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에 적어놓고 잊어버린 기억.
가족이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가 있다. 사회가 규정지어 놓은 가족의 이미지는 따뜻하고 한량없이 사랑이 넘칠 것만 같다. 그런데 사실 실상의 가족의 모습은 어떠한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더 모질고 더 매서울 때가 있는 듯하다.
밝은 밤은 가족 이야기이다. 가족의 탄생과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들을 한데 묶어놓은 이야기 같다.
삼천이 이야기를 시작으로 영옥이, 엄마와 나의 이야기까지 4대에 걸친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이야기가 되는 듯하였다. 가족이라는 울타리는 나의 보호도 되지만 가장 가까운 적이 된다.
삼천이는 서러운 인생을 살았다. 백정의 딸이라는 이유로 경멸하는 눈빛을 참아내며 살아야 했다. 일제강점기에 언제라도 자신의 인생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불안을 늘 안고 살았다. 아픈 어머니를 모시면서도 늘 다른 세계를 동경했다. 그때 남편을 만났다. 남편 또한 다른 세계를 동경하는 인물이었다. 둘에게는 꿈이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답답한 현실을 떠나면 새로운 세상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을까? 개성에 도착한 그들은 사실 많이 힘들었다. 남편은 생각보다 다정하지 않았고 떠나온 가족들을 그리워하며 하루하루 버티기 바쁜 것이다. 형님이 오신다는 것에 마음이 설레어 삼천이의 발에 피가 나도 무심한 남편이었다. 이미 이루어버린 이 가족을 가족이라 여기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고향과 원가족에 대한 그리움이 늘 한편에 있었다.
이런 삼천이에게 새비의 존재는 빛과 같은 존재였다. 사랑이 고프고 가난하고 어려운 시절, 새비는 삼천이에게 마음을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전쟁이 나서 남쪽으로 피난을 와 함께 살기까지 괴로운 시절을 통과했던 전우 같은 친구였던 것이다. 어쩌면 대구에서 함께 난 시절은 이들에게 봄이었을지도 모른다. 괴로운 인생길의 찰나 같은 봄.
잠시나마 삼천이는 행복했다. 그리고 마음이 편했다.
이후에 희령에서의 삶은 역시나 괴로웠다. 남편은 자신의 원가족에 목매어 지금의 아내와 딸에게 집중하지 못하고, 결국 딸도 지키지 못했다. 삼천이의 딸인 영옥이마저 아버지의 잘못된 판단으로 결혼시켰지만, 영옥이의 결혼은 실패로 끝났다.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얼마나 삼천이에게는 지긋지긋했을까. 남편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괴로웠을까. 변하지 않은 이 사람이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삼천이도, 딸도 파괴하는 것만 같아, 이 가족이 가라앉는 이유는 저 남편 때문인 것만 같아, 이 남편을 원망하는 마음이 하늘을 찔렀을 것이다. 자신의 말은 귀담아듣지도 않는 남편의 존재가 신물이 났을 것이다. 삼천이는 실제로 남편의 죽음 앞에서도 덤덤했다. 과거에도 그래왔듯이 남은 생의 무게는 무거웠고, 살아야 했으니 살았다. 이혼한 영옥과 영옥의 딸과 함께. 기어이 살아냈다.
삼천이와 영옥이, 미선이는 그렇게 악착같이 또 살아낸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현실이 현실 같지 않아서 너무 슬펐다. 현실이 이렇게 괴로울 수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사는 게 괴로운 나날이었다. 그래서 인물들이 각각 조금씩 망가진 것이었다. 가장 사랑하는, 어쩌면 지키고 싶은 존재인 가족이라는 대상에게 그렇게 모질게 밖에 대할 수 없는 이유는 삶의 무게로 인해 각자가 조금씩 망가져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읽으며 나의 아버지가 떠올랐다. 아버지에 대한 나의 복합적인 감정을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지 난감하다. 나는 아버지가 무섭고 떠올리면 참 괴롭다. 이 사람이 아버지라서 그런 것이다. 남이 아닌 아버지여서. 나의 아버지는 2020년 10월에 췌장암 4기 판정을 받으시고 2021년 6월에 돌아가셨다. 과거에는 심적으로 가까이하지 못했으니, 병상에 계실 때라도 심적으로 가까이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30kg까지 몸무게가 빠져버린 그 사람을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는데, 막상 아버지를 대면할 때마다 여전히 마음 깊이 아버지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평소 나의 아버지의 옛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병상에서 들은 이야기가 하나 있다. 젊은 시절 아버지가 할아버지께 돈을 벌러 서울로 가야겠다고 말씀드리니까 할아버지께서 <저런 새끼한테 한 푼도 줄 돈 없다> 하셨다 한다. 그러자 할머니께서 버스정류장으로 가려는 아버지의 뒤를 따라가서 안방 장판 밑에 감춰둔 쌈짓돈을 아버지에게 주셨다 한다. 그런 이야기를 하며 아버지가 눈물을 뚝뚝 흘리는 걸 그때 처음 봤다. 병상에 앉아 있으니 마음이 약해지셔서 옛날 생각이 많이 나셨나 보다 생각했다. 병상에 계시면서도 자식이 곁에 있어도 성에 차지 않아 하시고, 결국에는 엄마의 된장국을 찾는 아버지였다.
과거 나의 모습은 아버지를 이해해 보려고 꽤 애썼던 것 같다. 그런데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사셨던 과거의 어른들의 이야기를 밝은 밤을 통해 보니 나의 세대는 과거 어른들의 삶을 이해하기 불가능하겠구나를 깨달았다. 어른들의 모진 말에 그저 상처받기만을 반복해서 허무한 생각에 늘 사로잡힌 과거에 비하면 이제야 한 발짝 성장한 기분이다. 자신이 망가진 줄도 모른 채 생의 무게를 감당해야 했기에 살아냈던 그들의 삶의 이야기는 인간으로서 비참하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아버지를 창피하게 여긴 모든 순간이 떠오르고, 최근까지도 가족들 내의 어른들을 이해하지 못해 꼰대라며 마음속으로 비웃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럼에도 내가 그들의 모든 살아온 삶을 욕하거나 비하할 수 없는 이유는 나는 겪어보지 못한 비참한 순간과 삶의 역경을 이들은 온몸으로 살아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에게 존경을 표하지 못할지언정 함부로 대하고 싶진 않다. 그게 어른들을 향한, 내 가족을 향한 최소한의 예의 같다.
오늘이 어떠한 오늘이었건 내일이 또 온다. 항상 희망차고 밝으면 좋겠지만 삶이라는 게 사실 그렇게 밝지만은 않은 것 같다. 그럼에도 우리가 내일을 다시 살 수 있는 이유는 앞서 이 고된 인생을 살아낸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삼천. 영옥. 미선. 지연이가 낯설지 않은 이유는 우리 삶의 곳곳에서 볼 수 있는 선배들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망가진 모습이 있었음에도 살아야 했으니 기어이 살아냈던 것처럼 나도, 우리도,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기어이 살아낼 것이다. 서로의 망가진 모습을 안은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