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물 밑으로 대륙처럼 뻗은 본능의 얼음산. 그 무의식이 가지는 파괴의 속성에 매료되어 괴로운 사람들에게 자주 마음을 빼앗겼다. 희극보다는 비극에 몰두했고 행복한 사람들의 진의와 진심을 항상 의심했다. 자꾸만 금지된 사랑을 선망하게 되어 열심히 사랑을 배웠지만, 사랑을 몰라 결국 나밖에 사랑하지 못하는 지독한 나르시시스트가 되어 버렸고. 공허함을 급히 채우고 싶은 충동을 이기지 못해 버릇처럼 물건을 사들이는 쇼핑 중독자처럼 온전치 않은 나를 위해 끊임없이 혼란과 불안을 사들였다. 사람은 익숙함을 가장 사랑하는데, 나는 부적절한 내가 익숙해서 익숙하게 부적절한 나를 끔찍이도 사랑한 모양이다.
아무튼 그런데도 염치없는 나는 망가지거나 부서지고 싶지 않았고 진열장 가득 위태로운 마음이 지긋지긋해 전부 내다 버리고 싶었다. 불행과 부정을 외부로 꺼내고 싶은 욕망은 배설이 되어 결국 입으로 터져 나왔다. 부푼 말들이 한 번 터지자 좀처럼 멈출 수가 없었다. 누구든 말을 들어줄 사람을 발견하면 거머리처럼 들러붙어 말을 쏟아냈다. 상대에 대한 어떠한 배려 없이 아무렇게나 내뱉은 말은 결국 누군가에게는 칼이 되었고, 나는 이기는 싸움만 골라 칼을 휘두르는 살수가 되고 말았다.
말로 받은 상처와 말로 준 상처로 온몸이 폐허가 되었다. 너절하게 혼자 남아서도 미련하게 말을 멈출 수 없어 글쓰기를 시작했다. 삭제되지 못한 채 천장까지 쌓인 마음을 안전하게 내보내기 하고 나와 상대를 모두 지키기 위해서. 결연한 마음가짐이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머릿속에 뒤섞인 생각과 말들이 뒤섞인 그대로 출력되어 한풀이 같은 꼴을 하고 있었으니까. 노트북 위에 올라탄 손가락은 의식의 흐름에 따라 무아지경으로 춤을 추었지만 보는 이에게는 그저 우스운 막춤에 지나지 않았다. 따라서 사람들은 나의 글을 좋아하지 않았다. 맛없는 음식을 먹고 배가 부를 때의 불쾌함처럼 한 상 가득 넘치게 차려진 불행의 글자를 먹으며 괜히 배가 부를 필요는 없는 것이다. 여전히 나는 내 말밖에 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이대로는 안돼. 쏟아지는 것을 멈출 수 없다면 일단 줄여야 한다. 그래서 시를 선택했다. 응축되고 간결한 표현으로 나를 드러내기 위해 가루가 된 말들을 모아 반죽했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줄이고 줄여 납작하게 만든 든 뒤 쓸데없는 말은 생략하기 시작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시에 쓰인 단어들이 늘 모자란 듯했으나 모자란 것에 익숙해져야 했다. 과유불급이라. 모자람이 미덕이라는 말은 틀림이 없다. 그렇게 하나둘 시가 쌓여가는 만큼 내 마음에 두서없이 쌓인 단어들도 차근차근 정돈되었다. 마침내 나를 안전하게 전달할 언어를 찾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작품성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 눈물은 웃음으로 끝맺고, 다시 웃음은 눈물로 잇고. 그렇게 되풀이하면 웃음과 눈물의 감정이 서로 섞이거나 극복된단다. 슬픔이나 서러움, 한의 눈물을 그렇게 ‘신명’으로 푸는 거야. 몇 번 되풀이를 겪으면 결국엔 마음이 가벼워지고,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삶을 대하게 되지.”
<춤은 몸으로 추는 게 아니랑께, 광대 공옥진 中>
눈물과 웃음으로 춤을 추던 공옥진 선생처럼 나도 신명 나는 기분이 들었다.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삶을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
그러나 늘 그렇듯 욕심은 증식하기 마련이고 만족은 어디에도 없다. 나를 전달할 언어를 찾았다면 이제는 더 많이 읽히고 싶었다. 읽히고 싶다는 건 사랑받고 싶다는 마음이다. 조금은 정돈되었으니 이 모습이라면 사랑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러나 내가 원하는 만큼의 사랑은 받을 수 없었다. 세상에는 너무 많은 시가 있고 너무 많은 문장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심상이 유려하게 피어나는 꽃밭에서 나의 언어는 너무 작고 소박했으며, 제자리가 어딘지도 모르게 희미했다. 그렇다면 화려하게 꽃 피워야지. 나도 총천연의 색으로 갈아입으리라 결심했다.
어릴 때부터 모사에 능했다. 누군가의 목소리, 색감, 옷차림, 말투, 태도까지 따라 하기 어렵지 않았다. 타고난 재능인 듯 적당히 눈속임해서 마치 내 것처럼 할 줄도 알았다. 프레젠테이션을 위한 문서 작업이나 보고서도 마찬가지. 능력자들의 폼을 본떠 오히려 내가 인정받는 일도 무수했다. 그래서 글도 그렇게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내가 사랑하는 문장을 적당히 내 것처럼 쓸 수 있을 줄로 여겼다. 그렇게 멋진 문장을 쓰면 내가 그 문장을 사랑하는 것처럼 내 문장도 사랑받을 거라고. 하지만 예상은 틀렸다. 누군가의 글을 열심히 읽어서 문체를 흉내 내거나 그의 문장을 인용할 순 있지만 생각을 훔칠 순 없었다. 글쓴이의 머릿속에 흐르는 의식을 모사할 수 없어서 나는 길을 잃었다. 잘하고 싶은데 잘할 수 있는 방법을 놓친 것이다. 지금껏 나는 누구의 삶을 살았던 것일까.
내가 사랑하는 문장을 나는 쓸 수 없다는 생각에 절망했다. 감정기복에 시달리는 인간이라 담담하게 쓸 줄도 모르고, 뛰어난 문장력과 표현력으로 시선을 휘어잡을 수도 없었다. 무너지지도 솟아나지도 못하는 중간 어귀에서 상심할 수밖에. 아, 언제까지 나는 이 세상에 쓸모없는 인간으로 살아야 하나. 이토록 커다란 세계 안에서 나라는 부품이 알맞게 끼어들 공간은 정말 없는 것인지 애매한 나를 원망했다. 나는 아직도 부적절하다.
그러다 어느 책에서 ‘세상에 쓸모 있는 글만 있으라는 법은 없지!’라고 외치는 한 작가를 보았다. 맞다. 세상에 쓸모 있는 글만 있으라는 법은 없지. 훌륭한 글이 있다면 구린 글도 있고 애매한 글도 있기 마련이다. 아주 담백하지도 유려하지도, 아주 차갑지도 따스하지도, 아주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애매한 것이 나라면 그것을 나의 역할로 하겠다. 애매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애매한 글을 쓰겠다. 뭐라도 되고 싶은데 아무것도 될 수 없다면 그냥 아무개가 되겠다. 부적절하면 부적절한 대로 내가 느끼는 바를 솔직하게 쓰고, 이것은 시이자 글이라고 우기겠다. 오장육부가 흔들어 대는 대로 나오는 병신춤을 추던 공옥진 선생처럼. (*공옥진 선생은 병신춤의 이름이 곡해되는 것을 원치 않아 본인의 춤을 곱사춤으로 불렀다.)
하여 내게 글을 쓰는 일은 나를 잃지 않는 일이다. 그저 머리에 떠도는 무심한 생각들이 산산이 부서져 날이 서도록 두지 않고 멀쩡한 나의 퍼즐로써 맞추는 일이다. 다른 누구의 마음도 아닌 바로 나. 나만의 생각을 나만의 형태로, 나만의 문체로, 나만의 글투로 만들어내는 일이다. 부적절한 나를 괴로워하던 내가 부적절함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용기다. 맥연히 길을 걸으며 허공에 부유하던 내가 비로소 물성을 갖게 되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가능한 글쓰기를 멈추지 않으려 한다. 이 모습 이대로 독자들에게 읽히지 않는다 하더라도 나만의 병신춤을 추어야지. 누군가를 붙잡고 마음을 쏟아내는 마구잡이식의 어리석음 보다 홀로 글을 쓰는 일을 선택하려고 한다.
누군가 나의 글을 보고 식탁보 같다고 했다. 일상에서 공감으로, 심리학으로, 다시 세상으로 향해가는 시선의 이동이 작은 무늬 단위가 이어지고 펼쳐져 넓은 식탁을 덮는 모습처럼 느껴진다고. 그것은 아마도 내가 별거 없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별거 없는 사람만이 볼 수 있는 사소한 것들이 있다. 일상이 심심하고 무료해서, 대단할 것 없는 삶을 살아가기 때문에 느낄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애매한 나만이 알아챌 수 있는 것들이 있고 애매한 나이므로 더 많이 생각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엄청난 쓸모가 있는 것은 아니라도 아예 쓸모없는 것은 아닌 식탁보 같은 생각들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식탁보를 할 예정이다. 볼품없는 시선의 확장이 삶을 성공시키거나 생을 아름답게 할 수는 없을지라도 풍요롭게 할 수는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