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함에 부르짖던 어느 날, 제주에 내렸다.

하늘연달 제주 하루

by 곰살

두 달 전부터 '급' 일사천리로 계획된 제주 한 달 살이. 한창 한 달 살이가 인기를 끌던 때부터 지금까지 '나도 그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다. 남들 다 하는 대로 하고자 하는 주의도 아니고 안 간지도 너무 오래된 제주를 떠올렸을 때 야자수와 주상절리밖에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초점은 집이 아닌 곳에서의 한 달, 그리고 엄마와 함께하는 시간들이었다. 해외가 아니니 일하기도 문제가 없었고 부담도 덜했다. 2주 정도 제주에서 지내고 온 친구의 후일담을 들으며 SNS에서 핫하다는 음식점에 마음이 동했으나 값은 훨씬 비싸고 더군다나 제일 싫어하는 한없는 웨이팅이 보장된 그곳을 갈 이유는 없었다.


3시 20분 출발에서 50분으로 30분이 지연됐다. 우리에게 맞는 정도로 짐을 챙기고 나니 우체국 택배 18000원어치, 추가 수화물 18000원이 부과됐다. 우리가 야무지게 살 생각을 하면 아깝지 않은 돈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 때 신생 기업이었던 진에어, 그때는 승무원들이 정말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당시 꽉 끼게 불편한 스커트를 입어야 하는 스튜어디스를 배려하는 파격적인 행보였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다시 스커트로 돌아와 있었다.

날도, 기온도(여름 같다는 것만 빼면) 너무 좋은 날. 가족, 친구, 연인, 홀로 각자의 목적에 맞게 제주로 가는 이들이 비행기에 올랐다. 승무원은 타성에 젖은 영혼 없는 얼굴로 비상시 대처법 안무를 선보였다. 좋은 데 가는 줄도 모르고 울어대는 아기, 이륙부터 착륙까지 미동 없는 자세로 독서하는 여자, 기내 팸플릿을 들여다보는 또 다른 여자, 그리고 막간을 이용해 과제 도서를 읽은 나와 글을 쓰는 엄마까지.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약간의 발냄새와 함께하는 약 1시간의 비행을 대하는 자세도 제각각이다.


우리를 강원도로 데려다 놓는지, 제주도로 데려다 놓는지 모를 정도로 획일적인 장소들만 돌아다니던 수학여행의 기억. 장소보단 함께하는 친구들과의 시간이 더 소중한 때였다. 수동적으로 바라보던 제주의 풍경, 그 풍경이 변했더라도 기억 못 할 정도의 오랜 기억을 안고 침 몇 번을 삼켰다. 땅에선 장엄하고 아름다웠던 것들이 위에서 보면 평면적인 그림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부서진 퍼즐 조각들이 모인 회색 도시 속에서 우리는 이토록 북적거리고 사는구나. 구름보다 더 위에 있는 단색의 푸른 하늘을 보니 만물이 하늘 아래 있음이 자명했다.


앞 비행기를 먼저 보내느라 공중에서 대기를 한 탓에 5시 32분이 되어서야 도착. 다행히도 숙소로 가는 101번 버스가 게이트 바로 앞에 있었다. 세 개의 캐리어, 다른 쇼핑백까지 양손이 무거운 채로 버스에 올랐다. 캐리어까지 전부 버스에 실으라던 기사 아저씨는 우리가 캐리어 세 개를 낑낑대며 옮기는 모습을 다 보고 나서야 버스 아래 트렁크에 넣으라고 이야기해줬다. 기사 아저씨의 행동에 순간 불쾌함을 느꼈지만 제주의 첫날을 방해받을 순 없었다. 자리를 잡고 앉아 이어폰을 꽂았고, 태연의 'Blue'가 흘러나왔다.


공항에서부터 정거장 12개를 지나야 월정리에 도착이었다. 아직까지는 여느 곳과 다르지 않은 듯했다. 바람이야 10월이니 시원할 것이고.. 간판에 붙은 '제주ㅇㅇ' 문구들을 보니 '정말 제주에 오긴 왔구나' 싶었다. 맘스터치, 다비치 안경, 100세 약국 등이 보인다. 7시가 조금 넘은 시각, 우리의 목적지 '월정리' 정거장에 당도했다.


주인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트럭으로 마중을 나오셨다. 다소 소통하기 어렵(?)지만 구수한 제주도 사투리를 구사하시는 두 분은 참 순박하시고 친절하셨다. 어색하면서도 시끌벅적한 인사를 마친 우리 모녀는 첫날 저녁으로 '치맥'을 선택했다. 내 의견이 90% 반영된 것이긴 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월정리의 저녁은 생각보다 훨씬 한산했고, 든든한 뒷배였던 '하나로'가 지난달부터 내년 4월까지 재공사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구관이 명관인지라 집 앞 통닭집보다는 못했지만 치킨무 대신 쌈무가 나오는 이색적인 풍경을 볼 수 있어 재밌었다. 만국 공통 생맥주 두 잔을 시원하게 쏟아내고 드디어 월정리 밤바다를 마주했다. 이미 어둠이 내린 터라 보이는 것보다 들리는 것에 더 설렜던 순간. 김밥을 말듯 내게로 달려오는 하얀 거품이 보였다. 강원도 정도나 온 것 같은데 제주도라니. 이게 제주도 바다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