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불어도 제주가 좋아서

하늘연달 제주 이틀

by 곰살

제주에서의 첫 아침. 육지에선 내 오전 시간을 새벽에게 내어주기 일쑤였지만 여기서도 그럴 순 없었다. 일출을 봐야 한단 생각에 6시 20분쯤 일어나 엄마와 함께 후다닥 밖으로 나왔다. 밤새 불어대던 바람에 추위를 각오하고 나왔으나 예상외로 공기는 따뜻했다. 어제저녁엔 어둠 탓에 보이지 않던 제주의 집들이 이제야 눈에 들어온다. 돌담과 전봇대, 대문 없는 양옥까지. 내가 사는 동네와는 정말 다르다.

집에서 바다로 나가는 데까진 3분이 채 안 걸렸는데, 그 사이 제주 소품샵 문구가 눈에 띈다. '바람이 불어도 제주가 좋아서'. 미완인 그 문장에 한 달 내내 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깅하는 사람, 산책하는 사람, 어린아이를 데리고 나온 젊은 엄마까지, 제주의 이른 아침 바람과 일출에 대한 욕구는 우리만 있는 게 아니었다.


이국적이지만 빈약한 야자수 한 그루와 몇 점의 구름, 동이 트며 주황빛 잔상을 남기고 있는 하늘. 열린 가게라곤 편의점뿐인 이른 아침의 월정리 해변은 꽤나 조용했고 파도만이 바지런히 소리 냈다. 드문드문 저 멀리선 보이지도 않다가 어느새 눈앞에 나타난 갈매기들은 한 곳에 모여 조찬 모임을 가졌다. 매일 아침 목적지가 있는 저 새들이 대부분의 오전을 몽중으로 보내던 나보다 나은 것 같다.


어제 비행기에서 봤던 풍력발전기가 모인 곳이 이곳이었구나. 더 크고 덜 큰 풍력발전기 수 개가 보였다. 해가 완전히 뜨고 나니 서핑하러 온 몇 사람이 파도를 침대 삼아 엎드려 누워 있다. 부지런한 사람들, 대단하다 생각하며 바로 앞 CU에서 우유, 삼각김밥 2개, 사리곰탕 컵라면, 진라면 두 봉지를 사 왔다.


우체국 택배의 빠릿함에 놀란 아침이다. 11시 정도 됐을까 월정리의 조그마한 골목 사이로 차 소음이 일었다. 우체국 택배 차량이 보였다. '설마 우리 거겠어' 했는데 정말 우리 집 발(發) 박스 세 개가 트렁크에서 나왔다. 금요일 늦은 오후 부친 짐이 월요일 오전에 떡하니 바다 건너온 거다. 신기하고, 반갑고, 다행이었다.

낮 12시가 좀 넘어서 마트 장을 보기 위해 나왔다. 가는 날이 장 닫은 날. 2020년 4월까지 확장 공사를 한다는 하나로 마트 때문에 옆 마을 김녕으로 가야 했다. 버스로 두세 정류장이면 가지만 정류장까지 10분 넘게 열심히 걸어야 했다. 우린 아직 익숙지 않아 그곳이 그곳 같은 골목을 지나며 집 하나 밭 하나 돌 하나에 신기해했다.


마트로 가기 전, 근처에 있는 김녕 해수욕장을 먼저 들렀다. 월정리보다 훨씬 투명한 바다와 새하얀 모래사장을 갖고 있는 그곳에서 우린 남들 다 하는 모래에 이름 쓰기로 발 도장을 찍었다. 마트에 도착해 양념, 소스, 채소, 라면, 쌀 등 생활에 필요한 것부터 술, 과자, 고기, 음료수와 같은 취향 식품도 양껏 구매하고 나니 첫 장 보기로 18만 원 지출. 이 정도면 한 달도 먹고살겠다 싶었지만 택도 없었다.


장은 봤다만 집까지 가는 게 문제였다. 마트에서 제공되는 큰 포장 박스로 두 개가 나왔는데, 탑승은 차치하고 내려서 집까지 도저히 걸어갈 수 없을 것 같았다. 마트 배송 서비스도 시간이 맞지 않아 번거로웠고, 쩔쩔매던 우리는 겨우 택시라는 방편을 생각해냈다. 평소 택시를 전혀 이용하지 않는 우리이기에 아예 선택지에도 없던 거다. 나는 다급히 카카오 택시에 가입해 SOS를 청했다.


우여곡절 끝에 박스를 이고 집에 들어온 우리는 낮잠으로 급속 충전에 들어갔고, 배고픔이 피곤을 이길 때쯤 잠에서 깨 황홀한 고기 만찬과 함께 한라산에 올랐다.


여행과 생활 사이 아직은 여행의 흥미로움을 갖고 있다. 이마저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그저 그런 일상이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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