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년 다닌 대기업 퇴사 일기 (2)

인간적으로 4번 전배는 너무하지 않니?

by 난나

스핀 오프, 즉 분사가 마냥 나쁜 것은 아니다. 나도 엄청 좋아하는 드라마를 만드는 회사 <스튜디오 드래곤> 의 경우, CJ ENM에서 분사된 회사다. 본체인 CJ로부터 자유롭게, 콘텐츠 제작 자체에 집중하고, 독립된 법인으로서 자생할 수 있는 회사. 누군가는 CJ의 안정성을 선택하고, 누군가는 나가서 진짜 성장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그런 분사. 하지만, 내가 다니던 곳은 많이 달랐다.




왜 말을 못 해, 구조조정이라고!

구체적으로 이렇게 달랐다.


내가 다니던 회사(편의상 이 회사)는 무려 4번의 이동/분리 과정 동안, 모든 일을 비밀리에 했다. 외부에 전략 노출을 핑계로 댔지만, 사실 좋은 일은 널리 알림이 맞고 (그래야 상장도 하고 주가도 불리지) 굳이 엄청 비밀리에 할 필요도 없다.

설상가상 직원들에게 가장 철저하게 비밀리에 움직였다. CJ의 분사는 분사되어 나갈 회사의 조직원이 될 사람들이 최소한 ‘의견 개진’등 참여했다고 전해 들었다. (당시 우리 회사에 CJ 출신이 좀 있던지라 들은 이야기지만, 사실관계 파악은 못했다. 스튜디오 드래곤 다니시는 분은 댓글 좀...)

이 회사는 분사 과정에 ‘대상자’들을 철저히 배제했다. 구석 골방에서 비밀리에 보고서를 쓰고, 대상자들의 미래를 지들 마음대로 결정했다. 의사 따윈 묻지 않았다.


그리고, 위와 같은 차이를 결국 4글자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는 걸, 나도 정말 천하의 똥멍청이가 (이 부분은 본인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심한 욕으로 바꿔 읽어주시길 바란다. 글쓴이의 깊은 빡침을 공감하며.) 아닌 이상 이제는 알 수 있었다.


그냥 구조조정이라고 해, 이 ㅇㅇㅇ들아



그 날의 출근길

사실 연초에 소문을 듣고 나서, 나는 결심을 굳힌 상태였다. 솔직히 나는 당시 회사에서도 쌈닭이긴 해도 일을 맡기면 책임감 있게 추진한다는 것을 인정받은 상태였다. 사실 쌈질도 쌍욕도 일에 애정이 있을 때나 하는 거지, 무슨 분노조절장애도 아니고 멀쩡히 회사 다니는 사람이 왜 그런 평판을 들어가며 일을 하겠나.


그대로 다녔으면, 아마 나는 최소 파트장 정도의 직책을 맡았을 것이다. 퇴직 면담에 나보고 나가지 말라는 회유 중 하나도 그거였다. 너 내년에 장 해야지 어디 가냐고.


소문이 있던지로부터, 한 5-6개월 되었나. 출근길에 뉴스를 보았다. 이 회사가 그 신사업부를 분할하여 외부 회사와 Joint venture를 만든다는 이야기였다. 어딘가 이상하지 않나? 소문이 있었고, 뉴스로 들었다. 사내 공지가 아니고, 직원 대상 안내가 아니고, 인터넷 하다가 뉴스를 읽었다.


나는 그 날의 출근길을 아직도 기억한다. 그 순간 느껴지던 나의 빡침과, 또 다른 한 편의 짜릿한 기쁨.


나는 바로 그 날 오전 출근길에, 이직하려고 준비 중이던 회사에서 최종 합격 통보를 받았다. 아침 일찍 나의 헤드헌터로부터 소식을 들었고, 정말 드라마틱하게도 같은 날 재직 중이던 회사의 분리/매각 소식을 들었다.


세 번째 회사로 전배 당하고, 그때부터 영문 이력서를 정리하며, 좀 유망하다는 스타트업 몇 곳과 외국계 기업 중 괜찮은 곳 몇 곳을 지원하며, 마음속 한편에 ‘정말 좋은 조건이 손에 잡히는 대로 떠나자’라는 생각으로, 칼을 가는 심정으로 회사를 다닌 지 벌써 1년 하고 반이 더 지나가던 시점이었다. 그렇게, 길었던 나의 이직 시도는 결실을 맺었다.


퇴직 면담

떠난 조직을 흉볼 생각은 없다. 다리를 불태우지 말라는 말도 있지만, 솔직하게 이야기해서, 회사가 정말 엄청나게 구렸으면 1년 반도 못 버티고 당장 퇴사를 했겠지.


하지만, 떠난 조직의 잘못된 점은 이야기를 하고, 이 글을 읽는 분들은

1) 그런 회사는 그만두시라고

2) HR에서 일하시면 절대 그러지 마시라고

이 글을 적기 시작한 것이 크다.


사실 함께 일하는 사람들은 정말 괜찮았다. 비록, 우리 조직이 회사 전체에서 천덕꾸러기 마냥 미운털이 박히긴 했지만, 솔직히 회사 차원에서 투자는 많이 했다. 업계에서 그래도 괜찮은 경력직을 많이 데려왔다. 다만 그들을 데려와서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DNA가 아니었을 뿐. 기존의 보수적인 아저씨들도, 그냥 업이 다르고 기존에 일하던 스타일과 다르니, 싫어할 수 있다. 이해 못할 수 있다. 결국 이 모든 건, 그 둘을 섞어놓고 방만했던 윗선의 잘못이 크다고 본다.


직속 임원과 퇴직 면담에서, 나는 그런 이야기를 했다.


실장님 때문에 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냥 이 회사가 나한테 이러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회사를 믿지 못하겠다. 4번이나 회사 마음대로 옮기라니, 너무하지 않냐. 연봉을 많이 올려주시면 생각해보겠지만, 이 조직은 그런 제안조차 조직장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보수적인 조직이라는 걸 안다. 그래서 나를 잡을 수 있는 카드가 아마 없으실 것 같다.


실제로도 그랬다. 회사는 새로 이직하는 회사에서 올려준다는 연봉에 맞춰줄 만한 제도가 없다고 했다. 사실 국내 대기업을 다닌다는 건 그런 것 같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 중 나 하나, 굳이 회사에서 붙잡을 이유도 없었고 나를 붙잡자고 제도를 바꿀 리 만무했다.


그래도 괜찮았다.

사실, 2-3천 정도를 올려준다면 남을 생각이 있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나름 8년을 몸담은 회사는, 인사팀 퇴직 면담에 공채 출신 신입을 들여보냈다. 나름 나도 공채 출신, 면담의 자리에서 그 친구에게 조용히 이런 말을 했다.


ㅇㅇ님 보시기에도 이상하죠? 한 사람보고 네 번을 회사를 옮기라니. ㅇㅇ님도 공채 출신이죠? 남 이야기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번에 팔려 나가는 회사에 ㅇㅇ님네 팀에서도 1-2명 가라고 할지도 몰라요. 인사 업무도 누군가는 해야 하고, 제가 처음 회사 분사할 땐 그렇게 인사/재무에서도 같이 갔더든요. 제 동기/선배들. 저연차라고 그냥 무조건 가라 한 거죠. ㅇㅇ님도 너무 회사 믿지 마세요.


8년을 다녔다. 한 직장을. 비록 나의 건강보험엔 4개의 회사가 찍혔고, 명함은 계속 바뀌었지만. 어쩌면 나만 하나의 회사를 다녔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8년을 일했다. 그런 나에게, 회사는 형식적인 면담으로 답했다. 알고 있었다. 뭐가 그리 큰 일이라고. 나 따윈 그저 이 회사에겐 티끌이라고. 그런 게 아니고는 남의 커리어를 이렇게 함부로 대할 순 없다고.


처음 합격했을 때, 지하철 역에서 내려 회사까지 걸어가는 길에 높은 빌딩 위 회사 로고에 어딘가 모르게 뿌듯한, “이 자리를 내가 얻어냈다”라고 생각하던 철없던 신입사원부터 시작해서, 네 번이나 강제 발령을 겪을 때까지. 참 많은 걸 겪었다.


회사가 한번 더 나에게,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던 날, 너무 늦었지만, 내 능력 부족으로 너무도 오래 걸렸지만, 드디어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제 그만 하자.


다음 시간에는, 그 2년의 시간 동안 내가 어떻게 이직을 준비했는지를 간단히 적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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