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현대인과‘자유’

사르트르의 ‘자유’ 개념과 그 현대적 적용

by 사객

1. 자유로부터의 도피하는 현대인

자유는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로서 숭상되곤 한다. 자유롭고 싶냐는 물음에 그렇지 않다고 대답하는 이는 아마 없을 것이다. 우리 사회와 개인적 삶의 여러 궤적을 실증적으로 추적하다 보면, 수많은 이들이 자유를 향한 열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을 알 수 있다. 대다수 현대인의 가치체계에서‘자유 민주주의’는 정치적 이상이다. ‘경제적 자유’는 개인적 삶의 이상이다. 기업인과 경제인은 ‘자유시장 경제’를 부르짖고, 미디어와 그 소비자는 ‘표현의 자유’를 지켜달라고 소리친다. 이러한 ‘자유지상주의’하에서 ‘자유’는 대중을 호도하는 유용한 정치적 메시지가 되기도 하고, 마케팅 캐치프레이즈가 되기도 하며, 수많은 예술 작품의 주제가 되기도 한다. 자유는 현대적 의미의 주체라면 누리고 싶은, 또 누려야만 하는 지향이다. 인류의 역사를 자유라는 궁극적 목표를 향한 민중의 투쟁사로 여기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와 알렉스 드 토크빌 등 서구 중심적 역사가들의 해석은 (비판할 지점도 많지만) 한편으로 자유를 찬양하는 현대인의 인식을 표현한 지적 자화상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에 국한해서 보자면 자유는 더 큰 의미로 다가온다. 식민통치와 독재의 억압으로부터 저항하며 반-자유적(으로 보이는) 체제와 관념적/물리적으로 투쟁해 온 우리 민중의 DNA에는 자유의 소중함이 내재해 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패트릭 헨리의 말마따나 총부리 앞에서도 권력에 맞설 용기를 가진 우리 민족에게 자유는 목숨만큼이나 소중한 것이다. 필자 역시도 현대인으로서, 자유를 지향하며 소중히 여긴다. 그러나 현대인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일상적 관점에서 벗어나 객관적 관점에서 현대인의 삶을 보다 관조적으로 살펴보자면, 때때로 그러한 자유는 공허한 메시지에 불과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심지어 오히려 현대인은 자유롭기를 스스로‘포기’하고 있음이 관찰된다. 이는 현대인이 자유의 가치를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유로부터 멀어지기를 결심하고 있는 것으로 일종의 ‘도피’이다.


이러한 도피의 양태는 크게 타인과의 관계성에 따라‘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 두 범주로 구분되며, 그 두 범주 내에서 자유에 대해 취하는 태도에 따라 자유의 ‘은폐’와 자유의 적극적‘부정’으로 구분된다. 즉 현대인에게 있어 도피는 다음 네 가지 양태로 나타난다.


첫째, 개인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자유의 은폐

현대인은 개인적 지향이나 상태를 나 자신의 존재와 동일시하며 이를‘정체성’으로 규정한다. 성별, 계급, 나이, 취미, 직장, 출신 지역, 정치 성향 등 현대인에게 주어지는 정체성의 홍수는 일견 ‘그 수많은 정체성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음’이 곧 자유라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 어떤 정체성이라도 그것을 자신의 존재 자체와 동일시한다면 스스로의 가능성을 언어적 범주에 가두게 되는 것임은 자명하다. 정체성은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 역할이 어떠하든 결국 언어적 범주라는 사실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존재론적 차원의 자유는 언어화 이전의 의식 작용으로부터 말미암는다. 무엇보다 수없이 많은 정체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결국 유한한 수로서 가산하므로‘무한’을 지평으로 하는 자유에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따라서 모종의‘정체성화’(Identification)와 실존적 자유는 양립할 수 없다.


현대인은 나라는 본질적 존재에 대해 고찰하기 이전에 스스로를 특정한 정체성과 동일시하려는 강한 충동을 느낀다. 그러한 동기화는 내부적인 완전성을 가지고 있기에 진정한 ‘나’로 접근하는 사유의 통로는 차단된다. 즉 나라는 존재의 본질은 정체성이라는 장애물에 의해 은폐된다. 이러한 은폐의 가장 대표적이고도 실증적인 예시는 우리 사회에 불어닥친 MBTI 열풍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부터 나를 소개하는 가장 유용한 언어가 되어버린 이 16가지 성격 유형은 나 자신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도구’라는 본질을 전도하여 우리 스스로를 ‘규정’하는 지경에 이르렀다.“나는 I라서 그래”, “나는 P라서 그래”라고 이야기하는 이들은 그 스스로 자신은 자유민이 아님을 시인하고 있다. 4글자의 영문자로 표현되는 언어적 규정으로, 그렇게 규정되거나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수 있는’ 스스로의 가능성을 가로막으며 자신의 자유로움을 가리고 있다.


둘째, 사회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자유의 은폐


우리 사회는 서구적 개인주의와 유교적 공동체주의의 융합이라는 독특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다. 우리는 개인의 자유와 주체성을 추구하는 만큼이나 관계-지향적인 사고방식에 익숙하다. 아무리 현대인이 자본주의,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성장하였다고 하더라도 관혼상제冠婚喪祭를 비롯하여 학업이나 직업관, 교우관계나 취미 생활 등 개인의 삶 전반에 영향을 주는 공동체주의적 전통을 배제하고 우리 사회에 관해 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러한 두 체제의 결혼은 한편으로는 다양성과 역동성을 낳음으로써 사회 발전과 문화의 다변화를 추동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하지만 이는 한편으로 그 두 체제가 가진 모순점 역시 동시에 수용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러한 모순점은 개인이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받아들이는 것을 가로막기도 한다.


이러한 상황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사례는 개인주의적 사회의 대표적 특성인 ‘능력주의(Meritocracy)’가 공동체주의적 사회의 특성인 ‘계층화 (Stratification)’와 융합됨으로써 생겨난 우리 사회의 ‘능력주의적 계층화’이다. 이 두 가지 관념의 혼합은 첫째로 ‘사회가 인정하는 능력의 범주를 제한하는 것’으로써 나타난다. 개체가 가진 능력의 발현 가능성을 제한한다는 점에서 개인의 자유를 은폐한다. 둘째로, 자유를‘특정한 계급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와 동일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은 개인이 –실제로 전혀 그러한 상황에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자유를 누리고 있음에 안도하거나, 반대로 그러한 자유를 결코 가질 수 없음에 좌절하며 절망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뛰어난 관찰력과 담력, 손재주와 윤리 의식을 가지고 있어 의사라는 직업에 매우 적합한 능력을 갖추고 있지만, 사교육은 꿈도 꾸지 못하며 아르바이트를 통해 생계에 보탬이 되어야 하는 가난한 고등학생의 예를 들어보자. 학창 시절 입시에 열중하여 의대에 입학할 수 있는 ‘성적을 받는 것’을 매우 값진 능력으로 여기는 우리 사회에서 그는 자신 역시도 공평한 기회를 통해 원칙적으로는 의사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납득하지만, 동시에 그러한 기회가 자신에게 정말로 주어진 것은 아님을 실감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이때 그 학생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에 인식론적 차원에서도, 윤리적 차원에서도 결코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한 접근을 가로막는 것은 분명 사회이며, 따라서 특정 정체성의 달성이 곧 자유의 성취라는 뉘앙스를 풍기는 모든 사회적 시도는 자유의 본질을 호도하고 진정한 자유의 의미를 퇴색시킴으로써 개인이 진정한 자유를 깨닫지 못하게 하는 사회적 차원의 은폐 시도이다.


셋째, 개인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자유의 부정


이때의‘부정’은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자유의지를 부정하고 (일종의) 결정론을 신봉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 사회에서 개인이 자유를 부정하는 대표적 양태는‘미래에 대한 운명론적 태도’로서, 즉 자신이 미래를 향해 ‘열려있는’ 존재라는 사실을 부정하며 그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이미‘닫힌 것’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양태는 현실에서 초월적 법칙에 대한 집착이나 주술(샤머니즘 등)에 대한 신봉 등 소위 원시 종교와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 사주팔자나 타로, 신점과 같이 미래에 대한 예측과 언어적 규정에 집착하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문제는 그러한 예측이 그 예측을 들은 이의 오늘에 영향을 주어 자기충족적 예언이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자기충족적 예언을 경험한 이들은 마치 과학적 근거라도 목격한 것처럼 운명론을 더욱 신봉하게 되며 종국에는 자신의 미래를 예언가의 손에 맡기게 된다. 미래의 나의 모습이 이미 모종의 법칙하에 결정되어 있음을 인정하고, 타인이 규정한 미래에 대한 ‘언어’가 현재 자신의 구체적 삶을 형성해 나가도록 허가한다. 이는 자유에 대한 적극적 부정과 다름이 아니다.


넷째, 사회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자유의 부정


사회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자유의 부정은 특정한 이데올로기의 형태를 띈다. 그 이데올로기의 이름은 자신의 존재론적 근거를 일원화하는‘환원주의’로서 현대에 이르러 주로 신학적 차원에서는 -현대적, 대중적 의미에서-‘종교’의 형태로, 세속적 차원에서는 현대 과학에 대한 과도한 신격화를 바탕으로 하는‘물리-환원주의’(physical reductionism)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들 각각은 스스로가 모종의 목적을 가지고 세상에 태어났거나, 혹은 물리적인 인과관계에 지배받는 단적으로 수동적인 존재임을 받아들이도록 개인을 설득한다.

우선 ‘종교’(그중에서도 특히나 일신교)는 개인에게 그가 가진 삶의 궁극적 지향이 신의 의도에 부합해야만 한다는 윤리적 목적과 강제성을 부여한다. 우리는 창조주의 목적에 따라 설계된 피조물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에는 신의 뜻에 따라 정해진 경로가 존재한다. 가령 기독교인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소명’(calling)에 따라 ‘순종’ (Obedience)하며 ‘성화’(Sanctification)하는 삶을 살아야만 하고, 이슬람교도는 알라의 뜻에 따라 ‘이바다’(عبادة), ‘다와’(دعوة), ‘니야’(نية) 등의 원칙을 따르며 살아가야 한다. 따라서 인간의 자유는 언제나 절대적인 것이 아닌, 신에게 허락된 바에 따라서만 인정되며, 이는 행위의 최종 심급이 스스로가 아닌 신이라는 존재자에 있다는 점에서 진정으로 자유로운 삶과는 분명히 괴리된다.


다음으로 ‘물리-환원주의’는 인간을 과학의 탐구 대상인‘물질’과 동일시하려는 시도로서 그 시작에서부터 자유에 대한 부정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들에 따르면 인간은 단지 생물학적인 기계에 불과하며, 인간 존재의 기원 뿐만 아니라 삶과 도덕 이를 추동하는 사유나 행위, 사회와 문화 등 모든‘인간적인 것’은 다른 모든 물질이 그러하듯 물리적 법칙과 자연적 인과관계에 종속된다. 이는 모든 인간 삶의 구체적이고도 실존적인 경험과 삶의 의미 역시도 모두 과학의 문제이며, 인간은 결과적으로 과학을 통해 완전히 해석될 수 있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예컨대 신경과학 실험에서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인간의 행동은 의식의 개입 이전에 신경 전달 물질을 통해 결정된다. 이에 해당 신경전달 물질의 작용을 분석하는 것으로 행동의 의미가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그들은 비-물리적인 대상에 대한 관념은 무지에서 비롯한 환상일 뿐임을 주장하는데, 이러한 논리에 따르자면 우리는 결코 자유로운 존재일 수 없으며 “자유의지는 환상”일 따름이다. 물질의 세계에 자유란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종교와 다른 방식으로 극도로 합리화된 논변을 통해 개인으로 하여금 자유를 부정하도록 유도한다. 인간은 물리 법칙의 피동적 수혜자일 따름이지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가진 능동적 주체일 수 없다.


혹자는 환원주의가 곧 ‘도피’의 첫째 양태인 ‘정체성화’와 동일한 것이 아니냐는 지적을 할 수 있다. 가령 종교를 믿는 것은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이나 칼리파(Khalifah) 등으로 정체성화한 것이고 물리적 환원주의를 따르는 것은 스스로를 하나의‘생물종’으로 정체성화한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이는 환원주의가 개인의 실존에 있어 어떤 층위에서 받아들여지느냐에 따라 부분적으로 맞는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언급되고 있는 환원은 정체성화와는 분명하게 다른 것이다. 왜냐하면 기존의 정체성화는 선택의 자유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자유에 대한 부정을 그 귀결로 갖는 데 반해, 환원주의는 자유에 대한 부정을 그 바탕으로 하기 때문이다. 스스로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을 ‘의지’하지 않는다면 결코 환원주의의 마수는 우리의 자유에 닿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네 가지 양태는 사회와 개인의 관계 속에서 현대인이 자유에 대해 취하는 모순적이고도 회피적인 태도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하지만 문제는 현대인에게 도대체 왜 그러한 도피가 일어나느냐 하는 것이다. 즉, 그러한 도피를 추동하는 정동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는 인간 실존에 있어 자유가 가지는 의미를 존재론적으로 규정함과 동시에, 그러한 자유가 우리에게 어떻게 현상하는가를 현상학적으로 규정함으로써 규명될 수 있을 것이다. 본격적 논의에 들어가기 전에 사실 앞선 논의에는 하나의 거대한 맹점이 있다는 것을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그 맹점은 우리가 앞으로 시도할 자유에 대한 탐구의 시발점이 된다.


그것은 필자의 논의가 인간의 자유를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인간이 자유로부터 ‘도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곧 ‘이미 자유로운 상태’에 있거나, 그에 준하도록 지극히 가까워져 있음을 의미한다. 은폐와 부정이라는 표현 역시 치열한 증명 이전에 그러한 전제를 수용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여기서 몇 가지 근본적 질문이 떠오른다. 자유는 인간의 ‘지향’인가? 아니라면 인간은 ‘이미’ 자유로운 존재인가? 만약 인간이 이미 자유롭다면 인간이 자유를 지향한다는 것은 논리적·현실적으로 가능한가? 지향으로서의 자유와 도피의 대상인 자유는 근본적으로 같은 것인가? 그리고 그 도피는 진정으로 가능한 것인가?

이러한 질문들은 단순한 철학적 의문에 머무르지 않는다. 자유와 도피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사르트르가 정의한 ‘자유(liberté)’ 개념을 중심으로 논의를 이어가고자 한다.


2. 사르트르의 ‘자유’ 개념과 그 적용

사르트르는 인간 존재의 본질적 존재 근거를 ‘자유’로 규정하며, 자유가 우리 실존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탐구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곧 자유이다. 이는 인간 존재가 다른 존재자와 구분되는 존재론적 특성에서 말미암는다. 이는 인간의“실존은 본질에 앞선다”는 것이다. 인간을 제외한 이 세계의 다른 모든 존재자(즉, 사물)는 그 나름의 목적을 부여받은 채로 실존한다. 즉, ‘본질’이 존재에 선행한다. 가령, 인공물인 의자는 사람들이 앉기 위한 도구로서 존재한다. 또, 돌과 같은 자연물 역시 그저 본질에 따라 존재할 뿐 결코 스스로를 변화시킬수 없다. 즉, 존재는 ‘단단하게 굳어있는 것’이다. 사르트르는 이렇게 단단하게 굳어있는 존재들을 즉자존재 (en-soi)라고 명명하였다. 반면 인간에게는 이미 주어진 본질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삶의 구체적 양상 속에서 그 스스로를 대상화하며 그 자신의 본질을 스스로 규정하며 미래의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의 본질을 창조해 나갈 수 있는 존재, 즉 대자존재(pour-soi)이다. 이때 창조의 가능성은 그저 발휘되면 좋은 ‘조건’과 같은 것이 아니다. 그보다 인간은 필연적으로 스스로의 미래를 창조해 나가야만 하는, 즉 ‘자유롭기를 선고받은’ 존재이다. 인간은 오직 자유로서 존재한다. 이처럼 자신의 자유로운 본질을 자각하고, 그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하며 책임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사르트르가 말한 진정성(authenticité)이다.


이러한 사르트르의 입장에 따르면, 자유는 우리가 지향하거나 도피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지향’과 ‘도피’는 모두 자유로부터의 탈락 상태를 의미하는 반면, 사르트르에게 자유는 결코 인간의 실존에서 분리될 수 없는 존재론적 근본 구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서 우리가 던진 질문들은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대체되어야 한다. “ 인간은 오롯이 자유로운 상태에 있으면서도 스스로를 자유와 분리된 존재로 여기고자 하는가?”즉, “인간은 왜 자신의 존재론적 구조를 수용하지 못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는 일종의 자기부정으로, 사르트르는 이러한 인간의 태도를‘자기기만(mauvaise foi)’이라고 지칭한다.


이때, 기만欺瞞이란 표현은 그 자체로 모종의 의도성을 함축하고 있다. 이는 인간이 그 스스로 자신의 자유를 이미 자각하고 있거나, 필연적으로 자각할 수 있는 존재임에도 그러한 사실로부터 자기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기만이라는 행위가 주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에게 행해지는 행위임에 반해 자기기만의 경우에는 첫째로 그 자신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며, 둘째로 ‘표면적으로는’ 아무런 이익이 없는 행위인 것만 같다는 점이 특별하다. 이는 또다시 각각 자유로서의 의식과 자유 자체가 가지는 특성에서 기인한다.


우선 자기기만이 의식의 작용인 한, 현상학의 지향성 원칙에 따라 해당 의식은 필연적으로 특정한‘대상’을 동반한다. 그리고 그 대상은 분명 자기 자신인데, 이는 의식이 그 스스로를 대상화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즉, 의식은‘반성’을 그 특성으로 갖는다. 그렇다면 그러한 반성을 행하는 의식의 주체는 반성으로 대상화되기 이전의 자기라고 할 수 있다. 데카르트의 ‘Cogito’를 차용하여, 사르트르는 이러한 자기를 ‘반성 이전의 Cogito’라고 지칭하였고 이를 순수하게 자유로운 의식의 본질로 규정하였다. 이때 반성은 단순히 자기 자신을 ‘대상화’하는 데에서 끝나지 않고 스스로를 ‘무화(néantisation)’할 수도 있다. 즉, 의식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존재의 의미를 부정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다. 이 무화의 가능성이 바로 인간 의식의 본질이며, 자유의 존재론적 구조를 형성한다.


이때 무화의 가능성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과 세계의 무의미성, 즉 허무를 직면하게 만든다. 자신이 특정한 범주화를 통해 이해해 오던 세상의 모든 존재자가 그러한 통제 시도를 벗어나 있음을 깨닫는 순간 인간은 소설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이 그러했듯 극도의 불안(Angoisse)과 욕지기(disgust)를 느낀다. 이는 하이데거가 세계-내-존재로서 인간이 느끼는 불안이라고 이야기한 것과 유사한 정서이다. 그러나 하이데거에게 불안은 자신의 유한성과 본래적-나로 나아가는 계기를 제공하는 반면, 사르트르에게 불안은 모든 선택과 행위의 책임이 오롯이 '자유로운 나'에게 있음을 자각하게 하며, 그로 인해 거대한 부담을 느끼게 되는 계기가 된다. 바로 이 점에서 자기기만의 심리적 이익이 도출된다. 자기기만의 목적은 자기 자신과 세계의 무의미화에서 비롯되는 불안, 그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책임감의 부담과 압박을 회피하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고찰을 통해 우리는 앞서 언급한 ‘도피’의 양태들은 곧‘자기기만’의 양태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양태들에 작용하는 개인의 실존적 정동에 대한 진단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이때, 사회적 차원에서 벌어지는 은폐와 부정의 경우 역시 이를 유도하는‘사회’ 혹은 특정 ‘조직’의 의도성과 목적을 구조적으로 분석하는 것 이전에 그들의 의도에 따라 종국에는 자기 자신을 기만하게 되는 궁극적 행위 당사자인 개인의 차원에서 분석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개인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자유의 은폐


스스로를 특정한 정체성으로 규정한 채, 해당 정체성이 부여한 역할을 자신의 본질로 규정하는 자기기만은 사르트르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사례이다. 사르트르는 『존재와 무』에서 그 유명한 웨이터의 예시를 통해 한 개인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망각한 채 모종의 역할극을 수행하는 연기자로 살아가는 경우를 지적한다. 웨이터는 자신의 직업적 역할에 완전히 몰두한 나머지, 마치 자신의 본질이 웨이터 그 자체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는 지나치게 능숙하고 경직된 동작으로 손님들을 응대하면서 자신의 행동이 곧 웨이터라는 정체성을 구성한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웨이터라는 직업은 결코 그의 존재 전체를 대표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는 이 사실을 은폐하며 자기기만을 행하고 있는 것이고 이로써 스스로의 자유와 가능성을 외면한 채 특정한 역할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다. 이렇게 직업이라는 정체성으로 자신의 존재 전체를 대변하는 경우는 오늘날에도 너무나 흔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현대인의 정체성에는 직업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르트르가 분석한 당대에 비해 극도로 세분화되고 다양화된 정체성이 존재한다. 이에 진정한 문제는 정체성이 언어적 규정을 통해 스스로의 자유를 은폐한다는 것을 일차적인 반성의 차원에서 납득하더라도, 그러한 규정이 동시에 넓은 선택권이라는 자유로운 행위 근거를 갖는 것처럼 보이기에 손쉽게 합리화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찰스 테일러의 ‘인정의 정치(Politics of Recognition)’ 개념을 비롯하여, 정체성에 대한 현대 정치 철학적 논변들에서는 특정한 정체성을 선택해 살아갈 수 있음을 존중받는 사회가 곧 자유를 보장하는 사회인 것처럼 묘사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러한 논의는 그 자체로, 고정된 정체성을 합리화하는 수단으로 작용한다. 물론 진정으로 자유로운 나 자신을 인식한 이가 특정 정체성을 획득하는 것은 한편으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행동의 결과로 인정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정당화된 정체성의 추구가 정체성과 자기 자신을 오롯이 동일시하는 결과로 이어질 심산이 크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진정한 나를 발견하기 위한 개인의 실존적 물음은 정체성의 차원에서 합리화되며 그러한 정체성이 부여한 사회적 역할만이 스스로의 가능성이라고 한계 짓는 자유의 은폐가 나타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현대인은 대자존재로서의 가능성을 상실하고, 정체성이 규정한 본질만을 존재의 근거로 삼는 즉자존재로 격하된다.


둘째, 사회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자유의 은폐


이는 앞서 언급한 ‘합리화’의 문제와 직결된다. 합리화는 의식의 차원에서 일어나는 작용이지만 그 근저에는 사회적 인정이라는 배경이 중요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앞서 웨이터의 사례에서 역할과 자유의 관계를 언급한 바 있으나 이때의 웨이터가 그 스스로 웨이터가 되는 것을 의지하고 있으며, 동시에 타율의 아닌 자율에 의해 해당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이 분명하다면 이는 참된 실존의 가능성을 다소간 함축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특정한 정체성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주체가 개인이 아닌 사회인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웨이터에게 ‘그러한 정체성은 의사라는 정체성에 비해 열등한 것’이라고 눈치를 준다면 자율성을 향한 그의 열망은 손쉽게 좌절되곤 한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우리는 결코 그러한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워질 수 없다. 타인은 매 순간 통제되지 않는 다른 대자존재를 즉자존재화 하여 바라보며 자신의 자유(대자존재)를 보전하려는 투쟁적 성격의 욕망을 가진다. 타인의 집합으로서의 사회는 집단적으로 그러한 즉자존재화를 시도한다. 이때 ‘능력주의적 계층화’는 그 극단적 예시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첫째 양태에서 나타나는 정체성의 추구를 통한 자유의 은폐를 한 차원 높은 차원에서 이중으로 은폐하는 것이다. 결국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현대인의 정체성 획득이 진정으로 주체적인 행위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따라서 현대인의 정체성 획득 추구는 일차적인 차원에서 스스로의 자유를 은폐하는 자기기만에서 끝나지 않기에 더욱 문제적이다. 자유의 행사라고 굳건히 믿어왔던 행위가 종국에 사회적 시선에 의해 좌절될 때, 이는 실존적 절망감으로 인한 허무주의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사회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자유의 은폐는 개인적 차원의 자기기만을 넘어 본격적인 인간 소외(alienation)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사르트르는 소외가 인간이 자신의 본질적 자유를 상실하고, 외부적 규정에 의해 존재가 결정될 때 발생한다고 이야기하였다. 즉, 사회가 규정한 정체성과 역할에 고착된 현대인은 자신의 실존적 가능성을 상실하며, 사회적 시선에 의해 구조적으로 소외를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셋째, 개인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자유의 부정


개인적 차원에서 자유를 부정하려는 양태는 현대인이 스스로 미래의 열린 가능성을 제한하는 결정론을 받아들이는 것임을 이야기한 바 있다. 이는 자유에 대한 의도적‘책임 회피’로서, 또 다른 양태의 자기기만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인간은 자유롭기에 언제나 미래의 불확실성 속에서 주체적인 선택을 내리며 살아간다. 그 선택은 곧 미래의 가능성을 스스로 개척할 수 있는 의지적 본성의 발로이다. 그러나 이때,‘의지’를 가지고 미래를 끝없이 선택해 나간다는 것은 곧 그러한 선택에 대한 책임의 문제를 발생시킨다. 미래를 향하는 모든 인간의 행위는 스스로의 책임에 대한 고려를 동반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책임감의 무게가 그저 힘겹게 하루하루를 살아낼 뿐인 일반적 현대인에게 거대한 부담으로 다가오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기에 사르트르는 자유를 인간의 실존에 내려진 일종의 ‘저주’(condemnation) 라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정론은 미래의 열린 가능성을 부정하고 이미 닫힌 것으로 규정한다. 결정론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미 정해진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개인의 선택은 언제나 그 정해진 미래에 종속되게 되며, 책임은 희석된다. 그러나 자유롭도록 선고받은 존재인 인간에게 삶에 대한 책임은 결코 전가되거나, 희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혹여 결정론을 받아들인다고 하더라도 그 결정론을 ‘받아들임으로써 발생하는’ 삶의 문제들은 여전히 열린 것으로 남아있을 것이며, 결정론은 그러한 모든 삶의 문제들을 올바르게 직시할 수 없게 하는 장애물로 작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또, 결정론은 결정론을 받아들인다는 행위와 태도 역시 자유로운 선택의 결과임을 부정할 수 없다는 내부적 모순점 역시 가지고 있다. 따라서 자유의 부정을 통한 결정론의 수용은 윤리적으로나 논리적으로나 심대한 결점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현대인이 그러한 결정론에 매몰되기를 자처하는 작금의 행태는, 한편으로는 결정론에 의존(depend on)하여 현실의 비참함의 원인을 나 스스로가 아닌 외부에 투영함으로써 위로받으려는 심리적 경향성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또 다른 한편, 사회적인 차원에서 개인의 자유를 본격적으로 부정하고자 하는 시도들 역시 목격된다.


넷째, 사회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자유의 부정


현대의 환원주의는 이데올로기의 형태로 개인에게 특정한 신념의 체계를 주입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부정하고 있다. 그러한 시도가 해당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주체들의 이권에 어떻게 작용하는가의 문제는 차치하고, 해당 이데올로기를 수용하는 개인의 자유에 어떠한 심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고찰하는 것이 본 고의 취지에 부합할 것이다. 현대인이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두 가지 이데올로기는 신학적 차원에서 종교이며, 세속적 차원에서는 물리-환원주의임을 밝힌 바 있다.


이때, 이러한 이데올로기가 진정으로 문제시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 삶의‘가치’를 일원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특정한 가치에 따라 사는 삶의 매우 의미 있는 것임을 인정하였지만, 그러한 모든 가치의 근거는 곧 자유여야만 한다. 그러나 종교와 물리-환원주의는 가치의 근거를 자유가 아닌 외부의 존재자로부터 도출한다. 종교는 신과 그 해석인 교리를, 물리-환원주의는 물질과 그 해석인 자연법칙을 모든 가치의 근거로 여긴다. 따라서 환원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 자체로 자신의 존재 근거로서의 자유를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데올로기는 개인이 그러할 자유를 원칙적으로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의 가치체계만을 통해 함부로 부정하기에는 극도로 정교화되어 있다. 종교는 인류의 기원에서부터 인간의 정서를 움직이는 가장 매력적인 가치체계를 형성해 왔으며, 과학은 인간을 구성하는 다른 한 중요한 축인 이성의 영역에서 가장 세련화된 교리를 가진 신흥 종교가 되어가고 있다. 이들로부터 스스로의 주체성을 보호하고 자유의 수호자로 거듭나 진정성을 발휘하는 것은 어쩌면 한 개인에게 주어지기에는 너무나 무거운 과제일 수 있다.


이로써, 우리는 현대인이 불안감을 느낌으로써 본래적-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기회를 가로막고 있는 자유라는 이름의 부담에 대해 사르트르의 시선에서 고찰해 보았다. 그리고 현대인이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양태들을 개인의 차원과 사회적 차원에서 각각 분석함으로써 이것이‘자기기만’의 또 다른 이름임을 밝혀낼 수 있었다. 이제 결론에 이르러 우리는 다시 서론에서 언급한 문제의식으로 돌아와 실존주의 철학이 현대인의 실존감각에 던질 수 있는 메시지를 종합해 보아야 한다. 이로써 필자가 어째서 이러한 실존주의의 메시지가 염세주의 철학의 유행을 야기한 현대인의 실존적 무기력감을 극복할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라고 확신하는지 밝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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