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구배경 및 연구 목적
부끄럽지 않은 글이라 자부하기에, 제 학부 졸업 논문을 올려보기로 했습니다.
학부생이 쓴 글은 학술지 기고가 어렵다고 해서요 ㅎㅎ
이 글로 말하자면... 한 명의 철학도로서 현대인의 실존에 대해 깊이 고민하며 내린 나름의 결론입니다.
비 전공자 분들께는 조금 어려울 수 있는 글이지만 최대한의 가독성을 추구하였으니 일독을 권합니다.
더불어, 따로 각주는 첨부하지 않겠습니다.
Ⅰ.서론
1. 연구 배경: 염세주의의 유행에 내재한 현대인의 실존 감각
지난 한 해 우리 사회에서 가장 주목받은 철학자는 쇼펜하우어였다. (비록 대중서이긴 하나)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는 철학서 중 최초로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기도 하였다.‘철학이 드디어 대중적 인기를 끄는 것이 아닌가?’ 하는 세속적 기대감과 ‘대중서로 개량된 철학 사상이 대중에게 오독되어 학문적 오해를 양산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경계심 이전에, 우리는 ‘과연 그 많은 독자가 어떤 동인으로 해당 텍스트를 꺼내 들었는가?’하는 보다 근본적인 물음을 던져보아야 한다. 분명 독자들의 내면에는 해당 텍스트의 독해로서 모종의 공감대를 형성할 동질적인 실존적 정동이 작용했을 것이요, 철학은 그러한 개별적 정동을 읽어내고 그것을 종합함으로써 오늘날 우리 사회의 시대정신을 규명하는 것을 그 의무이자 책임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쇼펜하우어를 위시한 ‘염세주의(Pessimism)’철학이 오늘날 대중의 관심을 얻는 이유는 무엇일지 숙고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우리의 철학계가 떠맡은 중요한 과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염세주의 철학의 근원이자 종착역은 불합리한 세상에 대한 저항을 단념한 채 개인의 내면에 오롯이 집중하는 철저한‘고립주의(solipsism)’이다. 고립주의가 대중에게 가장 공감대 있는 메시지 중 하나로 부상한 것은 개개인에게 체감될 만큼 이 세상의 불합리가 표면화되었으며, 그 불합리의 위협이 개인의 저항 의지가 단념시킬 정도로 고조되었음을 뜻한다. 기술의 발전, 정치적 불안정성, 양극화의 심화, 전쟁의 위협, 환경파괴 등은 매 순간 현대인의 실존을 위협한다. 그리고 고립주의는 그러한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한 일종의 ‘실존적 웅크림’이다. 그리고 그 웅크림이야말로, 염세주의 철학의 인기를 추동한 현대인의 정동이라고 필자는 진단한다. 즉, 우리는 오로지 ‘살아남기 위해’ 이 세상을 등지고 개인의 내면에 집중하고 있다. 이는 가히 인간이라는 생물종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생물학적인 반작용이다.
그러나 해당 현상은 단순한 생물학적 생존법의 의미를 넘어 인간의 형이상학적 본성의 작용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생존을 위해 택한 고립주의가 곧 인간이 단순한 생물학적 존재이기 이전에 생존이라는 지극히 일차적인 활동을 위해서도 고도의 관념적 정당화가 필요한 고차원적 존재임을 입증하는 증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고립주의는 그 어감이 가지는 부정적 뉘앙스와 반대로 개개인의 삶에 고차원적 정신활동의 발판이 된다. 고립주의가 유도한 개인의 내면에 대한 몰입이 한편으로는 비로소 자신의 주체성과 진정으로 대면할 기회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자면 오늘날 염세주의 철학의 인기는 한편으로는 각박한 세상에 대한 한탄이지만 동시에, 어떻게 하면‘더 잘 살아낼 수 있는지’ 묻는 실존적 고뇌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즉 우리(현대인)는 여전히 삶에 대한 약동하는 의지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다. 이는 현대인은‘실존적 웅크림’에서 벗어나 ‘실존적 발버둥’을 쳐나갈 힘을 가지고 있음을 방증한다.
2. 연구 목적: 왜 실존주의인가?
실존적 웅크림을 대변했던 염세주의의 유행은 머잖아 실존적 발버둥을 대변하는 ‘실존주의(existentialism)’의 유행으로 대체될 것이라고 필자는 진단한다. 염세주의의 철학적 전제들은 머지않아 결국 시대의 흐름과 인간의 본성에 의해 부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염세주의의 존재론, 인식론적 전제인 세계 혹은 타인에 대한 눈 가리기식 부정은 미봉책으로서, 결국 결코 통제될 수 없는 이 세계가 우리의 삶에 현시하는 더 거대한 실존적 부조리 앞에서 불가능한 것으로 판명될 것이다. 염세주의의 윤리적 전제인 개인주의는 개인의 생존을 위협하는 범지구적, 사회적 문제에 대응하는 협력과 연대의 요구로 반박될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실존과 세계의 관계를 내면적(혹은 현상학적)으로 고찰하고, 지극한 개인주의를 넘어 실존과 실존 간의 연대를 지향하는 실존주의 철학에 대한 요구가 나타날 것이다. 무엇보다, 무의미의 폭거 속에서 삶의 의미를 재구성하려는 인간의 형이상학적 본성이 철학사의 보고寶庫 속에서 실존주의를 재발굴할 강력한 동인이 되어주리라고 생각한다. 19세기와 20세기에 거친 대륙의 사상사에서 염세주의 철학 이후에 실존주의 사조가 융성한 역사가 반복되듯 말이다.
본 연구는 그러한 실존주의의 시대에 예비하여 현대인의 실존적 불안과 무력감을 철학적으로 진단하고,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사상을 통해 실존적 위기 극복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현대인의 근본 기분으로서‘불안’Angst이 어떠한 기원과 양태를 가지는지, 하이데거의 이론을 통해 살펴볼 것이다. 이후, 그러한 불안과‘자유’liberté 의 관계를 사르트르의 입장에서 해석해 보며 현대인이 자유 앞에서 느끼는 실존적 무력감의 양태를 개인적, 사회적 차원에서 고찰할 것이다. 그리고 결론에 이르러 사르트르가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L'existentialisme est un humanisme』(1946) 에서 밝힌 바와 같이 실존주의가 현대인에게 제공할 수 있는 낙관론적이고도 의지적인 태도에 대해 고민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사실 본 고의 핵심 주제인‘실존주의’라는 철학 사조는 철학사적으로 봤을 때 비교적 약한 통일성으로 규합된 다소간 임의적인 규정일 수 있다. 같은 맥락에서, 본 고에서 다루고 있는 학자 중 스스로를 명백한 실존주의자로 규정한 사르트르와 달리 하이데거의 경우 이러한 포섭에 실제로 격하게 반발했음을 인정한다. 그러나 필자가 규정하는 바, 실존주의자로 여겨지는 철학가는 첫째로, 양차 세계대전의 직접적 영향권인 1940년대에서 1950년대라는 시대적 배경을 공유하고 있다. 즉, 실존주의는 급변하는 세계의 정세가 개개인의 실존 내지는 생존의 문제에 직접적인 위협으로 다가온 시대에 발흥했다. 둘째로, 키에르케고르와 니체를 필두로 하는 유신론/무신론적 ‘윤리-의지주의’倫理-意志主義 를 계승하고 있다. 이는 곧 인간은 세계에 내던져진 자유로운 존재이며, 스스로의 삶을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개척할 수 있는 의지적 존재로서 윤리적 책임을 진다는 전제를 따름을 의미한다. 셋째로, 후설의 현상학을 진리 탐구를 위한 학문적 방법론으로서 비판적 수용/변용하고 있다. 그들은 의식의 지향성, 순수 의식 경험에 의거한 존재론/인식론을 펼쳤다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그 목적을 본질 탐구에 의한 보편학의 성립이 아닌, 행위하는 실천적 주체의 발굴과 윤리적 각성의 당위성 확보에 두었다는 점에서 후설과 구분된다. 이러한 규정에 따르면 하이데거와 사르트르는 명백한 실존주의자라는 데에 이견은 없을 것이다.
실존주의는 메시지를 전달받은 개인이 이성적으로 각성하고, 심적으로 결심하여, 의지적으로 변화하고, 종국에는 주체적으로 행동할 것을 요구한다. 즉 실존주의는 사변적이라기 보다는 지극히‘정치적’인 사조이다. 그러한 정치적 목적의 달성을 위해서는 학적 엄밀성 이상으로 예술적(문학적) 계기 역시 중요하다. 본질적으로 읽는 이의 마음이 동하지 않는다면 실존주의는 결코 그 소명을 다할 수 없는 공허한 메아리로 남기 때문이다. 그러한 명백한 사실이 실존주의를 ‘학’學 으로부터 멀어지게 하지만, 동시에 우리의 실천적 삶에 가까워질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철학이 곧 인간의 삶을 실질적으로 이롭게 해야 한다는 목적의식을 가진 필자는 다소간의 위험을 감수하고 그러한 정치성을 수용하고자 한다. 그리고 본 고를 읽은 이 중 한 명이라도, 우리의 실존을 위협하는 세상, 타인, 삶, 그리고 스스로의 나약함과 주체로서 맞설 의지의 씨앗이 될 어떤 조그마한 실존적 정동을 품을 수 있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