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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실배 Jan 27. 2024

사랑의 무게로 안 느끼게

박안서 선생님 미출간 에세이

에세이를 좋아한다. 단순히 글을 읽는다기 보다 글쓴이를 오롯이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빌어 평소 어떤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지, 그에 맞닿은 삶은 어떻게 살아가는지 드러난다. 그래서 한편을 모두 읽고 나면 나 역시 한 뼘 이상 성장한다.


박완서 작가님의 에세이가 출간되었다. 작가님 별세 13주기를 맞아 기존의 산문집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가 미발표 원고를 더하여 새롭게 리커버 특별판으로 나왔다.

평소 절친이었던 이해인 시인의 출간 기념사를 시작으로 세 가지 카테고리로 구성되었다. 챕터 1은 '눈에 안 보일 뿐 있기는 있는 것', 챕터 2는 우리에게 익숙한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마지막 챕터 3은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이다.


제일 처음 만나게 되는 글이 '님은 가지고 김치만 남았네'인데 바로 미출간 원고였다. 작가님의 음식에 관한 이야기이다. 음식을 잘 가리지 않는 편인데 유럽 여행 중 느글느글 한 서양식만 먹다가 한국에 돌아와서도 내내 비위가 가라앉지 않았는데 돌아가신 박경리 선생님이 담가 놓은 김치를 받고 쭉 찢어서 밥에 얹어 아귀아귀 먹고 나서야 괜찮아졌다. 글의 말미엔 그리운 옛날 맛, 고향의 맛에 관한 예찬을 보낸다.


작가님의 글은 소박하고, 담백하면서도 그 안에 깊은 성찰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작가님의 사람에 관한 시선이 고왔다. 주변 사람을 바라볼 때 좋은 면을 먼저 찾았고, 도움 주고픈 마음을 주체 못 했다. 흔히들 '선한 영향력'이란 표현을 쓰는데 작가님을 실제로 보았다면 그 따스함을 느낄 수 있으리라.


어제는 커단 시장바구니에 과일을 가득 사 가지고 씩씩하게 걸아가는 그 여자와 만나기도 했다. 아직도 창백했지만 백합처럼 고왔다. 그 여자는 알까? 내가 마음으로부터 그 여자의 건강을 빌면서 손자가 결혼하는 걸 볼 때까지 살고 싶은 내 과욕을 줄여서라도 그 여자의 목숨에 보태고 싶어 하는 마음을.

- 나의 아름다운 이웃 중-


  그러면서도 세상에게 관한 올바른 잣대를 가지고, 벗어난 행동과 잘못에 관해서는 가감 없이 비판적 시각을 가졌다. 그런 땐 무섭도록 솔직해서 이렇게 글을 담아도 될까 싶은 걱정마저도 들었다. 특히 여성의 삶에 관해서 주체성을 강조하며 시대를 앞서가는 생각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렇지만 이광수의 가야마 미쓰로만은 용서할 수가 없다. 이해할 수는 있어도 용서할 수는 없다. 그가 작가였기에, 침묵만 했어도 독자들에게 감사와 용기를 줄 수 있을 만큼 영향력 있는 작가였기 때문에 그를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다.

- 추한 나이테가 싫다 중-


유독 작가님의 어린 시절 고향인 '박적골'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작가님 스스로 시골사람이 가진 정과 따스함을 동경하며 자녀들에게도 그런 마음을 갖길 바랐다. 어릴 적 시골에서 서울로 이사와 처음 사귄 친구에게 당한 배신이 여전히 기억 속에 상처를 남아 있어 그 편을 읽으면서도 나 역시 안타까웠다. 평생 서울에 살면서도 시골 시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작가님의 문체 안에서 고스란히 담겨있다. 화려하고 멋진 단어나 문장으로 본인을 포장하기보다 있는 그대로의 소박한 자신을 보여주면서.


곳곳에 유머가 도사리고, 70~80년대의 생활풍경도 작가님의 글을 통해서 원없이 만날 수 있다는 점도 이번 에세이가 주는 큰 선물이다.


글의 말미에 자식이 이런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은 나에게도 큰 울림이 있었다. 나의 아이도 이런 사람으로 자랐으면 얼마나 좋을까.


커서 만일 부자가 되더라도 자기가 속한 사회의 일반적인 수준에 자기 생활을 조화시킬 양식을 가진 사람이 되기를. 부자가 못 되더라도 검소한 생활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되 인색하지는 않기를. 아는 것이 많되 아는 것이 코끝에 걸려 있지 않고 내부에 안정되어 있기를. 무던하기를. 멋쟁이이기를.....(중략).......

내가 문득 길에서 어느 여인이 안고 가는 들국화 비슷한 홀겹의 가련한 보랏빛 국화를 속으로 몹시 탐내다가 집으로 돌아와 본즉 바로 내 딸이 엄마를 드리고파 샀다면서 똑같은 꽃을 내 방에 꽂아 놓고 나를 기다려 주었듯이 그런 신비한 소망의 닮은, 소망의 냄새 맡기로 내 애들이 그렇게 자라 주기를 바랄 뿐이다.

- 사랑을 무게로 안 느끼게 중-


마지막 책장을 닫고 노트를 꺼내 문장 하나하나를 직접 손으로 쓰고픈 충동을 주체 못 했다. 그만큼 내 마음에 콕하고 박혔다.


삶이 지치고 힘들 땐 책장 속에 고이 모셔둔 이 책을 가장 먼저 꺼내 곱씹어 읽으며 위로받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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