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훈, <트럼프 2.0 시대> 리뷰
배우고 믿어왔던 것들이 무너진 지난 10년이었다. 미국은 더 이상 세계경찰을 자처하며 패권을 쥐려 하지 않는다. Pax Americana가 떠난 자리는 MAGA(Make America Great Again)가 차지했다. 이리 허무하게 내팽개쳐질 WTO와 FTA였다니, 저지 투쟁에 투신했던 활동가의 삶이 안타깝다. 비교우위에 바탕한 자유무역이 '국부' 유출을 엄격히 통제하는 보호주의 보다 풍요를 가져온다는 고전 이론이 위협받고 있다. 정치적 올바름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는 후진 자기 검열이 되었다. 최고 권위를 가진 정치인이 거침없이 혐오 발언을 내뱉어도 선거에서 이긴다. 불법 계엄을 감히 계몽이라고 주장하며 말의 오염을 자행하는 이들이 뻔뻔하게 헌법을 부정하면서도 표를 얻는다.
"트럼프는 역사상 한 시대가 종언을 고할 때 등장해 그 시대의 가식을 벗겨내는 인물일 수 있다. 본인이 그것을 알고 있을 수도 있지만, 모르고 있을 수도 있다."
중국을 국제 외교무대에 올린 헨리 키신저는 2018년 여름, 파이낸셜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위와 같이 말했다. 거대한 균열이 생긴 국제질서와 세계시민사회에 대한 오랜 믿음이 그저 한 시대를 특징하는 가식(old pretences)이었다는 해석이다. 국제기구에서의 다자외교를 통해 항구적 평화를 도모하는 일이 꽤나 장시간이 소요됐던 정치 실험으로 전락해 버릴 위기다. 미국의 군사력에 의존했기에 가능했던 유럽의 품격 있는 선비 노릇도 지속하기 어려워졌다. 공통의 권위로 기능하던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는 미국 스스로 내려놓으려 한다. 공통의 권위가 사라진 국제사회는 현실주의적 자연상태로 돌아가,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장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글로벌금융위기와 남유럽재정위기라는 긴 터널을 지나오면서, 살림살이가 팍팍해졌다. 양당제 국가에 살다 보니 둔감했지만, 다당제인 유럽에서는 극우 포퓰리즘 정당이 대약진했다. "극우 포퓰리즘"이라고 이름 붙이는 것조차, 거대한 균열이 생긴 과거의 세계관에서나 유효하다. 결코 소수라 할 수 없는 세계시민이 자국 우선과 이민자 추방을 요구하고 있다. 한국도 다르지 않다. 중국인을 추방하자는 현수막이 공공연하게 나붙고, 대림동 일대에서는 혐중시위가 계속되고 있다. 윤 어게인이라는 허무맹랑한 정치구호도 시설이 하 수상한 탓에 가볍게 흘리지 못한다.
대통령 트럼프는 개인적인 일탈도, 혼란한 현상의 원인도 아니다. 여유를 잃어버린 흉흉해진 세태가 만들어낸 상징적 결과다. 곳간에서 인심이 난다. 생존에는 윤리가 없다는 말도 있다. 장기 평화와 함께 비약적으로 경제가 성장하던 시기의 가치체계에 커다란 균열이 갔다. 이에 적응하고 대비하면서도, 또 다른 형태의 마가 스쿼드(MAGA squad)가 되지 않을 수 있을까. 트럼프라는 중간 결과가 가져올 미래는 얼마나 더 혼란스러울지 가늠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