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무름의 미학

서두르지 않는 진심, Still With You

by 이방여백

어떤 음악은 흐르는 시간을 잠시 멈춰 세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시간의 흐름 속에 마모되어 가던 마음의 모서리를 부드럽게 매만져 준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내게는 에릭 베넷(Eric Benét)의 ‘Still With You’가 바로 그런 존재다. 이 곡의 첫 건반 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흐르는 순간, 방 안의 공기는 마치 농도 짙은 와인 속에 잠긴 듯이 가라앉는다. 2005년에 발표된 이 곡이 20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까지도 수많은 이들의 플레이리스트 상단에 머물러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순히 멜로디가 감미로워서라는 말로는 설명이 부족하다. 이 곡 안에는 우리가 잃어버렸거나, 혹은 간절히 붙잡고 싶어 하는 ‘지속성’에 대한 열망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알앤비(R&B), 그중에서도 네오 소울(Neo-Soul)이라는 장르는 본래 인간의 가장 깊숙한 감정을 건드리는 힘이 있다. 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을 수놓았던 그 수많은 명곡들 사이에서도 에릭 베넷의 목소리는 유독 독보적인 질감을 지닌다. 그는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Still With You’에서 그가 보여주는 보컬의 미학은 ‘과잉되지 않은 진심’이다. 대중음악의 문법이 점차 자극적이고 짧은 호흡으로 변해가는 동안에도, 이 곡은 묵묵히 자신의 호흡을 지켜낸다. 도입부에서 그가 읊조리듯 내뱉는 낮은 저음은 연인의 귓가에 닿는 숨결처럼 가깝고, 후렴구에서 부드럽게 고조되는 가성은 마치 밤하늘에 은하수가 펼쳐지는 듯한 황홀경을 선사한다. 하지만 그 화려한 가성마저도 결코 과시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그 소리의 끝에 '진심'이라는 무게추가 달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흔히 사랑을 '불꽃'에 비유하곤 한다. 찰나의 강렬함,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한 열기, 그리고 어둠을 단숨에 밝히는 그 화려함에 매료된다. 하지만 불꽃은 필연적으로 재를 남기고 사라진다. 에릭 베넷이 이 곡에서 노래하는 사랑은 불꽃보다는 ‘온기’에 가깝다. 제목인 ‘Still With You’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는 단연 ‘Still’이다. ‘여전히’, ‘아직도’라는 이 짧은 부사는 사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책임감을 내포하고 있다. 사랑이 시작될 때의 설렘은 호르몬의 장난만으로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그 설렘이 일상의 권태와 삶의 고통을 통과하고 나서도 ‘여전하기’ 위해서는 영혼의 뒷받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사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가 약속하는 사랑의 범위는 광활하다. 좋은 날(Good times)과 나쁜 날(Bad times), 행복한 순간(Happy)과 슬픈 순간(Sad)을 모두 아우른다. 우리는 대개 사랑의 밝은 면만을 소유하려 한다. 햇살이 내리쬐는 해변에서의 산책, 완벽한 저녁 식사, 서로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만을 기억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에릭 베넷은 말한다. 폭풍우가 몰아치고, 서로의 가장 초라한 밑바닥을 확인하는 순간에도 나는 당신 곁에 머물겠노라고. 이 곡이 수많은 연인의 결혼식 축가로 불리는 이유는, 이것이 단순한 고백을 넘어 인생이라는 파도를 함께 넘겠다는 ‘연대(Solidarity)의 선언’이기 때문일 것이다.


음악적으로 이 곡은 완벽한 완급조절의 표본이다. 드럼 비트는 심장 박동처럼 규칙적이고 편안하며, 베이스 라인은 곡 전체의 중심을 든든하게 잡아준다. 화려한 전자음 대신 배치된 어쿠스틱한 악기들의 질감은 이 곡에 영원성을 부여한다. 유행을 타는 사운드는 시간이 지나면 촌스러워지기 마련이지만, 인간의 목소리와 닮은 악기 소리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깊이를 더한다. 마치 잘 길들여진 가죽 제품이나 오래된 나무 가구가 주는 신뢰감 같은 것이다. 에릭 베넷은 자신의 보컬을 악기 중 하나로 활용하며, 곡의 분위기에 완벽하게 녹아든다. 특히 중반부 이후에 터져 나오는 애드리브조차 계산된 화려함이 아니라, 벅차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자연스럽게 흘러넘치는 눈물처럼 느껴진다.


현대 사회는 너무나 빠르다. 클릭 한 번으로 인연을 맺고, 손가락 하나로 관계를 끊어낼 수 있는 시대다. ‘지속’한다는 것의 가치는 점차 희미해지고, ‘새로운 것’만이 미덕으로 추앙받는다.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Still With You’는 우리에게 일종의 쉼표가 되어준다. 오래된 사진첩을 들춰보듯, 혹은 오래된 연인의 손을 다시 한번 꽉 쥐어보듯, 이 노래는 우리에게 머무름의 가치를 일깨운다. 누군가의 곁을 지킨다는 것은 단순히 물리적인 거리를 의미하지 않는다. 상대방의 변화를 수용하고, 나의 흔들림을 고백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께 나아갈 방향을 수정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이 곡이 말하는 사랑의 본질이다.


글을 쓰며 다시 한번 이 곡을 반복 재생해 본다. 어느덧 곡은 후반부를 향해 달려가고, 에릭 베넷의 목소리는 더욱 간절해진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어쩌면 이 노래는 타인에게 건네는 고백인 동시에, 나 자신에게 건네는 위로일지도 모른다고.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나만은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키며 살아가겠다는 다짐 말이다.


브런치를 찾는 많은 독자 역시 저마다의 ‘Still’을 품고 살아갈 것이다. 여전히 포기하지 못한 꿈, 여전히 잊지 못한 사람, 혹은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순수함 같은 것들. 만약 오늘 밤 누군가와의 관계에 지쳤거나, 홀로 떨어진 듯한 외로움을 느낀다면 가만히 이 곡을 틀어보기를 권한다. 에릭 베넷의 다정한 음성이 당신의 방을 채울 때, 당신은 혼자가 아님을, 그리고 누군가는 여전히 당신의 곁을 지키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음악이 끝난 뒤에도 남는 여운처럼, 우리의 사랑도 그렇게 긴 호흡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뜨겁게 타오르다 재가 되는 사랑 말고, 은은한 조명 아래서 서로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볼 수 있는 그런 평온한 사랑 말이다. 에릭 베넷이 우리에게 선물한 이 선율은, 우리가 도달해야 할 사랑의 가장 아름다운 종착역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른다.


빠르게 변하고 쉽게 잊히는 것들 사이에서 이 노래가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클래식으로 남은 이유는 명확하다. 우리는 모두 변치 않는 무언가를 갈구하며 살아가기 때문이다. 세월이 흐르면 사람의 얼굴도, 말투도, 주변의 풍경도 변해가겠지만, 적어도 내 곁을 지키는 이 마음 하나만큼은 그대로이길 바라는 그 절실한 소망을 에릭 베넷은 가장 아름다운 선율로 치환해 두었다.


비가 내리는 오후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저녁, 이 곡을 가만히 틀어놓고 있으면 문득 깨닫게 된다. 사랑은 화려한 불꽃놀이가 아니라, 밤새 꺼지지 않고 온기를 나누어 주는 작은 촛불 같은 것이라는 사실을.


시간이 흘러도 빛이 바래지 않는 이 노래처럼, 사랑도 그렇게 은은하게, 그러나 단단하게 계속되기를 바랄 뿐이다.

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