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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oooooz Jul 31. 2020

내돈내산 집 마련기

그래서 돈은 어떻게 마련했나  

부모님 도움 없이 집을 샀다고 하니 다들 눈이 동그래졌다.


집을 구할 때 제일 먼저 한 결심은 절대 부모님 도움을 받지 않을 것,이었다. 애초에 전셋집을 먼저 생각했던 것도 내 주머니 속 예산을 고려했기 때문이었다.


운 좋게 들어간 회사에서 내 첫 월급은 백구십 얼마쯤이었다. 착실히 직장생활을 한 덕에 8년 간 연봉의 앞자리가 몇 차례 뒤집어졌고 그때마다 꼬박꼬박 적금을 불렸다. '계란은 바구니에'라는 말을 믿고 매 달 계란을 낳을 때마다 바구니에 차곡차곡 쌓았는데 다행히  몇 년간 곳간을 허는 일은 없었다.


초년생 때는 3~40만 원, 몇 해 보내고서는 10만 원쯤 용돈을 더 늘리고 나머지는 보험, 청약, 저축 등으로 흩어졌다. 옷 좋아하고 놀기 좋아하는 나한테 넉넉하지는 않았어도 아주 쪼들리는 돈은 아니었다. 사고 싶은 거 사고 먹고 싶은 것도 먹었지만 또래 친구들이 하나씩 늘려가는 명품가방이나 명품신발은 못 샀다.


결혼을 앞두고 통장 잔고를 정리해보니 마음이 뜨끈했다. 넉넉하진 않지만 적당한 집을 내 힘으로 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작년,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보았을 때 모은 돈에 적당히 대출을 받으면 전세 대신 매매도 거뜬하겠다는 계산이 섰다. 부동산 사장님의 말대로 '서울에서 몇 안 남은 저평가된 아파트'라 가능했다. 계약금을 걸고, 중도금, 잔금을 치르는 동안 통장에서 돈은 빠져나가는데 마음은 풍요로웠다. 다들 첫 집을 구입하면서 왜 소감이 그렇게 길었는지 알게 됐다.


비슷한 시기에 회사에서 또래 동료들의 수다거리는 주로 양가 부모님이 얼마를 보태주셨다느니, 누구네는 시세가 얼마인 어느 아파트에 신혼집을 얻었다느니 같은 것들이었다.


결혼을 앞두고 있으니 나에게도 '너는 어떻게 해?' 같은 질문이 곧 잘 들어왔는데 그때마다 나는 17평 소형 아파트를 그간 모은 돈으로 마련했노라고 밝혔다. 정신승리지만 다들 눈이 휘둥그레 졌을 때 몹시 기분이 좋았다. 어떻게 그 돈을 모았냐고 물어보면 해 줄 말이야 많다.


신용카드가 없었고, 형편에 맞게 소비를 하였으며, 직장생활을 하면서 대학원에 다닐 땐 씀씀이를 더 줄여 저축을 한 덕에 곳간을 헐지 않고서도 학비를 모두 충당할 수 있었다고. 월급만큼 용돈을 쓰는 너희가 부럽지 않겠느냐만 나는 내 돈 내산 한 이 집에서 토끼 같은 남편이랑 알콩달콩 깨 볶고 살고 있다고.


그리고, 나를 강력하게 잡아 준 짠순이 우리 엄마가 있었다고.


엄마는 딸을 잘 알았다. 그 딸은 씀씀이가 컸고, 가지고 싶은 것이 많고 경험하고 싶은 것이 많았다. 첫 월급을 받았을 때 월급 통장이 엄마 장롱 속으로 들어간 대신 대학 때부터 사용하던 체크카드에 일정한 양의 생활비가 입금되었다.


딸의 욕망이 비뚤어지지 않도록 일 년에 한두 번씩 다니는 해외여행을 막지 않았고, 제주도에 미쳤던 시절 한 달 에 한 번, 두 달에 한 번 바다를 건너갈 때도 모른 척해줬다. 처음부터 타이트했던 용돈 생활이었기 때문에 몇 번의 여행으로 고정적인 저축이 어려워지진 않았다. 대신 아껴 써라, 씀씀이를 줄이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한 달에 한 번쯤이나, 적금을 타는 날이면 엄마는 내 자산이 어느 정도가 되었는지 확인해줬다. 그리고 결혼을 결정하고 집을 구입하기로 했을 때, 엄마는 장롱 속 통장들을 모두 내어줬다. 말로만 듣던 내 자산을 눈으로 확인 한 날, 규모와 상관없이 엄마에게 너무 고마웠다. 딸을 잘 알았던 엄마의 관리가 아니었다면 내 성격에 어림도 없었을지 모른다.


부모님 도움을 넉넉히 받은 또래들이 부럽지 않다면 완벽한 거짓이고 집을 구하게 되기 전까진 말도 못 하게 배가 아팠다. 몸 뉠 곳을 정하지 못해 '헬조선' 소리하며 시름시름 앓던 날, 시댁의 도움으로 으어어억 소리 나던 신혼집을 구했다는 회사 동료의 이야기를 듣고 현타가 와서 그 날은 퇴근 후 바로 집에 바로 들어가지도 못했다.


출발선이 다르다는 생각도 여전하다. '으어어억' 소리 나는 재산을 이미 가진 또래를 영원히 따라잡지 못할 수도 있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매일 기준을 고쳐 잡는다.   


지금은 상황이 또 달라서 올해 같았다면 집을 살 수 있었을까 싶지만, 작년의 나는 힘으로 내 집을 마련했고 뿌듯하고  흐뭇한 마음으로 이 아늑한 공간에서 잘 살고 있다. 일생에 길이 남을 가장 크고 중요한 소비였고 그 기분을 잘 간직하고 싶어서 이 글을 썼다. 이제 다시 곳간을 채워야겠다.



His comment

그저 고맙다. 장모님께도 감사하지. 우리 열심히 살자. 한번씩 찾아와 폭주하는 소비 요정님은 이제 내가 붙잡아 줄게.  


대학 신입생 때 만든 계좌로 쓰고 있는 체크카드와 항공 마일리지에 눈이 멀어 만든 첫 신용카드
요즘의 소확행. 지금도 용돈 생활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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