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피론주의 개요』에서
우리는 언제나 너무 쉽게 단정한다.
사람은 이렇고, 세상은 저렇고,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확신은 우리를 안정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의 불안은 확신에서 시작된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이 사실을 정확히 꿰뚫었다. 그는 말했다.
“독단주의자는 자신의 주장을 진리로 단정한다.”
여기서 ‘독단’이란 단지 주장을 강하게 말하는 태도가 아니다. 독단은 세계에 대한 판단을 너무 빨리, 쉽게, 확실하게 내려버리는 태도다. 우리는 감각도 불완전하고, 기억도 흔들리며, 추론은 늘 오류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결함 가득한 인식을 기반으로 우리는 ‘진리’를 너무 자신 있게 말한다.
그러나 진리에 대한 확신이 강해질수록 우리는 세계가 그 확신과 다르게 움직일 때 더 깊이 흔들리고 상처받는다. 고통은 사실 ‘세계’가 아니라 ‘단정’에서 비롯된다.
섹스투스는 이 지점에서 회의주의의 문을 연다. 회의주의란 모든 것을 부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모든 판단을 유보하려는 절제된 지혜다.
그는 말했다.
“양쪽의 주장이 팽팽히 맞서면, 우리는 먼저 판단 유보(에포케)에 이르고, 이어서 평정(아타락시아)에 도달하게 된다.”
우리는 흔히 판단을 내려야만 불안을 벗어난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는 정반대라고 말한다. 판단을 내려서가 아니라 판단을 멈춤으로써 인간은 마음의 평정에 도달한다.
판단 유보(에포케)는 무지가 아니다.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당장은 확신할 수 없음’을 받아들이는 태도다. 그리고 그 수용은 지적 나약함이 아니라 존재의 강인함이다.
왜냐하면 세계는 언제나 복잡하고, 우리가 경험하는 것은 언제나 부분일 뿐이며, 그 부분으로 전체를 단정하는 순간 인간은 스스로의 마음을 옭아매기 때문이다.
판단 유보의 순간, 마음은 열리고 열림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세계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 그때 찾아오는 고요가 바로 아타락시아, 평정이다.
평정은 생각이 사라진 상태가 아니라, 생각에 붙잡히지 않는 상태다. 의견에 스스로를 묶지 않고, 당장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옳다와 그르다의 두 극단 사이에서 잠시 머물 수 있는 여유다.
우리는 종종 결론을 너무 빨리 내리려 한다. 섹스투스는 그 순간에 말한다.
“잠시 멈추라. 단정하지 말라.”
멈추는 순간 세계는 달라 보이고, 단정하지 않음 속에서 마음은 고요해진다.
나는 오늘 하루를 돌아본다.
얼마나 많은 것을 너무 쉽게 ‘옳다’고 확신했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너무 빠르게 ‘틀렸다’고 판단했는가.
그 순간에 판단을 멈추었다면 마음이 가벼웠을까.
평정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평정은 단정과 확신의 한 가운데서 잠시 멈추는 용기에서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