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니 너를 오래오래 기억할 거야.
정유정 작가의 <진이, 지니>를 드디어 읽었다. 작년 초여름, 신간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읽어야지, 읽어야지'하고 생각만 했던 게, 해가 바뀌고 나서야 책을 집어 들었다. 역시 시간은 늘 빠르게 흘러가고, 그에 반해 나의 생각과 행동은 늘 너무 더디다. 다꾸영상은 아래 유튜브 채널에서!
https://youtu.be/fVGUfqaNnAg
<진이, 지니>는 어떤 위험에 빠진 대상을 돕지 못했던 두 인물의 이야기다. 첫 번째 인물은 영장류센터에서 일하는 '이진이'. 진이는 불법적으로 포획된 보노보를 목격하고도 제 목숨이 두려워 도망쳤다. 두 번째 인물인 '김민주'. 그는 공익근무를 하며 쪽방촌 독거 노인들을 도울 때, 어느 방 아저씨의 불편한 소리를 듣고도 외면하고 돌아선 경험이 있다. 결국 보노보는 끔찍한 세계로 팔려 갔고, 아저씨는 허무하게도 그날 죽었다. 이 둘은 저들도 인식하지 못하는 새 어느덧 가해자이자 방관자, 도망자가 됐다. 씻을 수 없는 미안함과 책임감의 무게가 이 둘의 삶을 천천히 짓누른다.
조금씩 가라앉는 이들의 삶은 보노보 한 마리의 등장으로 확연히 달라진다. 보노보는 침팬지보다 체구가 작지만, 공감 능력은 훨씬 뛰어나고 온순한 성격의 유인원이다. 수컷 중심의 사회를 이루는 침팬지와는 달리, 연대와 평화를 중요시 하는 암컷 중심 사회를 이룬다. 정유정 작가가 침팬지나 여타 다른 동물이 아니라, 구태여 보노보를 선택한 이유는 아마 그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연대. 서로가 서로에게 기댈 때, 너와 내가 함께가 될 때, 무거웠던 짐은 점점 가벼워지고, 미련할 만큼 두 손에 꽉 쥐고 있던 것들을 내려놓기 시작한다.
사실 그러고 보면 모든 삶은 모두 이어져 있다. 꽃이 자라고 산화하지만, 언젠가 다시 그 산화된 땅에서 열매가 자라고 다시 씨앗이 되듯이, 자궁에서 태아가 자라고, 또 그 태아가 자라 또다른 순환의 진리를 이어받듯이. 책 표지 속 동그란 원을 가만히 바라본다. 손끝마다 새겨진 지문의 곡선을 만져본다. 이토록 모든 게 하나로 이어진 세상에서 우리는 왜 자꾸 혼자만 고독하려 할까. 연대하는 방법을 자꾸만 잊어버리는 걸까.
네 형제의 나귀나 소가
길에 넘어진 것을 보거든
너는 그것들을 떠나 숨지 말고
반드시 그를 도와
그것들을 다시 일으킬지니라.
신명기 22장 4절
<진이, 지니>에서 묘사된 장면들은 꿈처럼 몽롱하고, 책이 말하고자 하는 주제는 어쩌면 그 몽롱한 장면들보다 더 꿈같고 이상적이다. 따뜻하고 감성적인 주제와 달리 그 주제를 전달하는 방식은 꽤 예리하고 날카롭다. 그 뜨거운 부드러움이 차갑고 각박한 현실 세계에 와장창 균형을 낸다. 마치 작은 보노보의 비명에 와장창 유리가 부서질 수 있는 것처럼.
이 책을 읽으며 많이 울었다. 내 처지만 살펴보던 이기적인 두 눈을 들어, 다른 이들의 반짝이는 눈들과 꼭 눈을 맞추고 싶어졌다. 한 뼘 더 함께하는 삶에 대해, 가만가만 눈부신 다짐을 적어내려가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