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이라는 고전적 서사

Sleepless In Seattle

by 이방여백

세상이 빛의 속도로 변하고 사랑의 정의조차 매일같이 수정되는 시대라지만, 여전히 우리 마음속 깊은 곳에는 도저히 지워지지 않는 고전적인 풍경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공항의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우연히 마주친 낯선 눈동자이기도 하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사연에 가슴 적시는 밤이기도 하다. 노라 에프론 감독의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Sleepless in Seattle)>의 엔딩 크레딧과 함께 흐르던 ‘When I Fall in Love’는 바로 그 지극히 고전적이고도 낭만적인 운명론을 대변하는 찬가와 같다.


영화는 아내를 잃은 슬픔에 잠긴 남자 샘과 완벽해 보이는 약혼자를 두고도 왠지 모를 공허함을 느끼는 여자 애니를 비춘다. 그들은 미국의 서쪽 끝 시애틀과 동쪽 끝 볼티모어에 살고 있다. 대륙을 가로지르는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그들의 만남은 불가능해 보이지만, 영화는 '라디오'라는 아날로그적인 매체를 통해 두 사람의 주파수를 맞춘다. 어린 아들 조나가 아빠를 위해 라디오 상담소에 전화를 걸고, 샘이 털어놓는 죽은 아내에 대한 지극한 그리움은 전파를 타고 애니의 자동차 스피커로 흘러든다.

그 순간, 애니는 직감한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저 남자가 자신의 운명임을. 이 지독하게 느리고 답답한 과정이 오히려 우리를 설레게 했던 이유는, 그 기저에 언젠가는 마땅히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이라는 굳건한 믿음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When I Fall in Love’는 그 믿음을 선율로 치환한다. 내가 사랑에 빠진다면 그것은 영원할 것이라는 첫 가사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다분히 비현실적이지만, 동시에 우리가 가장 간절히 회귀하고 싶어 하는 사랑의 본질이기도 하다.


영화는 '매직(Magic)'이라는 단어를 반복해서 사용한다. 샘이 아내를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그 마법 같은 순간 말이다. 반면 애니의 현실은 지극히 합리적이다. 그녀의 약혼자 월터는 다정하고 안정적이며 결점이 없는 남자다. 하지만 애니는 월터에게서 그 마법을 찾지 못한다. 그녀가 무모하게 시애틀로 향하고, 다시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으로 달려가는 동력은 논리가 아니라 직관이다. 노라 에프론은 이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묻는다. 사랑이 수치화된 데이터나 조건의 합이 아니라면, 결국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저 멀리서 들려오는 희미한 신호, 즉 운명의 목소리가 아니겠느냐고 말이다.


이 지점에서 냇 킹 콜의 오리지널 버전이나 셀린 디온의 듀엣 곡이 흐를 때, 영화는 비현실의 영역에서 숭고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부드러운 오케스트레이션이 깔리고 목소리가 서로를 탐색하듯 얽히는 순간, 영화 속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전망대는 단순한 관광지가 아닌 기적의 성소로 탈바꿈한다. 이 곡은 말한다. 사랑이란 단순히 누군가에게 호감을 느끼는 단계를 넘어, 나의 세계 전체를 상대방의 영원 속으로 기꺼이 던지는 투신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너무 쉽게 사랑을 시작하고 또 너무 쉽게 사랑을 놓아버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만남은 어플리케이션의 스와이프 한 번으로 가능해졌고, 이별은 메시지 한 줄로 종결된다. 이런 가벼움의 시대에 이 노래가 남기는 울림은 묵직하다. 가사 속 화자는 단호하게 선언한다. 이 무정한 세상에서 사랑은 너무나 빨리 식어버리는 것이지만, 자신은 결코 그런 사랑에 편승하지 않겠노라고. 누군가에게 마음을 준다는 것은 곧 나의 가장 약한 부분을 내어주는 일이며, 그렇기에 그 시작은 반드시 영원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고집스러운 철학이 이 곡의 뼈대를 이룬다.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은 사실 1957년작 영화 <러브 어페어>에 대한 거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샘과 애니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만나기로 약속하는 설정 자체가 고전 영화의 문법을 그대로 빌려온 것이다.


이는 사랑이 시대에 따라 변하는 것이 아니라, 인류가 공유하는 가장 오래된 신화임을 증명한다.

‘When I Fall in Love’ 역시 마찬가지다. 1952년에 처음 세상에 나온 이래 수없이 리메이크되면서도 그 가치가 마모되지 않은 이유는, 영원한 사랑에 대한 갈망이 인간의 유전자 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꼭대기에서 샘과 애니가 마침내 마주 서는 장면은 영화사에서 가장 고요하면서도 벅찬 순간 중 하나로 기억된다. 그들은 화려한 대화를 나누지도, 격정적인 포옹을 하지도 않는다. 그저 서로를 알아본 눈빛과 안녕이라는 짧은 인사, 그리고 조나가 두고 간 가방을 매개로 손을 맞잡고 엘리베이터로 향할 뿐이다. 이때 배경으로 깔리는 음악의 여운은 관객들에게 확신을 준다. 저들은 이제 영원의 길로 들어섰음을. 노래의 마지막 소절인 그게 아니라면 전혀 사랑에 빠지지 않겠노라는 문장은 배수의 진을 친 장수와 같은 비장미마저 느껴진다. 적당한 타협이나 중간 지대의 사랑은 거부하겠다는 이 선언은, 영화 속 주인공들이 보여준 그 먼 여정에 정당성을 부여한다.


글을 써 내려가며 문득 창밖을 본다. 저마다의 사연을 안고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서, 누군가는 지금 이 순간에도 운명적인 사랑을 꿈꾸고 있을 것이다. 비록 현실은 영화처럼 마법 같은 타이밍으로 가득 차 있지 않을지라도, 이 노래를 듣는 동안만큼은 우리 모두가 로맨티시스트가 된다. 사랑이 식어가는 것이 두려워 시작조차 망설이는 이들에게, ‘When I Fall in Love’는 기꺼이 마음의 빗장을 풀라고 조언한다. 사랑이 주는 상처보다 더 무서운 것은, 사랑이 주는 영원함을 단 한 번도 믿어보지 못한 채 살아가는 건조한 삶이기 때문이다.


브런치를 찾는 독자들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여전히 운명이라는 낡은 단어를 믿는가. 혹은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는 찰나의 순간에 전 우주가 멈춰 서는 기적을 기다리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운이 좋은 사람이다. 차가운 현실 속에서도 가슴 한구석에 이 노래 한 곡쯤 품고 살 수 있는 여백이 있다는 뜻이니까 말이다. 음악은 끝나도 삶은 계속된다.


하지만 어떤 음악은 우리 삶의 방향타를 영원히 바꿔놓기도 한다. ‘When I Fall in Love’를 들으며 우리가 꿈꾸는 것은 단지 화려한 연애가 아니다. 그것은 나의 고독을 알아봐 줄 단 한 사람, 시애틀의 안개 속에서도 내 주파수를 찾아내 줄 그 사람을 향한 긴 기다림이다. 샘과 애니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 서로를 바라보던 그 찰나의 눈빛 속에 이 노래의 모든 것이 들어 있었다. 사랑은 어쩌면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수많은 우연을 뚫고 내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향해 건네는 평범한 첫마디에서 완성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마디 뒤에는 반드시 이 노래의 약속이 뒤따라야 할 것이다. 언젠가 내가 사랑에 빠진다면, 그때는 반드시 당신과 영원을 함께하겠노라는 그 오래된 고백 말이다. 우리의 밤은 때로 잠 못 이루고 외롭겠지만, 이 노래가 흐르는 한 우리는 기꺼이 그 고독을 견디며 다음 마법을 기다릴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기다리는 자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에게 머무는 기적이기 때문이다.


결국 이 노래가 우리에게 남기는 것은 단순히 감상적인 멜로디가 아니라, 사랑에 임하는 성실한 태도에 가깝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현재뿐만 아니라 오지 않은 미래까지도 나의 일상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거룩한 선언이다. 영화 속 샘이 애니의 손을 잡고 엘리베이터에 오를 때, 그는 이미 애니의 과거와 상처, 그리고 앞으로 함께 보낼 시애틀의 모든 밤을 받아들인 셈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매일같이 새로운 인연이 스쳐 지나가는 소란스러운 세상 속에서, 우리가 정말로 붙잡아야 할 것은 잠시 타올랐다 꺼지는 불꽃이 아니라, 이 노래처럼 낮고 깊게 깔리는 진심의 선율이다.


긴 시간이 흐른 뒤에도 이 영화와 노래가 여전히 누군가의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이 도달하고 싶은 가장 순수한 형태의 지향점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삶의 무게에 눌려 낭만이 사치처럼 느껴지는 날에도, 우리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전망대를 떠올리며 기적을 믿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믿음의 끝에는 언제나 이 노래가 흐르고 있을 것이다.


사랑에 빠진다는 것, 그리고 그 사랑이 영원하리라는 것. 어쩌면 그 믿음이야말로 우리가 이 무정한 세상을 버티게 하는 가장 강력한 힘일지도 모른다. 노래가 잦아들고 영화의 자막이 다 올라간 뒤에도 우리 마음속에 지워지지 않는 온기가 남는다면, 그것은 당신 역시 누군가와의 'Magic'을 기다리고 있다는 소중한 증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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