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절이 하는데 남녀가 따로 있나?
“남자가 겉절이를 어떻게 하냐!!”
자극적인 글을 지양한다.
감정을 토해내듯 쓰기보다는 공감대를 가진 사람들과 소통하고 싶으니까.
무언가 가슴에서 꿈틀대며 글을 쓰지 않고서는 못 배길 것 같을 때 쓴 글은, 다시 보기가 힘들다. 부끄럽다. 나에게 아프게 꽂혔던 말들과 형태만 다를 뿐 내용물은 같은 느낌이라.
고발과 비난이 아니라, 상황에 대한 객관적인 파악과 껄끄러운 상황을 재현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글을 쓴다.
나의 시부모님은 취미로 텃밭을 가꾸신다.
내가 보기엔 취미의 범주를 진즉 벗어나 노동에 이르렀는데 여전히 취미라 우기시며 농사 중이시다. 처음엔 너무 뜨거운 햇빛에 무거운 흙과 비료를 나르는 게 힘드실 것 같아, 농사일의 힘겨움을 토로하실 때마다 진심으로 그만두시길 권했다.
결코 싼 게 아니다, 정식 농사꾼(?)이 지은게 더 좋다, 건강을 위하는 게 아니라 관절에도 안 좋고 병만 더 난다…
“올 가을까지만 하고 그만해야지. 나도 힘드네”
나의 다양한 만류의 말미에는 항상 이렇게 대답하시지만, 봄이면 마치 처음 짓는 농사인양 새로운 에피소드를 풀어놓으시며 같은 일들이 반복된다.
세 번의 가을을 그렇게 보내고 달라진 것은 결국 나였다. 이제 그만두시라는 말씀을 드리지도 않고, 그만하겠다는 말이 당장 나의 잔소리 방패용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기에.
그렇게 하나의 주제에 대해서는 무심해졌다, 나도 이제 트러블 없이 넘어갈 수 있는 내공 좀 생겼다 셀프 토닥이고 있는데.
이런-
역시 뒤통수는 뜻하지 않을 때 맞는 건가.
이젠 한 번에 수확한 동종의 소화불가능한 농작물이 트러블의 원인이 되었다. 농작물의 특성상, 수확해서 소진하지 않으면 금방 시들어버리기에 처치곤란인 것이다.
입맛이나 취향 따위 고려하지 않은, 농사지은 것이기에 만들어진 반찬과 김치들이 나도 모르는 사이 냉장고에 가득 쌓였다.
(물론 감사한 일이지만, 맞벌이에 평일 밥은 거의 저녁만 먹는 우리 가족의 생활패턴상 소진량이 적을뿐더러, 부추김치나 겉절이는 그 주에 먹지 않으면 며칠 뒤에는 숨이 죽어 질겨져.. 어제의 반찬이 오늘의 음쓰가 되는 상황..ㅠㅠ)
안 가져간다고, 다 못 먹으니 조금만 달라고 말씀드려도 이미 통에 담겨있거나 많으니 그냥 가져가라며 내 의견과는 상관없이 양손 가득 가져오거나 이미 우리 집 냉장고에 채워져 있다.
은근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이젠 이런저런 반찬으로도 처치하지 못한 날 것 상태의 농작물까지 주어지려고 한다.
상추가 너무 잘 되었다고, 사 먹는 거랑 차원이 다르다고, 가져가서 무쳐먹고 쌈 싸 먹고 많이 먹으라신다. 겉절이는 무치면 거의 한 끼에 소진해야 하고, 상추쌈을 싸 먹으려면 뭐라도 있어야하는데..
그래서 이런저런 이유를 나열해 봤지만, 좋은 거니 먹으라며 봉지가 터질 듯 가득 담긴 상추를 보니 숨이 턱 막혔다. 보나 마나 반의 반도 못 먹고 물러져 버릴 텐데.. 상추한테도 미안하고 어머님께도 죄송해서 단호히 말했다.
“이거 다 먹지도 못해요. 나눠먹을 사람도 없구요. 마트에서 산 상추도 아직 냉장고에 있어서 안 가져갈게요. 다 못 먹으면 아까우니까요.”
“이래저래 해 먹으면 금방이야. 쓱쓱 무쳐서 겉절이도 해 먹고 그래라.”
(아니, 앞의 말을 못 들으셨나…..?)
어떻게 얘기해도 답정너인 느낌에 순간 짜증이 나서 솔직히 얘기해야겠다 싶었다.
“솔직히 다 해주신 반찬들 꺼내서 먹고 치우는 것도 평일엔 힘들어요. 누가 무쳐주면 모를까 퇴근하고 와서 씻어서 무쳐서 먹고 할 기력이 없어요.”
.
.
(나름 심호흡 후)
“얘네 아빠가 겉절이 할 거 아니면요.”
(=본론. 사실 제일 하고 싶었던 말.)
깜짝이야.
글씨의 크기로 데시벨을 표현할 수 있다면 표준 10 기준으로 35정도로 저 따옴표 대사를 키우고 싶다…
맞벌이를 비롯하여 요즘은 성역할 없이 생활하는 21세기가 아니던가?
조용하던 실내에 큰 소리가 나서가 아니라, 저런 마인드를, 저런 말씀을 노필터로 하시는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니.. 그런 마인드라면 나는 집안에서 살림만 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왜 나는 업무시간에는 일을 하고 집으로 와 저녁을 차리고, 주중엔 반찬거리를 걱정하고, 주말이면 밀린 빨래에 대한 부담으로 눈을 떠야 하는 거지?
이런 것들을 하나하나 조목조목 얘기하고 싶었다. 단지 누가 겉절이를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계셨다니-
그렇다면 저도 할 말이 많은데요-
숨을 고르며, 어떤 답으로 어떤 분위기를 이어가야 할까 생각을 정리하는 찰나.
“겉절이 하는데 남자 여자가 어딨어요.”
세월은 사람을 참 알 수 없게 변하게 만든다.
이런 소란이 싫어 입을 닫아버리던, 내가 민감한 주제의 얘기를 꺼내기만 해도 인상 쓰던 남의 편. 줄여서 남편. 이제는 그가 이렇게 능청맞을 정도로 상황을 종료시키는 말을 자연스레 하다니.
주변인 1로 있던 사람이 갑자기 상황을 종료시키니 정작 당사자였던 아버님과 나는 하려던 말이 가로막힌 것 같아 뭔가 억울하여 씩씩거리는 마음이 드는 한 편, 그와 비슷한 크기로 골치 아픈 얘기로 감정 상하지 말고 이 상황을 핑계로 그만하고 싶다는 마음도 들었다.
토론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네 문화.
부드럽지 못한 나의 말투와 가면을 쓰지 못하는 내 성격.
갈등을 싫어하고 피할 수 있다면 피하고 싶은 남편.
나는 지금껏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도 그럴 거다 주의 시아버지.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며 나는 그들과 다르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은 시어머니.
당연히 다른 시대를, 다른 환경에서 살았으니 다름이 당연하지만 그 다름을 용인하기보다는 마치 땅따먹기 하듯 먼저 내뱉은 말이 지켜져야 하는 룰이 되는 것 같은 분위기가 불편하다.
이 난리를 치른 후, 한번 들르신다며 어머님이 우리 집에 다녀가신 이후, 터질 듯이 눌러 담은 상추 한 봉지가 냉장고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런 폭력이 또 있나?
심지어 상추 두고 갔다는 말씀도 없고,
이래저래 해 먹으라는,
당신 아들한테는 더더욱 무쳐먹으란 말 안 하셨겠지.
아무 생각 없이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숨이 탁 막혔다. 왜 이러지 정말. 결혼 초기의 나였다면 이런 걸로 기어이 한마디 해서 남편과 싫은 소리를 하거나 탁탁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상추를 꺼내거나 했겠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마치 없는 것처럼-
내 눈에 안 보이는 것처럼-
만지기조차 꺼려지는, 먹을 수 없는 상태일 때 조용히 버려야지. 그전에 다른 사람이 버리면 더 좋고.
시댁 때문에 시금치도 안 먹는다는 말에 시금치가 무슨 죄람-싶었지만. 시금치 넣은 김밥보다 오이 넣은 김밥을 훨씬 좋아하는지라 그런 것쯤 웃어넘겼었는데.
이런.
나 상추 좋아하는데.
내가 내킬 때 직접 무쳐먹는 상추겉절이 좋아하는데.
할 수 없이 한동안 참아야겠다.
포탄같이 느껴지는 저 커다란 봉지의 상추의 숨이 죽으면, 내가 먹고 싶을 때, 먹을 만큼만 사 먹어야지. 앞으로 대화의 주제에 상추는 올리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