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여름은 유난히도 더웠다. 더구나 새로 발령 난 곳은 일이 많아 야근의 연속이었다. 일과 더위로 심신이 지쳐갔다. 그러던 차에 여름휴가 시즌이 도래했고, 아내는 계획을 세우느라 들떠 있었다. 속으로 갈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겉으론 표현할 수 없었다. 바다를 좋아하는 아내는 속초를 여행지로 정했다. 휴일을 포함한 6박 7일간이었다.
퇴근해서 들어오면 달려와 그간 짠 일정을 알려주었다.
"오빠. 숙소 여기 어때. 평이 괜찮네."
"바닷가는 고성 쪽으로 가면 좋을 것 같아. 조용하고 깨끗하데."
"가면 물회는 꼭 먹어야겠지. 전에 갔던 봉포머구리 좋았는데."
나는 초점 없는 텅 빈 눈동자로 고개만 끄덕였다. 휴가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소 때처럼 밀려오는 일에 허덕였다. 머릿속은 온통 일로 가득했다.
시간은 어김없이 흘렀고, 휴가를 가야 할 그 주가 다가왔다. 수요일에 출발하는 일정이었다. 월요일 출근하자마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급하게 해결해야 할 사건이 터졌고, 모두 밤샘 작업에 돌입했다. 화요일이 되었건만 일은 풍선처럼 점점 불어났다. 그날도 밤샘 야근을 하며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아내에게 전화로 양해를 구했다. 몹시 안타까워할 줄 알았는데, 쿨하게 아이들과 먼저 떠난다고 했다. 이 섭섭한 기분이 뭘까. 새벽에 집에 들어가 허전한 공간에 홀로 누우니 저 멀리서 슬픔이 터벅터벅 걸어왔다.
아내는 틈틈이 아이들과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햇살보다도 반짝거리는 미소에 하루의 고단함이 스르륵 사라졌다. 수요일이 지나고 목요일이 돼서야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던 일들이 차츰 정리되었다. 퇴근 무렵이 다 되어 부서장에게 휴가 결재를 맡았다. 드디어 떠나는 거야.
아침 일찍 고속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긴장이 풀렸는지 잠이 몰려왔다. 꾸벅꾸벅 졸다 보니 어느새 속초에 도착했다. 아내는 차로 마중을 나왔다. 다들 얼굴이 검게 그을린 것을 보니 바다에서 산 듯 보였다. 숙소는 바닷가 바로 옆이었다. 아내는 옷을 갈아입자마자 가자고 했다. 사실 나는 바다가 그다지 좋지 않았다.물도 차갑거니와 특유의 끈적거림이 싫었다. 씻을 때 달라붙은 모래를 벗겨내느라 얼마나 불편한지. 그래서일까. 기회 되면 바다보다는 산을 찾았다. 햇볕은 그날따라 더욱 뜨거웠다. 선크림을 발라도 소용없을 듯했다. 파라솔을 빌려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아이들은 벌써 뛰쳐나가 나에게 오라며 연신 손을 흔들었다. 더는 버틸 수 없어서 천천히 바다 한가운데로 나아갔다. 차가운 바닷물이 몸에 닿자 몸서리를 쳤으나 이내 발끝으로 전해지는 보드라운 모래의 촉감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안식을 주었다. 덕지덕지 붙어있던 근심, 걱정은 철썩이는 파도에 실려 보냈다. 가만히 눈을 감았다. 긴장을 풀고, 바다가 인도하는 데로 몸을 맡겼다. 흔들흔들. 그 순간만큼은 인간 '실배'가 아닌 자연과 하나 된 존재였다. 시간을 멈추고 영원히 빠져드는 찰나, 평온을 깨는 거대한 물줄기가 얼굴을 강타했다.
"앗, 차가워!"
"메롱. 나 잡아봐라."
아들은 혀까지 내밀며 물을 연신 뿌려댔다. 물아일체의 순간을 깨버린 못된 녀석 같으니라고. 나도 손을 모아 물벼락을 쏘았다. 둘은 쫓고, 쫓기고, 구르고, 뒹굴며 어린아이처럼 한참을 놀았다. 잠시 쉬러 파라솔로 돌아왔다. 아내는 검은 선글라스에 긴 창이 있는 모자를 쓴 체 우아하게 책을 읽고 있었다.
"언제는 바다가 싫다고 하고선. 제일 신났네. 안 왔으면 어쩔 뻔했데."
그러게. 눈을 흘기는 아내에게 활짝 미소를 보이며 앞에 펼쳐진 새하얀 하늘과 푸른 바다를 마음 가득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