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현대인과‘불안’

하이데거 불안 개념의 현대적 적용

by 사객

1. 현대인의 근본 기분,‘불안’

현대인은 온갖 정신적 문제에 신음하고 있다. 한국의 자살률은 OECD 평균보다 2배 이상으로, 타 국가들에 비해 극단적으로 높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거니와, 우울감 경험률, 정신 건강 문제 경험률, 실제 정신과 진료 방문율 등 수많은 통계가 계속해서 증가하고 있다. 그러한 안타까운 작금의 현실 속에서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 하는 지점은 이러한 정신적 문제의 바탕에 ‘불안감’이 있음을 호소하는 이들이 눈에 띄게 늘었다는 것이다. 2021년 정신건강실태조사에 따르면, 한국 성인의 불안장애 평생 유병률은 9.3%로 보고되었다. 우리에게 비교적 익숙한 이름인 공황장애는 평생 유병률이 0.1%에 불과하고 고소 공포증이나 환 공포증 등 다양한 대상에 대한 심각한 공포감을 포괄하는 특정 공포증의 유병률이 도합 6.3%인 것으로 미루어 보았을 때 매우 높은 수치임을 알 수 있다. 불안이 과도해 일상생활에 심대한 지장을 초래하는‘장애’로 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늘고 있다는 것이다.


논의의 범위를 20대로 한정할 경우, 문제는 더욱 심각해진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 발표한 『2017~2021년 우울증과 불안장애 진료 통계 분석』에 따르면, 2017년 불안장애 환자 수 59,080명에 비해 2021년의 환자 수는 110,351명으로 무려 86.8 퍼센트 폭증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 사회에 만연한 ‘불안 심리’는 우리 사회를 병들게 하는 심각한 임상 병리적 문제임을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무엇보다 ‘불안’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이라는 감정과는 궤를 달리한다. 두려움이라는 감정은 언제나 그 두려움의‘대상’을 가지고 있는 반면, 불안은 구체적 대상이 부재한 막연한 공포감이라는 점에서 다스리거나 치유하기 극도로 어려운 정서 상태이기에 우리는 이 문제를 더욱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철학의 요구는 단순한 임상심리학적 해석과 처방의 범위를 넘어서는 것이다. 임상 병리적 차원의 불안은 개개인의 사연과 환경, 정신적 자극에 따라 극도로 개별화되기에 철학적 논의의 대상으로는 부적합하다. 그것은 의학의 역할이지 철학의 역할이 아니라는 점은 자명하다. 따라서 본 고에서 다루고자 하는 불안은 그러한 병리적 차원이라기보다 실존적 차원에서의 불안이다. 정확히는 개인적 차원의 불안을 넘어 존재론적 차원의 불안감이다. 어쩌면 이는 임상 심리학적 불안의 바탕이 되는 개별적 정동의 배경이자 모종의 시대정신일 수 있다.


현대인의 실존적 불안의 양태는 대표적으로 개인의 심리와 다음과 같은 외부적 조건의 상호작용으로 발생한다.

첫째, 기술 발전에 따라 위협받는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

둘째,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미래에 대한 대비의 부재와 불확실성.

셋째, 전쟁과 환경파괴 등 직접적 생명의 위협과 유한성의 자각.

넷째, 그러한 결코 해소될 수 없는 구조적, 실존적 불안을 의도적으로 은폐하려는 반-실존적 태도.

이 중 넷째 양태는 특히 중요한데, 사회 문화적 프로파간다와 이로부터 위안을 얻는 개인의 심리적 방어기제가 보편적으로 작용하며 개개인의 실존적 구제를 실질적으로 방해하고 있음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러한 은폐 시도가 -기득권의 권력 유지라는 음모론적 해석 이전에- 첫째, 둘째, 셋째 양태의 심각성에서 비롯된 개인의 생존본능에서 비롯된 자구책일 것이라는 이해하에서 이를 ‘실존적 웅크림’이라고 정의한다. 이러한 불안의 양태는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가? 그러한 양태는 인간 실존의 어떠한 특수성으로부터 기원하는가? 이에 대한 존재론적 물음을 던져보아야 할 것이다.


2. 하이데거의 ‘불안’ 개념과 그 적용


하이데거는 일찍이‘불안(Angst)’을 실존적 차원에서 탐구했다. 이에 하이데거의 철학은 분명 현대인이 경험하는 불안의 양태들에 대한 실존론적으로 분석에 있어 유의미한 통찰을 제공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그가 실존, 즉 현존재 Dasein 에 대해 어떻게 해석하였는지 간단히 알아보아야 한다.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들 중에서 오직 인간만이 모든 경이 중의 경이를 경험한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 하이데거에게 있어 인간은 존재자 중 유일하게 존재를 자각함과 동시에 존재에 대해 의문(존재-물음)을 품을 수 있는 존재이다. 이는 곧 인간이 여타 존재자들과 구별되는 존재 양식을 가짐을 의미한다. 하이데거는 이에 인간 존재에 특별한 명칭을 부여하는데 그것이‘바로 거기에 존재함’을 의미하는 현존재(Dasein) 이다.

현존재는 세계에 던져진 존재 즉, 피투성 (Geworfenheit)을 가지는 존재이자, 동시에 언제나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의미를 형성해 나가는‘세계-내-존재’(In-der-Welt-sein)이다. 이때 현존재가 세계와 관계를 맺는 근본적인 방식은‘염려(Sorge)’이다. 이때의 염려는 기존 통속적으로 사용되는 언어의 의미와 달리 단순한 심리적 걱정과 근심을 넘어서는 존재론적 개념이다. 즉 염려는 그 자체로 현존재의 존재이다. 이는 현존재가 세계-내-존재로서 스스로와 세계의 의미를 형성해 나감에 있어 그 근본적인 태도에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고려와 책임이 있음을 뜻한다. 즉,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현존재와의 관계 속에서만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현존재의 염려는 과거 - 현재 - 미래의 시간성 속에서 나타난다. 과거는 현존재가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 스스로에게 이미 현사실적으로 주어진 환경과 조건을 수용하는 것이다. 즉, 피투성의 수용이다. 현재는 현존재가 처해진 상황 속에서 지속적으로 세계와 상호작용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시간성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이다. 현존재는 ‘앞을 향해 있는 존재(Vorlaufen)’로서 그 스스로의 존재의 의미를 열어젖힐 수 있는 가능성을 갖는다. 그 열어젖힘의 가능성이야말로 ‘실존(Existenz)’의 본질이다. 따라서 그저 존재할 뿐인 다른 모든 존재자들과 달리 실존하는 존재인 현존재의 시간성은 종래의 시계열적 구성인 과거 - 현재 - 미래 순이 아니라 미래 - 현재 - 과거 순으로 이루어진다. 현존재는 스스로를 미래의 가능성에 던져 ‘기획투사(Entwurf)’ 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개별화된 존재의 의미를 형성할 수 있으며, 그렇게 진정한 실존으로서의‘본래적 나’로 거듭난다. 그러나 대다수의 현존재는 그러한 본래적 나로 거듭나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일상을 살아가는 존재이며,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타인으로 가득 찬 세계에서 일상성과 일상의 존재 가능성은 주로 타인에 의해 규정되어 평준화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일상에 빠져 사는 (Verfallen) 대다수의 현존재는 타의와 자의에 따라 존재 물음의 가능성을 은폐하고 비 본래적 나 로 실존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현존재가 일상성에서 벗어나 본래적 나로 거듭날 수 있는 계기는 무엇일까?


현존재의 존재인 염려는 현존재에게 특정한‘기분(Stimmung)’으로서 현상한다. 즉, 우리가 어떤 것에 마음을 쓰고 있음에 대한 현상학적 증거는 우리가 세계 속에서 특정한 정서적 상태를 취한다는 것에 있다. 이때, 하이데거는 기분을 특정한 근거와 대상에서 촉발되는 단순한 개별적 심리상태라기보다 모종의 존재론적 근거로서 규정한다. 그러한 근거로 작용하는 현존재의‘근본 기분’(Grundstimmung)이 바로 본 장의 주제인 불안(Angst)이다. 이때, 불안은 우리 정신의 고유한 기능인 존재의 부정, 즉 무화 작용을 통해 파악하는‘허무虛無’(Nichtigkeit)의 가능성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즉, 자신의 의미를 부여했던 모든 세계가 무의미할 가능성이, 그리고 그 때 느껴지는 그 낯섦(Unheimlich)이 현존재로 하여금 불안을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러한 무화 작용은 결국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염려의 시간성 하에서 미래의 가능성으로 나아가고 그 스스로의 존재를 부정할 수 있는 가능성, 즉 죽음의 가능성으로 이어진다. 이에 인간은 ‘죽음을-향한-존재(Sein-zum-Tode)’이며, 그 필연적 유한성의 자각은 또다시 현존재에게 거대한 불안으로 현시된다.


앞서 언급한 바 있듯이 불안은 대상으로부터 근거 지어지는 두려움과 달리 대상을 가지지 않는 기분이기에 특정한 현상의 귀결이 아니며, 존재 자체의 근거이다. 이에 불안이라는 정서의 발현은 곧 현존재가 일상성 속에서도 그 스스로의 본래적인 존재 근거를 마주할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한다. 왜냐하면 일상에 빠져 사는 대다수의 현존재가 느끼는 불안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에 대해 존재 물음을 던지는 바로 그 순간에 비로소 현상되거나, 반대로 현존재는 현상된 불안으로부터 존재 물음을 던져볼 동기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전후 관계의 문제를 넘어 불안과 존재 물음은 필연적으로 동반된다. 불안과 동반하는 그러한 존재 물음은 다시 한번 스스로와 세계의 개별화된 의미를 형성할 가능성을 열어젖히는 계기가 된다. 즉 본래적 나로 거듭날 계기가 된다. 즉 하이데거에게 불안은, 죽음을 향한 존재인 현존재의 근본 기분임과 동시에 현존재가 일상성 속에서 비본래적으로 실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근거이자, 본래적 나로 거듭나 참되게 실존할 수 있는 필수적 조건이다.


이제 불안에 대한 이러한 공통의 이해를 바탕으로 앞서 규정한 불안의 양태들을 하이데거의 이론을 통해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1) 첫째, 기술 발전에 따라 위협받는 인간성에 대한 근본적 의문


이는 세계-내 존재로서 현존재가 세계에 대한 염려 속에서 느끼는 낯섦의 감정이다. 현존재가 심려(그 중 고려 Besorge)를 통해 바라보는 세상 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기술은 근본적으로 ‘도구(Zeug)’이며 이는 우리의 관심에 따라 우리의 필요에 복무한다. 그것이 기술과 인간의 전통적이며 바람직한 관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심려의 대상이 곧 우리의 일자리, 심지어는 인간성 자체를 위협하는 존재자로 거듭나고 있다. Chat Gpt를 위시한 인공지능은 인간이 종래 가져왔던 인간성에 대한 신앙을 송두리째 무너뜨린다. 연산력은 물론이거니와 이성적 판단력, 창의성, 심지어 (표면적이지만) 소통 능력까지 보유한 인공지능이 우리의 삶에 이미 깊숙이 침투해 있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기술의 발전이 있어 왔고 그에 따른 인간성 침해의 부작용을 지적해 온 이들이 존재하지만, 이토록 인간성에 대한 우리의 인식과 일상에 거대한 영향을 미치는 기술은 존재하지 않았다.


인간의 관념 체계가 따라잡을 수 없는 속도로 진행되고 있는 기술의 습격 속에서 현대인은 스스로를 둘러싼 세상에 대해 지극한 낯섦을 느끼게 되며, 이는 의미의 무화 작용으로 이어진다. 내가 평소 단순한 도구로서 여겨온 모든 것들이 나 자신의 염려를 넘어서는 존재자로서 존재할 수 있음을 처음으로 실감하는 것이다. 이는 세계의 의미에 대한 부정, 그리고 인간 스스로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져 불안을 야기한다.


2) 둘째,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미래에 대한 대비의 부재와 불확실성

이는 시간에 대한 염려와 그가 쏟고 있는 관심을 ‘물질화’하는 물질만능주의의 혼합에서 비롯된 불안이다. (그것에 극명히 반대하는 바이지만) 자본주의를 금과 옥조로 받아들이는 우리 사회에서 시간의 가치는 곧 부의 가치와 동일시되곤 한다. 그 사람의 과거와 현재를 대변하는 것은 그가 축적한 물질적 풍요이고, 그러한 물질적 풍요의 기반 하에서만 미래를 도모할 수 있다는 관념이 팽배하다. 이는 본래적 나의 관점에서 보자면 자본주의라는 체계에 퇴락됨으로써 야기된 시간성에 대한 왜곡이지만, 동시에 가장 현실적인 현대인이 필연적으로 도달해야 하는(그래야만 미래를 도모할 수 있는) 시간성 인식이다.

그러한 불안은 단순한 내적 불안감에서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타인과의 비교, 계층수호와 이동에 대한 집착, 현실에 대한 좌절감과 패배 의식 등 단순한 실존적 불안의 정도를 넘어 심리적 악영향을 초래하는 극단적 불안의 양태가 재생산되고 있다. 특히 빈자의 경우, 그들의 시간성은 결코 미래지향적일 수 없음이 분명한데, 이는 물질적 압력에 의해 현재의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지극히 당연한 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물질화 되어버린 시간성의 그릇된 인식이 또 다른 불안을 야기한다.


3) 셋째, 전쟁과 환경파괴 등 직접적 생명의 위협과 유한성의 자각

현대인은 각종 뉴스를 통해 죽음의 실질적 위협을 직면하며 필연적인 유한성을 매 순간 자각하게 된다. 러-우 전쟁, 이-팔 전쟁 등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전면전이 벌어지고 있다. 요즈음에는 비교적 잠잠하지만,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극단적 종교 세력에 의한 테러가 세계 각국에서 빈번하게 벌어지기도 하였다. 세계의 패권이 긴박하게 요동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추가적 무력 충돌의 가능성이 만연하다. 이뿐 아니다. 이상 기후 역시 우리의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한다. 전 세계에 걸쳐 나타나는 기록적인 폭염, 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 잦아진 태풍과 기후재난들이 인류를 그야말로‘살해’하고 있다. 우리나라 역시 그러한 위협에서 자유롭지 않다. 한반도는 여전히 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폭약고이며, 이상 기후 역시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니다. 2024년 12월 3일에 벌어진 비상계엄 사태는 민주주의의 위기였음과 동시에 국민의 머리에 총부리가 겨눠진 생존의 문제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는 정보통신의 발달에 따라 그러한 죽음들을 실시간으로 목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제 죽음은 우리에게 사변적으로가 아닌,‘경험적’으로 가까운 것이 되었다. 하이데거의 현존재는 불안의 정서로부터 사변의 과정을 거쳐, 본래적인 나를 되찾음으로써(혹은 되찾는 과정에서) 죽음을 향해 기투한다. 하지만 현대인은 스스로가 바람 앞 촛불처럼 나약한 필멸자요, 그 필멸의 순간이 예상치 못하게 다가올 수 있음을 경험으로 안다. 그러한 경향성이 때로는 죽음의 의미를 가볍게 만들기도 하지만, 유한성에 대한 필멸자의 실존적 불안감은 더욱 커지고 있다.


4) 넷째, 그러한 결코 해소될 수 없는 구조적, 실존적 불안을 의도적으로 은폐하려는 반-실존적 태도


이는 그 자체로 일상에 빠져있음을 의미한다. 비-본래적 나로서, 현재의 쾌락에 만족하며 미래를 지향하고 스스로를 기투하기 보다는 미래를 현재화하고 과거를 합리화하는 비-본래적 태도의 온상이다. 본래 하이데거는 이러한 비-본래적 태도가 그 자체로 죄악인 것은 아니며, 평생 그러한 태도로서 살아가는 세인들(Das man) 역시 평균성(durchschnittlichkeit)을 띄는 현존재임을 천명하였다. 양심(Gweissen)과 책임 있음(Shuldigsein)의 문제를 언급하지만, 그 역시 윤리적 당위성을 가진 명령이라기 보다는 현존재의 존재 양식에 대한 해석일 따름이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현대 사회의 구조 속에서는 지나친 낙관성으로 비칠 심산이 크다.


왜냐하면, 이제 위의 3가지 불안의 양태는 복잡한 현대 사회의 시스템 속에서 단순한 실존적 절망감을 양산하는 것을 넘어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개인의 삶과 생명 그 자체를 위협하는 중차대한 문제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이제 본래적 나를 되찾고 미래를 향해 스스로를 기투하지 않는 인간, 주체로서 결단하며 살아가지 않는 인간, 즉 퇴락된 인간은 단순한 윤리적 열위를 넘어 생물학적 생존경쟁에서 열위를 가지는 존재로 거듭날 가능성이 있다. 이제 본래성 회복은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일 수 있다.


그렇기에 비교적 낙천적인 하이데거의 진단과 달리, 그러한 본래성 회복의 단초가 되는 ‘불안’을 인지하지조차 못하게 은폐하려는 시도는 도덕적으로 악한 것이다. 타인의 불안을 가리는 조직적 은폐의 경우 이는 타인에 대한 비교우위를 점하려는 경쟁적 태도의 발로이다. 즉, 기득권의 공고화를 위한 대중 기만의 전술이다. 반면 그러한 움직임에 대한 의심 없이, 혹은 그러한 움직임을 인식하면서도 그러한 불안감을 스스로 은폐하는 이들이 있다. 이때 그들은 무지의 죄를 저지르고 있다. 그들의 무지가 스스로의 삶을 파괴하고 있을 뿐 아니라, 구조적 은폐에 가담함으로써 타인의 삶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주체로서 깨달아야 한다.


따라서 이제 현대인은 살아남기 위해 불안해야만 한다. 그 불안감을 딛고 진정한 주체로서 실존해야 한다. 그것이 필자가 언급한‘실존적 발버둥’의 첫 단계이다. 하이데거의 철학은 그러한 주체(본래적 나)-되기의 가능성이 우리의 존재론적 바탕에 위치함을 밝혔다. 이때 중요한 것은 하이데거가 그러한 주체되기의 조건으로 내세운 것은 ‘이성’이 아닌 특정한 정서적 상태, 즉 ‘불안’이었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나 칸트를 위시한 전통적 지성 주의자에게 주체성의 발현은 이성을 통한 진리의 발견과 동일시되었다. 그러나 니체나 키에르케고르 등의 반-지성주의적 전통을 이어받은 하이데거에게 있어 이성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구체적 삶과 이를 이끄는 정동이다. 이로써 하이데거의 현존재 분석은 일종의 지적 특권처럼 여겨져 온‘주체-되기’를 보편화하고, 민주화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본래적-나로 거듭나 참되게 실존할 수 있는 존재임을 밝혔다는 데에 큰 의의가 있다.

그 사상적 유산을 물려받은 우리는 비-본래적 삶보다 본래적 삶이 바람직함에, 또 우리가 그러한 삶을 선택할 수 있음에 어렴풋이 동의한다. 현대인인 우리는 하이데거의 철학을 공부하지 않더라도 자신이 다른 누구도 아닌 나라는 주체임을 알며, 또 주체적으로 살고자 지향한다. 그러한 지향은 일상성과 충돌하며 곧 우리를 불안하게 하지만 그러한 되먹임 고리(Feedback loops) 속에서 쳇바퀴를 도는 삶 역시 또한 현존재의 숙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실존적 숙명을 받아들이더라도 현대인이 진정한 주체로 거듭나는 데에는 커다란 장애물이 존재한다. 그것은 ‘자유’(Freedom)라는 이름의 부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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