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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인순 Mar 24. 2023

이토록 평범한 미래

관계가 만들어 가는 미래

사랑도 없고 물도 없는 사막   

  

환한 웃음이 아름다운 한 동양 여인이 사막을 배경으로 앉아있다. 그녀의 필명은 싼마오(三毛), 본명은 천핑(陣平)이다. 1943년 중국 충칭에서 태어나 대만으로 이주했고, 유복하게 자랐다. 획일적인 학교 교육에 적응하지 못해 힘겨워하던 그녀는 스물네 살부터 세계 각국을 떠돌다 1973년 북아프리카의 서사하라에서 스페인 남자와 결혼하여 정착한다. 그녀는 이때의 이야기를 담아 자전적 소설 ‘흐느끼는 낙타’와 ‘사하라 이야기’를 썼고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작가가 되었다.  

    

작가 개리슨 케일러의 말처럼 인생은 투쟁이라 행복해지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지만, 인내에도 한계가 존재하는 것 같다. 1979년 불행히도 싼마오의 남편 호세가 잠수 사고로 세상을 떠난다. 그녀는 오랜 타국 생활을 접고 대만으로 돌아와 집필과 강연 활동을 하던 중, 1991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녀의 나이 48세였다. 마지막으로 남긴 유서에는 "나는 언제나 행복을 찾아 살았고, 죽는 것이 살아있는 것보다 더 행복하다는 확신이 있으므로 나는 죽는다"라고 쓰여있었다.     


확인할 길이 없는 자살 이후 그녀의 행복에 대해 깊은 상념에 빠졌던 시간이 있었다. 죽음이 자신을 더욱 행복하게 해 줄 거라고 확신하며 세상없는 밝은 어투로 남긴 유서가 한동안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었다. 행복한 유서란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었기에, ”사막 생활에 필요한 두 가지가 바로 사랑과 물이다.”란 그녀의 말이 자살의 원인을 추정할 수 있는 유일한 단서였다.     


2022년 한국의 작가들은 올해 최고의 소설로 김연수 작가의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꼽았다. 9년 만에 나온 신작이라는 문단의 흔한 마케팅 문구로 소개된 이 소설은 절멸 이후의 삶에 대한 여덟 편의 이야기를 담았는데, 처음 읽는 순간부터 싼마오가 떠올랐다. 싼마오의 표현을 빌리자면 사랑도, 물도 사라져 버린 사막, 그 사막에서 살아남아야 할 이유와 의미는 결국,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 있다는 것이 이 작품의 플롯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죽음을 운명처럼 안고 살아오다 결국 연인과 동반 자살을 꿈꾸는 여학생, 아들의 죽음과 이혼을 겪고 방황하다 섬에 정착한 여인, 아버지를 살해하고 방화범으로 몰렸던 젊은이, 몽골의 모래 폭풍 속에서 아내의 흔적을 찾던 남성 등, 상실을 경험한 이들이 등장하는 여덟 편의 이야기는 흔히 듣는 사정, 들었던 주제, 들었을 법한 이야기들이지만 유기적으로 중첩되어 절멸 이후의 세상에 대한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렇듯 김연수 작가는 사건들의 절멸 뒤에 오는 여덟 개의 우연을 단순한 구도 위에 필연으로 재탄생시킨다. 그 탄생 속에는 두 사람, 또는 세 사람의 사랑과 물을 재충전할 수 있는 오아시스가 존재하고, 그로 인해 ‘인과(因-果) 관계’는 ‘과인(果-因) 관계’로 전복된다. 그리고 시간의 끝에 서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거봐! 오아시스가 있었잖아. 이제 사랑도 채우고 물도 채워”     


푸가(Fuga)와 같은 인생     


첫 번째 단편, ‘이토록 평범한 미래’, 작가였던 엄마의 자살이라는 상처를 안고 살아온 지민과 그를 사랑하는 나는 동반 자살을 결심하고 삼촌을 찾는다. 삼촌은 이들에게 어렵게 구한 지민 엄마의 소설 내용을 들려준다. 이어지는 ‘난주의 바다’에서는 아들을 잃고 남편과 이혼한 여자가 조선 시대 자신처럼 슬픈 사연을 안고 방황하다 제주도에 정착했던 정난주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버지를 살해하고 불을 질렀다고 의심받는 한 여인, 아내가 만났던 ‘모래 폭풍’의 기억을 찾기 위해 울란바토르를 방문한 남자, 서로의 상실을 안고 연극동아리에서 만난 연인, 일본의 한 음악 페스티벌에서 신청곡 하나로 바뀐 인생을 산 남자 등. 이 소설 속 사연들은 여러 인물을 거치면서 중첩되고 반복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의 탁월성은 아마도 이런 중첩과 반복에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 시간의 한계가 도래했다는 생각에 동반 자살을 결심하는 연인의 이야기에 50대 50의 확률에도 불구하고 도박장에서 계속 돈을 잃기만 한 청년의 이야기, 아버지의 배신에 정신병자로 몰려 자살한 지민 엄마의 이야기는 마치 돌림노래와 같이 적절한 대위(對位, contrapunctus)를 이루며, 독자들을 일종의 딜레마로 인도한다.      


음악으로 치면 이는 일종의 카논(canon)이나 푸가(fuga)와 같은 구조라고나 할까. 어떤 클래식 전문가는 카논(canon)과 푸가(fuga)의 형식을 완성한 바흐 (Johann Sebastian Bach)의 천재성을 백 명의 상대와 동시에 바둑을 두는 프로기사와 비교하기도 했다. 백 개의 기보가 머릿속에 실시간으로 정리되어 있는 프로기사와 마찬가지로 음악 전체에 대한 입체적 기억이 있어야만 가능한 음악이 푸가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연수 작가가 그 정도의 천재성을 가졌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의 작품 속 이야기는 물고 물리며 조화 속에 조금씩 앞으로 나아간다.     


언어의 과용과 짤-문장(shorts)     


김연수 작가에 대한 대부분의 부정적 비판은 그의 글이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의 작품은 철학적으로 어려운 것이 아니라 언어의 과용 때문에 난해하다. 20세기 영국의 논리실증주의나 일상언어학파들이 주장한 바와 같이 철학적 문제가 때로는 언어에 대한 오해나 오용의 결과일 수 있는데, 작가의 경우는 오해나 오용이라기보다는 언어 과용으로부터 발생하는 문제다.     


언어의 오해, 오용, 과용은 비단 철학적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고, 일상의 언어, 작가의 언어에도 문제를 일으킨다. 특히 작가는 자기 안에 갇힌 논리를 바깥으로 꺼내 놓을 때나, 예기치 않은 각성의 문제를 서사로 풀어내 놓을 때, 세심한 조정 작업을 거쳐야 하는데, 공감을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객관화 작업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바깥으로 끌어낸 문장이 자기 안으로 다시 들어가 버리거나, 장황하게 펼쳐낸 생각의 처음과 끝이 이어지지 않을 때, 그 사이를 아름다운 문장으로 채운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억지로 꾸며진 문장은 마치 유튜브에서 돌아다니는 ‘짤 영상 (shorts)’처럼 유통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작가는 ‘이토록 평범한 미래’에서 삼촌이 한 말을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과거는 자신이 이미 겪은 일이기 때문에 충분히 상상할 수 있는데, 미래는 가능성으로만 존재할 뿐이라 조금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그런 생각에 인간의 비극이 깃들지요.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오히려 미래입니다”     


객관적인 언어 구조에 따르면 미래는 상상하는 것이고, 과거는 기억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문장에서 작가는 이를 역전시켜 놓았다. 그 시도는 매우 신선하다. 그런데, 설득력이 없다. 작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것이 비극이라고 하고, 그래서 또 기억할 것은 미래라고 하면서 점점 더 언어의 딜레마로 빠져들어 간다. 객관화에 실패했거나 노력하지 않은 탓이다. 이런 딜레마는 결국 ‘짤-문장(short)’의 잔상만 남길뿐이다.     


한편, 작가는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나이가 들며 되돌아보는 시야와 내다보는 시야가 동시에 생기더라”며, “두 가지 시야가 생기면서 (이 소설 속의) 그런 소재들을 다루지 않았나 싶다”라고 말했는데, 여기서 작가가 말한 ‘시야’란 일종의 ‘생각의 지평’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차를 운전하여 광활한 대지를 달리다 보면 앞의 시야와 뒤의 시야가 동시에 보이는 것처럼 인생에 대한 관조를 표현한 듯한데, 말 그대로 그냥 ‘듯’하다. 작품의 설명을 위해 밖으로 나온 언어가 다시 자기 안으로 들어가 버린 느낌을 감출 수 없기 때문이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을 때가 있다. 그럴 때라도 우리는 무언가를 해야 한다. 직장인은 회사를 나가야 하고, 의사는 환자를 진단해야 하고, 자영업자들은 가게의 셔터를 올려야 한다. 모든 것이 정리된 상태에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때로는 끝없는 딜레마를 안고 살아가야 하며, 불쑥불쑥 찾아오는 트라우마도 견뎌내야 한다. 작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무언가 언어로 정리되지 않을 때라도 글을 써야 한다는 운명 같은 것.     


카뮈의 유령     


“사실 나는 비관주의자야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에는 비관주의가 도움이 돼. 비관적이지 않는다면 굳이 그걸 이야기로 남길 필요가 없을 테니까. 이야기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인생도 바꿀 수 있지 않겠어. (...) 모든 믿음이 시들해지는 순간이 있어 인간에 대한 신뢰도 접어두고 싶고 아무것도 나아질 것 같지 않을 때가. 그럴 때가 바로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지”     


독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문장이라고 작가가 소개한 문장이다. 맹목적 낙관주의가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볼 때, 가장 위험한 것임을 이해한다면,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비관주의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관주의가 이야기를 낳고, 이야기가 세상을 바꾸며, 바뀐 세상은 인생을 바꾼다는 낙관주의에 대해서는 그 계보를 살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 계보를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부조리한 삶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찾았던 카뮈다. 그의 작품 페스트에서는 역병이 발생한 알제리의 오랑 시(市). 의사인 이외가 친구 타루와 협력하여 사설 위생 반을 조직하고 페스트 치료를 한다. 이어서 파늘루 신부와 신문기자인 랑베르가 점차 구호 활동에 동참하게 된다.      


각자의 배경과 이유와 개성과 능력을 지닌 개인들은 비관적 상황에서 행동으로 페스트에 맞선다. 그러나 페스트가 사그라들 무렵, 불행히도, 명석한 판단능력과 리더십으로 구호 활동의 기둥이 되어왔던 타루가 역병에 걸리고 만다. 의사 리외는 이 비관적인 상황을 기록으로 남기려 결심한다. 페스트는 절대 사라지지 않고, 항상 어딘가에서 인간의 행복을 위협할 것이라는 비관주의가 이야기를 탄생시킨 것이다.     


세상을 구원할 비관주의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만약 페스트가 다시는 창궐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낙관한다면, 의사 리외가 기록을 남길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이 세상 어딘가에 자살이라는 현상은 끊임없이 일어나고, 또 일어나리라는 비관적 견해가 있다. 우리는 세월호를 목격하고도 또다시 이태원 참사를 겪어야만 하고, 사스로 수많은 생명이 희생되었음에도 또다시 코로나바이러스의 창궐을 무기력하게 지켜보아야만 했다. 비극은 반복될 것이고, 이야기는 사건의 뒤에서 계속해서 만들어질 것이다.     


때로는 누군가의 어깨 위에서 희미하게 보여야 할 유령의 실루엣이 그 누군가보다 더욱 뚜렷해 보일 때가 있다. 카뮈라는 유령이 김연수 작가의 어깨 위에서 반짝거린다.      


원더풀 라이프      


우리나라가 해방된 다음 해인 1946년에 나온 명작이 있다. 바로 프랭크 카프라(Frank Capra) 감독의 ‘원더풀 라이프 (It's a Wonderful Life)’다. 영화는 세계를 여행하고 위대한 일을 성취하는 꿈을 꾸었지만 대신 작은 마을에 갇혀 아버지의 사업을 운영하며 자신의 꿈을 끊임없이 희생하는 조지 베일리(제임스 스튜어트 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유난히 힘든 하루를 보낸 후 조지는 자신의 삶이 무가치하고 세상에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고 느끼며 자살을 결심한다. 그러나 그때 클라렌스라는 천사가 나타난다. 클라렌스는 만약 조지가 태어나지 않았다면 세상이 어땠을지 보여주고, 이를 본 조지는 자신이 주변 사람들에게 미친 엄청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 경험을 통해 조지는 자신의 존재 가치를 인식하고 겉으로 보기에 작고 평범해 보이는 삶의 순간에서 아름다움과 의미를 보는 법을 배운다. 이 영화는 우리 자신이 하찮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느낄 때도 주변 사람들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을 강력하게 일깨워 준다. 의미와 가치는 늘 관계 속에서 탄생한다.     


23살의 반짝이던 나이에 온몸에 2도 화상을 입었던 이지선 씨는 최근 모교의 교수가 되어 돌아왔다. 그녀는 한 방송에 나와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전했다. 처음 자신의 몸을 보았을 때, “살 수가 없는 상황이구나”라고 생각했지만 그를 견디게 해 준 것은 어머니였고, 당장 할 수 있는 일, 즉 밥 먹는 거와 아픔을 참는 거, 두 가지에만 집중하면서 이를 견뎌냈다고 했다.     


긍정적이지 못하게 변한 새로운 나를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그녀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 것은 가족과 친구를 비롯하여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눈빛이었고, 절망적이고 암울한 현실에도 불구하고 인생은 결코 비극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을 품었다고도 말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결국, 삶의 의미와 가치는 관계 속에서 탄생한다.


김연수 작가도 한 인터뷰에서 “세상을 살아가는 방법, 그것은 바로 관계의 방법”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소설 속 인물들 역시 수많은 관계망으로 엮어져 있다. 관계를 통해 이야기가 전수, 전달되고 그것은 시간을 넘나들며, 선택적 교훈들을 남긴다. ‘미래에 대한 기억’이라는 언어의 과용만 없었다면 공감하기 어렵지 않은 소설이었을 것 같다.      


“다만 가치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인생의 취약성과 예측 불가능성, 우연성을 직시하고 최선을 다해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절망이라기보다는 희망의 원천이다. 만일 인생의 의미가 신비가 아니고 유의미한 삶을 사는 것이 우리의 힘에 달렸다면, 우리는 절망 속에서 ‘인생이 도대체 무엇인가?’라고 질문할 필요가 없다. 주변을 둘러보면 유의미한 삶에는 다양한 방식이 있다. 행복의 가치를 알면서 또한 행복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도 받아들인다면, 행복이 우리 곁을 비껴가는 시간을 더 수월하게 견딜 수 있다.” (‘What it all about?’ 중에서, 줄리언 바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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