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영원히 관찰자

by 곰살

이 글은 관찰로 가득하다. 관찰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그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침마다 닭 대신 개가 짖고, 음치 새가 지저귀고, 자명종 대신 군용 헬기가 시간을 알리는 집이 있다. 가릴 새도 없이 젖고 마르는, 죽여도 죽지 않는 존재들과 살려도 살지 못하는 존재들이 공생하는 곳이 있다. 고요하지만 약동하고, 여리지만 단단하며, 한없이 어둡지만 그래서 더 잘 보이는 빛의 시간이 있다.

내가 사는 곳이 그렇다. 머리 위에 놓인 것은 하늘, 발아래 놓인 것은 땅으로 펼쳐진 것은 푸름이고 가려진 것은 잿빛인 동네. 전철 승강장에 혼자일 때가 많고 사람보다 백로와 고양이를 더 자주 만나지만, 멀지 않은 곳에는 분명 시간 되면 쏟아져 나오는 학생들과 그보다 많은 어르신들이 교차하며 같은 길을 걷는 떠들썩한 동네도 있다.


골목 곳곳에 일기장을 새긴 유년의 고향을 떠나 이곳에 온 지도 3년이 되었다. 지긋이 지나온 삶의 궤적을 숨 쉬는 땅에 옮겨 심을 지긋한 나이도, 언덕길의 고단함을 모른 채 천진하게 깔깔거리는 나이도 아닌, 녹지 않은 얼음들 사이로 여전히 치열하고 절박하며 단호한, 그런 나이에.


도시와는 달리 이곳에서는 부러운 것들이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몇 가지 꼽자면 난 곳으로부터 벗어나 큰 고양이의 집 하나를 간택하고 마당 한가운데에서 낮잠을 자는 4.59kg의 수컷 고양이, 겁 많은 껍데기를 벗어던진 채 위험하고 느리지만 저 갈 길 휘저어 가는 달팽이, 겨울의 얼음장 같은 고단함을 ‘짓눌린다’ 말하지 않고 ‘잠시 덮일 뿐’이라고 말하는 자두나무, 예쁜 말을 건네지 않아도 곱게 피어나는 야생화... 저 작은 존재들의 용기와 끈기 정도다.


전시는 미셸 들라크루아의 화가 인생을 네 개의 악장으로 담아 놓았다.


파리의 야경을 시작으로 전개되는 알레그로(:활기차게). 굴뚝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어둠에 음영을 주는 거리의 조명들과 그림의 숨결을 채우는 군중이 보인다. 파란 옷을 입은 소년이 보이고 희멀건 강아지가 보인다. 미래를 가늠하기보다 순간을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 보이고, 각자 소유한 것으로 은근히 속도에 경쟁이 붙은 사람들도 보인다. 어둠 속에 사랑이 보이고, 밝음 속에 계절이 보인다.


이어서 미셸이 90세 이후에 그린 작품들이 모여 있는 모데라토(:보통 빠르기)의 공간. 아득한 만큼 더 짙어진 그 시절의 기억처럼, 미셸 역시 그의 유년을 그리기만 한 것이 아니라 추억하고 있음이 느껴진다. 밝고 선명해야만 아름다운 것이 아님을, 똑바르고 분명해야만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안단테(:천천히, 걸어가듯이)로 추억하는 미셸의 여름날은 실바람에도 살랑이는 숲 소리와 시간을 건너는 발소리, 그리고 그리운 존재들의 말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역시 그 옆에는 ‘네 발로 디뎌야지’라고 조언하는 듯한 강아지들의 눈길도 있다.


그 눈길의 끝에서 하얗게 덮인 눈길이 시작된다. 아다지오(:매우 느린 속도로)로 영원을 향해 가는 길은 끝이 아님을 아는 것처럼 여전히 분주하고 생동하며, 온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사랑을 흩날리고 있다. 떠오르는 얼굴과 그리운 계절이 있는 한, 부러 그려 볼 삶이 아닐는지.

싫어하는 것들에 대해 쓸 수는 있지만
싫어하는 것들에 대해 그리기는 어렵지 않을까
부정의 감정을 분출하는 글은
뱀독을 입으로 뽑아내는 일이지만
그림은 그 자체로 애정의 포옹일 테니까
움직임의 연출도 없이
마법 지팡이도 없이
사전적 정의도 없이
나도 본 적 있는 것을
나도 가진 적 있는 연필과 붓으로
나는 그린 적 없는 무언가를
누군가 알아주기 전부터
오랜 세월 꾸준히 해왔을 한 인간의 태도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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