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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Feb 23. 2023

아버지의 해방일지

존재의 차이와 정체성의 재분배

아버지를 그려내는 방법


비교적 늦게 읽은 덕분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읽지 않으려고 했던 결과로 이 책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늦게 읽었다. 덕분에, 읽기도 전에 많은 서평을 먼저 접해야만 했다. 가장 많이 본 서평은 ‘역사의 상흔과 가족의 사랑을 엮어낸 대작‘, 또는 “아버지와의 애증과 화해를 극적으로 그려낸 걸작’ 등이었다. 여기서 동의할 수 있는 부분은 ‘대작’과 ‘걸작’이란 단어뿐이다.     


사실 그동안의 정지아 작가의 소설에서 아버지, 어머니, 상흔과 화해라는 단어가 빠진 적이 있었을까? 새삼스럽다는 이야기다. 모든 작품에 들어있는 것은 아무 작품에도 담기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소설 속에 담긴 작가 내면의 의도와 소리를 짐작하고 듣기 위해서 이런 오래된 서평과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잠시 묻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아버지의 해방 일지’라는 책 제목에서 엿볼 수 있는 작가의 의도,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출판사에서 간파한 상품성에 매달은 책의 주제는 ‘아버지’ 자체가 아니라 ‘아버지를 그려내는 방법’에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러나 실망할 것은 없다. ‘아버지’ 자체가 ‘아버지를 그려내는 방법’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최소한 정지아 작가에게는.     


어떻게 그렇다고 확신하는가? 작가의 단편 ‘존재의 증명’ 때문이다. 기억을 잃은 존재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주인공은 정체성의 근원은 동일성이라고 말한다. 의식은 사라져도 취향은 남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장례식장을 찾은 아버지의 지인들로 반추되는 인간 취향은 바로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를 그려내는 방식으로 아버지를 설명하는 것이다.     


“가구나 커피는 사람을 구속하지 않는다. 고로 가구나 커피가 좋다. 이게 기억을 잃기 전부터 기억을 잃은 지금까지 연속되는 그의 동일성일 거라고 그는 확신했다.” (존재의 증명)     


그러나 정체성이란 그리 간단치가 않다. 아민 말루푸는 ‘사람 잡는 정체성’이란 책을 통해 “한 여성에게 아내로서의 정체성과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은 동시에 어떻게 나타나는가? 왜 인간은 수십 개, 수백 개의 정체성 중, 단 하나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인가?”라고 물었다.      


이 질문을 조금 바꾸어야겠다. 정체성은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포기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체성은 분리되지 않을뿐더러, 여러 가지가 공존하는데, 한 가지로 정의되거나 서로 분리될 수 없는 정체성의 실체를 귀납법적 상상으로 규명하는 것, 이것이 정지아 작가가 아버지에 관해 이야기하는 방식이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자신이 누구인지 몰라도 상관없었다. 이 집의 공간을 채운 것들이 곧 그였다.” (존재의 증명)     


존재의 증명’ 속 주인공의 말처럼,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집안의 공간들로 자신을 유추해 내듯, 지인들로부터 아버지를 유추하게 만든다. 물론 유능한 작가의 의식과 구성, 그리고 작업을 거치면서 말이다.      


이 흥미진진한 책을 안 읽으려고 했던 이유를 이야기해야겠다. ‘빨치산의 딸’ 이후로 왜 정지아는 아버지의 유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함께 아! 이번에도?라는 의심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 수십 년 동안 자신의 이야기에 부모의 이야기를 등장시키는 작가 서사의 진정한 내면을 잘 모르겠다. 의지인지? 한계인지? 


아버지와 어머니와 나의 사회주의


자크 데리다는 ‘마르크스의 유령들’에서 마르크스의 유령은 끊임없이 인간의 세계에 맴돌 것이라 했는데, 자본주의 세계의 구석구석은 마르크스의 유령들이 살고 사랑하기 가장 적합한 환경을 가진 공간이기 때문이다. 


정지아의 이야기 속에는 아버지가 유령처럼 등장한다. 작가의 구석구석은 아버지의 유령이 살고 사랑하며, 끊임없이 이야기를 전달해주는 가장 적합한 자리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 속에는 이념에 대한 애증이 담겨있다. 작가는 ‘자본주의의 적’에서 어머니의 사회주의를 ‘첫사랑과 같은 것’이라고 정의했다.      


“어머니에게 사회주의자란 그저 지나간 첫 남자가 지나갔으므로 가장 그리운, 뭐 그런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     


그런데, 이 첫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는 그리운 것일지 몰라도, 부모의 죄가 곧 자식의 죄가 되는 시대에 태어나, 1980년대 대학을 다니며, 민주화 과정을 지켜보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야 했던 작가에게는 부정하고 싶은 애증이다.     


“사상이란 저렇듯 느닷없이 타인을 포용하게 만드는 대단한 것일까. 내 부모는 그랬는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저 느닷없는 친밀감과 포용이 퍼스트클래스에 탄 돈 많은 자끼리의 유대감과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자본주의의 적)     


’ 아버지의 해방일지‘에서도 작가의 사회주의를 향한 애증 가득한 냉소는 계속된다.      


“혁명가와 인내의 상관관계에 대하여, 인내할 줄 아는 자는 혁명가가 되지 않는다는 게 고등학교 무렵의 내 결론이었다. 고통이든 슬픔이든 분노든 잘 참는 사람은 싸우지 않고, 그저 견딘다. 견디지 못하는 자들이 들고일어나 누군가는 쌈꾼이 되고 누군가는 혁명가가 된다.”     


그러나 ’ 돈 많은 자끼리의 유대감‘, ’ 쌈꾼‘, 그가 사회주의를 바라보는 이러한 부정적 표현은 그야말로 ’ 부정적 표현‘일뿐 ’ 부정적 의미‘는 아닐 것이다. 작가가 ‘벼랑 위의 꿈들’에서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위태로운 사람들과 그들이 꾸는 가능성 없는 꿈들에 관해 이야기한 것이 그런 추정을 가능케 한다.     


시간 도둑과 같은 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무엇보다도 70년 현대사의 질곡과 같은 무거운 주제를 가벼워 보이지만 고급스러운 필체로 펼쳐낸다. 장례식장에서 벌어지는 유머의 끝자락에 잔잔한 슬픔을 매달아 전달하는 ‘재미’의 진수를 보이는 한편, 독자들을 장례식장이라는 좁은 공간에서 대한민국 현대사의 확대된 공간으로 인도한다.     


소설 속에서 사소한 정보의 문제, 그러나 큰 자존심의 문제로 로 사이가 벌어진 작은아버지, 사상보다는 사람으로 관계를 유지해 왔던 조선일보를 보는 교련 선생 출신의 친구, 아버지가 공개적 밀회(?)를 즐겼다는 실비집 노파. 아버지의 젊은 정치적 동지이자 손이 따스하고 두툼한 동식, 아버지의 빨치산 이력 때문에 사관학교에 가지 못했던 사촌 오빠 등등,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인물들과 사연들이 실재는 아닐 것이나, 아버지와의 인연을 끌어내는 작가의 구성 능력은 이것이 모두 사실인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하다. 


작가는 소설 속 인물들이 사실 속 인물이냐라는 질문에 대해 “소설이란 진실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한 거짓말”이란 말을 인용했다. 그러나 작가의 이 말은 질문과는 다소 동떨어진 이야기이기에 역시나 약간의 수정이 필요하다. ‘사실 속 인물’이냐라는 질문은 “진실이냐 거짓이냐”의 문제가 아니라 “사실이냐 구성”이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19세기말, 일본의 다스메 소세기가 자신의 이야기가 아닌 것을 어떻게 쓸 수 있으며, 자기 이야기라면 뭐 하러 글로 쓰겠냐는 모순된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마도 이 모순된 말속에 답이 있을 것 같다. ‘아버지의 이야기지만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는 아닌 것’ 아마도 정지아 작가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그런 것일 거다.

에드워드 호퍼의 주유소(Gas)


주유소를 벗어나서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 중에 주유소라는 그림이 있다. 밝은 빛 아래 주유소 저 멀리에는 어두운 숲이 둘러싸고 있다. 어두운 밤에 한적한 도로에서 연료가 떨어져 가는 차를 운전해 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주유소의 밝은 빛이 어떤 의미인지. 그러나 주유소는 머무는 곳이 아니라 떠나는 곳이다.     


아마도 정지아 작가에게 있어서 빨치산 부모는 주유소와 같은 존재일지 모른다. ‘빨치산의 딸’ 이후로 정지아 작가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구성의 플랫폼은 누가 뭐래도 부모님이다. 작가의 다음 이야기 역시도 이 주유소를 떠나지 못할까 궁금하다.      


우리가 아는 정지아의 포스트-정지아는 없는 것일까이야기의 진화나 계승이 아닌 존재의 차이와 정체성의 재분배가 이루어진 정지아 작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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