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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yemi Lee Jan 14. 2024

여성 CEO의 유리천장

 스물여섯 해가 되던 해에 내 이름으로 사업자를 내고 창업을 했다. 끝내주는 아이템이 있어서 창업을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창업이 무척 하고 싶어서 어떡하면 사업을 하고 살 수 있을지 굳이 찾아보았다. 당시 미국에서 유행하던 ‘어프렌티스’라는 서바이벌 예능이 있었다. 대통령이 되기 전의 도널드 트럼프가 사업가로 진행하던 프로그램이다. 참가자들에게 미션을 주며 수행하게 한 후 최후까지 살아남은 1인을 뽑아 자신의 견습생으로 뽑는 프로그램이었다. 참가자들의 프로필을 보는데 26살의 CEO들이 많았다. 때는 성공에 관한 에세이가 넘쳐나고 너도 나도 부자가 되어 보자고, 될 수 있다고 몰아가는 분위기의 2000년대 초반이었다. 나는 결심했다. 내 남은 생애는 사업가로 살아 보겠다고. 본디 하고 싶은 것 많고 생각 많고 오지랖 넓은 나는 회사를 다니며 남 밑에서 성실하고 일정하게 일하며 살 수 있는 타입이 전혀 아니었다. 중국무술용품 몇 개를 판매하는 것으로 시작해 장사를 꾸려 나갔다. 스물일곱, 여덟, 아홉 혀 쏙 빠지게 일해서 알토란같이 돈을 모아보니 서른 살에 1억이 만들어졌다. 그 기념으로 <나 서른 살에 1억 모았네>하고 책을 냈다. 강연 요청이 많아졌고 협업 요청도 늘었다. 아이템을 늘리고 회사를 더 키우는 식으로 방향을 틀었다.


 마침 그때 비슷한 카테고리의 제품들을 비슷한 방법으로 판매하며 서로 도움을 주고받고 있던 대학선배와 운동선배 둘을 만나서 자주 일에 대해 상의하게 되었다. 처음엔 협업 방식으로 하다가 회사를 합치자는 쪽으로 결론이 났다. 법인을 세우고 좀 더 회사다운 모습으로 바꾸었다. 서울에서 자리 잡고 일하던 나는 직원들을 끌고 선배들이 있는 안양의 사무실 위층으로 짐을 옮겨 이사를 했다. 결심이 서자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처음 사업을 합치자고 했을 때 나는 쉽게 그러겠다고 했다. 선배들은 쿨하게 며칠 만에 재무제표를 들이밀며 같이 해 보겠다며 잘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설치는 나를 보며 기집애가 겁도 없다고 했다. 원래 나는 새로운 방식으로 일을 하는 것에 두려움도 없고 주저하지도 않는다. 사실 나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있었다. 만에 하나 함께 일을 하다 잘못되어 선배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여기서 망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그때까지 배운 것을 발판 삼아 다시 회사를 설립하고 뭐라도 팔아서 일어날 자신이 있었다. 지금 결정을 하지 않으면 계속 이대로 변화 없이 직원들이랑 주문받고 포장하고 판매하고 주문받고 포장하고 판매하고 이 짓만 수년간 더 반복할지도 몰랐다.

  그렇게 우리 셋의 회사놀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어릴 적 우슈 대회장에서 치파오 도복을 입고 대회 한 번 나가 보겠다고 만났던 올망졸망한 열몇 살짜리 아이들이, 성인이 되어 이렇게 회사를 차려 제 몫을 하고 직원들 월급을 주게 된 것이다. 회사 체질이 확 바뀌었다. 나는 마냥 신나서 그 후로 1년여간 밤에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새벽에도 좋은 아이디어나 해야 할 일들이 생각나면 단체톡을 울렸다. 새벽 4시에 연락을 하면, 나와 영준선배는 그때까지 잠을 자지 않아서, 승현선배는 워낙 새벽형 인간이라 그 시간에 깨어 있어서 4시에 긴급회의가 바로 진행되었다. 그렇게 안양에서 모여서 일을 한 지 6개월 만에 작게라도 사옥을 지어 보자고 의견을 모았고, 각출한 돈을 모아 경기도 이천의 지금의 회사를 지었다.


 셋이 모이니 직원들에게 그리고 대외적으로 불릴 호칭이 필요했다. 실세이자 대장인 영준선배는 본인은 아무런 무게감을 가지고 싶지 않다며 스스로 ‘고문’이 되겠다고 했다. 영어로 Advisor다. 외국인 바이어나 제조공장이 고문이라는 선배의 명함을 보면, ‘너 이 회사와 관계없는 사람이잖아’ 라며 반문한다. 사실 어떨 땐 정말 관계없는 사람처럼 굴기도 하고 (이거 좀 사 줘, 이거 좀 결제해 줘. 왜? 갖고 싶어서. 진짜 남의 회사 돈처럼...) 우리 회사 사람 맞나 싶을 때도 있다 (아무것도 모른다. 회사 돌아가는 상황과 재고나 자산 등등.. 거의 회장님 급이랄까). 승현선배는 우리 중 가장 경제개념이 투철한 사람으로 재무이사 역할을 맡았다. 나는 승현선배가 통장을 관리한다길래 다음 날 바로 내 법인 인감과 개인 통장 몇 개의 관리를 넘겼다. 선배는 특유의 외유내강 형으로 순딩 순딩한데 사리분별이 정확하고 틀린 것이 있으면 콕콕 집어낸다. 우리 셋 중에 가장 합리적인 소비를 하고 나와 영준선배가 MT4 투자로 돈을 날렸을 때 유일하게 유혹에서 빠져나간 사람이다. 나는 선배를 믿지만 또한 선배를 믿지 않는다. 돈을 맡길 때는 그래야 속이 편하다고 본다. 만일 선배가 돈을 갖고 튀면? 당해야지 뭐. 돈은 원래 흘러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므로.

 그리고 셋 중 막내이자 유일한 여자인 내가 직함으로 대표 자리를 맡게 되었다. “그냥 네가 대표해.” 하는 느낌으로 떠맡게 된 것이었다. 마치 셋이 숨바꼭질 놀이를 하며, “네가 술래 해” 하는 것과 같은 가벼운 느낌으로. 어쨌든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나는 그 감투에 맞는 역할을 하려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힘을 모은 우리 셋은 여태껏 새로운 아이템을 여러 가지로 시험해 보며 사업을 확장했으며, 취미로 또는 실험적으로, 작은 체육관을 하나 열어서 돌아가며 돌보고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삐걱거리며 6년째 함께 일을 해오고 있다. 아직 승현선배는 돈을 가지고 튄 일이 없고 영준선배는 고문이라는 직함처럼 뒤로 물러나 있지 않고 누구보다 열심히 회사 일을 기획하고 전에 없이 밤새 일한다.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우리는 더욱 결속이 되었다. 수익이 아닌 대출이 늘어난 마당에 욕심을 부리려 해야 부릴 것도 없기도 하다. 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회사가 어려울 때는 다들 힘을 모으지만 회사가 크고 나면 그제야 싸운다고. 크고 작은 일에 굉장히 치인 어느 날, 승현선배와 통화를 하며 내가 말했다. 그래도 우리가 싸우지 않고 6년을 끌어온 것은 대견하다고. 그 말을 들은 선배가 답했다. 제발 더 잘 돼서 피 터지게 서로 한 번 싸워 봤으면 좋겠다고.     


 남자들 틈바구니에서 살아남기가 호락호락하진 않다. 거칠고 험한 그들의 말투부터 일상으로 하듯 던지는 야한 농담까지. 처음엔 손사래를 치며 그러지 말라고 하던 내가 나중에는 나도 함께 능글맞게 응수하기에 이르렀다. 어릴 적부터 운동계에 몸담으며 그런 분위기가 낯설지 않았던 나에겐 사실 특별한 별 일도 아니었다. 우리 팀은 일 끝나고 술 마시며 쓸데없는 이야기로 시간을 끄는 법도 없다. 다들 식단 관리를 하며 자기만의 운동 루틴이 있기 때문에 일이 끝나면 제각각 자기 일 하기 바쁘다. 일 년에 우리가 모여서 밥을 함께 먹는 시간은 서너 차례가 채 되지 않는다. 혼자 여자다 보니 단점도 있지만 이점도 있다. 혼자 일 할 때는 무거운 것 힘든 것 모조리 다 맡아서 작은 몸으로 낑낑대며 했는데 선배들이 생긴 후로는 난 늘 멀찍이 떨어져 있다. 손을 보태려 해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뿐더러 컨테이너가 들어오거나 수십 킬로에 육박하는 더미나 샌드백이 들어온 이후로 피지컬적인 한계를 체감하고 나서는 시원한 냉커피를 타거나 청소하는 일을 도맡아 한다. 남자들 사이에 끼어 일을 하며 느끼는 것은 과연 어떻게 해야 평등하게 일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힘들고 궂은일을 똑같이 할 수도 없고 물리적으로 같은 시간 동안 일을 할 수도 없거니와 성과도 제각각이다. 누가 더 낫고 누가 덜 했다고 평가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그저 서로 양보하며 제 역할을 각자 해내는 것이 함께 일을 하며 오래가는 방법이 아닌가 한다.      

 나는 실은 몹시 털팔이지만 외부에선 깐깐해 보이는 여자 사장 역할을 한다. 선배들이 관행처럼 대충 읽은 계약서나 손해 보는 조항에 대해서 짚고 넘어가도 되는 역할이다. 여자라서 더 좋은 점도 존재한다. 어차피 모든 일과 모든 상황에는 명암이 존재하므로 기왕 이렇게 된 것 좋은 것만 빼먹으면 된다. 여성을 우대해서 지원해 주는 정부지원 사업도 있고 공공구매를 할 적에도 여성 사업자에게 일정 비율을 구매해 줘야 하는 조항이 있다. 이 조항은 언뜻 이해가 되지 않고 조금 이상한 것 같지만 어쨌든 있으니 활용해 본다. 또한 격투기용품과 체육용품을 다루는 우리 업의 특성상 남자 고객들이 많은데, 남자 고객 중 깐깐하고 까다로운 고객 클레임이 걸려오면 내가 토스받아 부드럽고 따뜻하게 상황을 들은 후 유연하게 돌려 말해 정리한다. 여자 대표라서 처리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내가 회사에서 일하며 가장 크게 느낀 여성 CEO의 유리천장이라는 것이 있다. 우리 팀에서 충실하게 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자부해 마지않는 나는 독립된 개체의 대표가 아닌 대부분의 사람에게 사모님처럼 비치는 모양이다. 처음 그런 말을 몇 번 듣고 승현선배에게 하소연을 했더니 선배가 도끼눈을 뜨며 물었다.

 “누구의?”

 “영준선배 부인도 됐다가, 승현선배 부인도 됐다가.”

 그리고 웃었다. 처음엔 황당하기도 하고 기운 빠지기도 했는데 계속 듣다 보니 이제는 그냥 웃기다. 설명하기 귀찮을 땐 먼저 스스로 배우자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영준선배 명의의 인터넷 가입 조건을 바꿀 때 동료보다 부인이라고 하면 서류도 설명도 없이 쉽게 넘어간다.

 내가 대표이사로 이름을 올린 것 역시 누군가의 부인이기 때문에 그런 줄 아는 경우가 많다. 나도 체육을 전공했고 나도 그전에 혼자 사업을 9년이나 꾸려 왔는데. 선배들과 셋이 사람들을 만나러 나가서 통성명을 하고 인사를 나누어도 선배에게 이렇게 눈치를 보며 묻는 것이다 “혹시 사모님...?” 선배의 아내가 되는 언니들이 들으면 기가 막힐 노릇이겠지만 왜 하필이면 선배의 사모님이란 말인가. 나도 기분 별로다. 그럼 선배들은 펄쩍 뛰며 두 손을 내젓는다. “아뇨, 대학 후배였는데 어쩌고 저쩌고...” 함께 일 하는 사람들끼리 어떻게 왜 일을 함께 해야 하는지 일일이 서사를 풀어야 이해를 한다. 남자들끼리 일을 할 적에는 좀처럼 없는 일인 듯한데. 나만. 나만 갖고 그런다. 영준선배와 승현선배만 어딜 갔을 때는 아무 이슈가 없다. 하지만 내가 선배와 단독으로 가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말하지

않아도 와이프 데리고 온 줄 아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어떻게 보든 나는 그냥 내 일만 열심히 똑 부러지게 하려 한다. 그래서 나 스스로가 부끄럽지 않고 내 실력에 대해 이견이 없으면 그걸로 된 것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혼자 일 하는 것보다 이렇게 다같이 일하는 것 자체가 즐겁고 이득이 많으니, 때로 시집도 못 가 봤는데 기혼이라는 억울한 누명을 쓰더라도 그것이 더 큰 수익과 이득을 가져다준다면 설령 선배들의 사모님이라고 오해를 받는다고 한들, 사업가로서 마다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가끔 큰 개들이 마구 난입하는 시골 사무실에서 열심히 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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