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죽을 준비

페드로 알모도바르, <더 룸 넥스트 도어> 리뷰

by 한남동

오늘도 하루만큼 더 죽어갔다. 오늘 살아낸 거리만큼, 죽음의 문 앞으로 다가갔다. 모든 생명은 죽음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죽음이라는 종착지는 같다. 결국 유한한 시간이다. 주어진 삶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나름의 의미를 찾아 부여해야 한다. 때문에 삶을 더 가치 있게 여기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것이 좋다고들 한다. 시간의 유한함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존재의 소실, 관계의 영원한 단절. 두려운 일이기에 죽음을 생각한다는 건 쉽지 않다. 하지만 영화 <룸 넥스트 도어>와 함께라면, 하루 중 두 시간 정도는 죽음과 대면해 볼 수 있다.

영화에서 에세이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서>를 써낸 잉그리드는 “생명이 죽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기 힘들어”한다. “부자연”스러운 죽음에 대해 사유해 보고자 책을 썼다고 했다. 그러나 죽음에 대한 이해를 높여준 건 집필의 시간이 아니라, 죽어가는 그리고 끝내 스스로 죽어버린 암 환자 마사와 함께한 시간이었다. 마사는 존엄사의 순간 지근거리에, 문을 나란히 두고 있는 방에 잉그리드에게 있어 달라고 했다. 마사는 잉그리드가 죄책감을 갖지 않도록 노력했고, 바람대로 스스로 존엄한 죽음을 택했다. 마사의 마지막을 함께 한 덕에 잉그리드는 고통 속에서도 기쁨과 감사를 느낀다는 것, 죽음은 비극적 관계의 종말이 아니라 마사의 딸과 만난 것처럼 또 다른 관계의 시작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됐다.

나는 어떻게 죽을 것인가. 마사처럼 금지된 방법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존엄한 죽음을 택할 수 있을까. 생물 수업 시간 중 혈액형 판별 실습 때 손가락 끝을 가볍게 찌르는 것조차 주저했던 겁쟁이는 여전히 채혈할 때 주사 바늘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돌리는 어른이 되었다. 그 아무리 존엄을 지키기 위함일지라도, 자기 주도적으로 모종의 위해를 스스로에게 가하는 일은 할 수 없을 것 같다. 다만 기꺼이, 그리고 단호히 연명치료는 거부하겠다. 연명치료 거부는 적극적인 행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라의 법도 금지하고 있지 않다. 죽을 날을 받아놓고 무의미하게 병원에서 서서히 시들어가기보다는 호스피스에서 주어진 운명을 받아들이는 편이 낫겠다. 조금 더 숨이 붙어있는다고 하더라도, 온갖 의료기기에 연결되어 묶인 채라면 죽음의 운명을 엎드려 받아들일 수 없다.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것 또한 존엄하고 축복받은 죽음이다. 세상에는 얼마나 갑작스러운 죽음이 많은가. 오늘의 할 일, 미처 인사를 나누지 못한 사랑하는 이를 남겨둔 채 떠나야 하는 죽음만큼 비극적인 일도 없다. 죽음을 준비하는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존엄한 삶의 마지막이다.

죽음의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이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종군기자의 일에 투신했던 마사는 딸에게 자신의 죽음을 부담으로 주고 싶지 않았다. 가족도, 가장 친한 친구도 아닌 잉그리드에게 부탁하는 마사에게서 존엄하지만 고독하고 싶지는 않았던 절박함이 느껴진다. 가족의 곁에서 맞이하는 죽음이 당연한 모습이 아닌 것도 새삼스럽다. 죽는 이의 삶을 이해하는 사람만이 마지막 배웅길에 남는다. 내 삶은 누구에게, 몇 명에게서나 이해받을 수 있을까. 죽음에 대해 생각할 때마다 떠오를 질문으로 남는다.

삶을 마무리한다는 건 지난 추억을 회고하고, 남겨질 이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일이리라. 반대로 함께했던 시간에 대해 나누는 이야기는 죽어가는 이에게 역시 위안이 된다. 서로 보듬어야 죽음의 존엄은 지켜지고, 고독이 비집고 들어올 틈을 막는다. 곁을 내어주고 경험과 기억을 공유하는 일, 오늘의 죽을 준비다.



(글 내용을 바탕으로, Gemini-NanoBanana에서 생성한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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