몇 억 빚지고 시작해야 한다. 또 개원한다고 다 잘 되나? 요즘에는 개원한다고 하면 바보 소리 듣는다. 자영업자 곡소리 들리는 요즘 때에 의원 신장개업도 예외가 될 리 없다.
뭐, 물론 중산층 유지는 가능하다만, 여하튼 나는 "부자 되려고 의사 된다"는 말에, 잘못 선택한 거라 말해주고 싶다.
그럼에도, 의사가 매우 좋은 직업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자유롭다
나는 조직에 굳이 얽매이지 않을 선택의 자유가 있는 의사라는 직업이 좋다.
한마디로 내 기술 갖고 먹고살 수 있다. 나의 경우 수술은 못 하지만, 면허가 있고 (자격증이 아니다) 남들이 잘 해석 못하는 전문 지식의 해석 알고리즘이 있어서, 현상을 보고 처방할 수 있다.
그럴 능력도 있고 법적 권한도 있는 셈이다.
물론 한국 내에서지만, 이 안에서는 어떻게 살든 자유롭다.
2. 굶지 않는다
지극히 개인적인 삶의 모토나 뭐 이런 거긴 한데, 나는 노동한 만큼 가져가는 일이 좋다.
다른 말로 하면 내 보수가 노동에 비해 과소평가되는 것도 싫지만, 과대평가되는 것도 요상한 불안감을 준다.
옳은 생각이라는 건 아니다. 단지 기호일 뿐이다. 이런 마인드 때문에 오래간 재테크를 멀리하다가 좋은 기회를 많이 놓쳐버렸다.
의사의 일은 부가가치가 낮은 편이지만 노동량은 정말 많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뭘 하든 일할 기회가 많은 편이다. 일 자체도 내 인생과 남의 인생에 심각한 유해를 끼칠 리스크가 높은 게 단점이지만, 대박칠 일도 적고, 쪽박 찰 일도 별로 없다.
망해도 갈 데 있고, 할 일 있다.
은퇴도 그냥 하고 싶을 때 하면 된다.
3. 만나는 사람들 / 그들이 내게 가르쳐 주는 것
신체는 모든 이에게 평등하기 때문에, 거의 모든 종류의 사람을 만날 수 있다.
부자도 있고 가난한 사람도 있다. 유명인도 있고 스스로를 벌레로 여기는 자도 있다.
아무래도 상관없다. 암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찾아간다.
나는 병원에서 일하기에, 세상에 존재하는 거의 모든 유형의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큰 행운이다.
병이 어떤 식으로 한 개인을 만나는지, 사람이 극한 상황을 맞닥뜨리면 얼마나 약(弱)해지고 또 악(惡)해질 수 있는지.
게다가 나는 어린 시절 부족함 없이 자라서 가난한 사람의 생활을 잘 모른다.
하지만 임상 생활을 하면서 이들을 엿볼 수 있었다.
가난한 사람은 평균수명도 짧다고 느껴진다.
경험적으로 그들은 보통 70세 전후에 세상을 떠난다. 70도 그냥 70이 아니다. 장애를 안고 간다. 고통받다 죽는다는 말이다. 반면 먹고살만한 사람들은 80 넘어 죽는 경우가 더 많다.
가난한 사람은 자기 몸을 관리할 여유를 부리지 못했고, 그들의 몸은 혹사받다가 저 지경에 이른다.
환자의 몸은 병 이외에도 많은 것을 알려준다.
환자뿐인가? 보호자들도 많은 것을 말해주고 나를 느끼게 한다.
내 환자는 ECOG 2 이상이 (의사소통이 잘 안 된다) 많아, 환자보다는 보호자와 말할 기회가 더 많다.
많은 보호자들이 나와는 판이하게 다른 인생을 살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처음에는 이런 경험이 많아 너무 신기했다.
그러다 보니 어떤 경우든 함부로 남의 인생을 판단하기가 점차 어려워졌다.
그들이 나를 볼 때도 마찬가지다. 나는 유년시절부터 의사가 되지 않으면 인생이 실패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스무 살이 되어 그게 당연한 것은 당연히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면 내 생각이 틀린 걸까? 아니, 나도 이렇게 생각하게 된 내 인생 나름의 계기가 있다. 모두의 인생에는 각각의 계기가 당연하게 마음 한편 자리 잡고 있다. 보호자들이 내게 가르쳐 준 것은,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당연하지 않은 인생을 살고 있다는 사실이다.
의사를 하면 정말 많은 종류의 사람을 만나게 된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의사를 하면 기본적으로 만나야 하는 이들이, 아파서 마음 약해진 찡찡이 들이다.
하루 종일 칭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는 직업을 가져본 사람은 그 고충을 잘 알 것이다.
그래서 처음에 이들을 만나면 피로하다. 아니, 사실 계속 피로하다.
한 번은 밤을 새워가며 죽을 게 당연한 사람 하나를 살려놓았는데, 내가 약속하지도 않은 비특진의로의 전과를 안 시켜준다고 사기꾼이라는 말도 들었다. 가끔은 고마움도 모르는 이런 작태에 화도 난다. 궁극에는 인간에 대한 혐오를 품게 되기도 한다.
실제로 이런 의사가 많다. 나 역시 그랬다.
그런데 하나님 믿는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 한편에 언제나 죄책감이 있다. 그래서 조금씩 달라지려 노력한다.
연민.
남을 딱하다고 생각하는 마음.
그래, 의사질을 하면서 그런 게 조금이나마 생긴 것 같다.
연민이 있으면 날 세운 말로 나를 공격하는 상대를 봐도 마음이 누그러지고, 덜 맞받아치게 된다.
그 마음을 자만심의 일로라 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남과 내 마음 모두 편하게 해 주는 좋은 도구다.
나처럼 부족한 사람이 운명처럼 좋은 직업을 갖게 되어 인격수양까지 하게 되었으니,
더 나은 사람이 된다는 이 기분 좋음이 있는데, 어찌 의사가 나쁜 직업이라 말하겠는가?
힘든 직업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 좋은 직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