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 없는 이들의 연가

The Shape of Water

by 이방여백

세상에는 언어로 담아낼 수 없는 감정들이 존재한다. 정교하게 다듬어진 단어들이 오히려 그 본질을 훼손할 것만 같아 입술 안으로 가만히 밀어 넣어야 하는 마음들.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영화 <The Shape of Water>는 바로 그 '말할 수 없는 것들'에 관한 가장 아름다운 보고서다. 영화의 오프닝과 클라이맥스를 장식하는 ‘You'll Never Know’는 단순히 배경음악의 역할을 넘어, 목소리를 잃은 주인공 엘라이자와 인간의 언어를 갖지 못한 괴생명체 사이를 잇는 유일하고도 거대한 다리가 된다. 1940년대의 고전적인 선율이 60년대를 배경으로 한 잔혹 동화 속에 흐를 때, 우리는 비로소 사랑이 어떤 구체적인 형체(Shape)를 가진 것이 아니라, 담기는 그릇에 따라 모습을 바꾸는 물(Water)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영화 속 엘라이자는 말을 할 수 없다. 그녀의 일상은 규칙적인 알람 소리, 구두를 닦는 손길, 그리고 이웃집 가이와 나누는 소소한 수화로 이루어진다. 침묵은 그녀를 지배하는 삶의 양식이지만, 그녀의 내면은 누구보다 풍요로운 음악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런 그녀의 삶에 난입한 괴생명체는 공포의 대상이 아닌, 자신과 닮은 거울과 같은 존재다. 그는 신이라 불리기도 하고 괴물이라 불리기도 하지만, 엘라이자에게는 그저 자신의 침묵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 주는 유일한 '그'일 뿐이다. 이들의 소통은 거창한 문장이 아니라 삶은 달걀 한 알,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그리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만으로 충분하다. 여기서 ‘You'll Never Know’의 가사는 엘라이자의 닫힌 입술을 대신해 터져 나오는 심장 소리가 된다. "You'll never know just how much I love you." 이 첫 문장은 역설적이다. 그녀는 목소리가 없기에 결코 말로 전할 수 없지만, 그렇기에 그녀의 온몸은 사랑 그 자체가 되어 박동한다.


영화 중반부, 엘라이자가 환상 속에서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괴생명체와 함께 춤을 추며 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은 이 에세이의 핵심이자 영화의 심장부와 같다. 흑백 영화의 한 장면처럼 연출된 그 시퀀스에서 엘라이자는 생생한 목소리로 노래한다. 그것은 신체적 결함이 사라진 초현실적인 순간이라기보다, 진정한 사랑 안에서 인간은 누구나 완전한 존재로 거듭난다는 메타포에 가깝다. "당신은 모를 거예요, 내가 얼마나 그리워했는지."라는 고백은 사실 그에게 닿기를 갈구하는 외침인 동시에, 평생을 고립과 외로움 속에서 살아온 한 여성이 비로소 세상과 연결되었음을 선포하는 노래다. 델 토로 감독은 고전 뮤지컬 영화의 문법을 빌려와 이 기이한 연인들에게 가장 찬란한 순간을 선사한다. 비록 환상이 끝난 뒤 그녀는 다시 수화를 하는 침묵의 상태로 돌아오지만, 이미 그 선율은 물줄기처럼 두 존재의 영혼 사이를 가득 채운 뒤다.


물은 모양이 없다. 컵에 담기면 컵의 모양이 되고, 강물로 흐르면 강물의 모양이 된다. 사랑 역시 마찬가지다. 우리는 사랑을 특정한 규격과 조건 속에 가두려 한다. 비슷한 외모, 비슷한 배경, 공통된 언어. 하지만 엘라이자와 그가 보여주는 사랑은 그 모든 경계를 허문다. 괴생명체의 비늘 돋친 피부와 엘라이자의 상처 입은 목동은 서로 맞닿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

‘You'll Never Know’라는 곡이 지닌 그 부드러운 스윙의 리듬감은 이들의 사랑이 가진 유연함을 닮았다. 딱딱하게 굳은 세상의 편견과 냉전 시대의 삼엄한 감시 속에서도, 이 노래는 마치 물밑을 흐르는 해류처럼 은밀하고 강인하게 사랑을 밀어 올린다. "내 마음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틀렸어요."라는 가사는 이 기괴한 결합을 비웃는 세상을 향한 엘라이자의 유일한 항변이다.


영화의 배경이 된 1960년대 초반의 미국은 인종 차별과 성 소수자에 대한 혐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한 공포가 극에 달했던 시대다. 악역인 스트릭랜드가 상징하는 것은 '완벽함'과 '질서'에 대한 강박이다. 그는 손가락이 잘리고 썩어가는 과정을 겪으면서도 끝까지 인간의 우월함을 주장하며 괴생명체를 도구로 전락시킨다. 반면 엘라이자와 가이, 젤다처럼 사회적 약자로 분류되는 인물들은 그 '완벽하지 않은 존재'의 고귀함을 알아본다. 이들에게 ‘You'll Never Know’는 슬픈 패배자의 노래가 아니라, 소외된 자들이 공유하는 은밀한 연대가가 된다. 당신들은 절대 알 수 없을 그 비밀스러운 아름다움, 오직 마음의 눈을 뜨고 물결을 따라가는 자들만이 도달할 수 있는 그 사랑의 깊이를 노래는 계속해서 상기시킨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엘라이자가 총에 맞아 쓰러지고 그가 그녀를 안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장면에서 음악은 절정에 달한다. 물속이라는 공간은 언어가 필요 없는 공간이다. 소리는 굴절되고 호흡은 멈춘다. 그곳에서 엘라이자의 목에 있던 상처는 아가미가 되고, 그녀는 비로소 물의 존재로 거듭난다. 이 마법 같은 변신은 사랑이 인간을 다른 차원의 존재로 끌어올릴 수 있음을 시각적으로 증명한다.

이때 흐르는 알렉상드르 데스플라의 스코어와 르네 플레밍의 목소리로 다시 태어난 ‘You'll Never Know’는 비극적인 애가가 아닌, 새로운 삶을 향한 축가로 변모한다. "당신은 절대 모를 거예요."라는 말은 이제 "당신만은 이 진심을 알겠지요."라는 무언의 확신으로 바뀐다. 사랑하는 이에게 내 모든 것을 내보였다는 안도감이 물결 위에 잔잔히 퍼진다.


기예르모 델 토로가 이 곡을 선택한 이유는 명확하다. 이 곡은 1943년 영화 <헬로 프리스코, 헬로>에서 처음 불린 이후, 전쟁으로 헤어진 연인들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던 상징적인 곡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여전히 당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그 고전적인 테마는, 괴물과 인간이라는 종을 초월한 로맨스에 당위성을 부여한다. 낡고 먼지 쌓인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지직거리는 소음마저도 엘라이자의 심장 박동처럼 들리게 만드는 마법. 그것이 바로 음악이 지닌 힘이며, 영화가 음악에 빚지고 있는 서사적 깊이다. 우리는 영화를 보는 내내 엘라이자의 손짓에 집중하지만, 사실 우리의 귀는 시종일관 이 노래의 가사가 속삭이는 진실을 쫓고 있었던 것이다.


브런치를 읽는 많은 이들이 저마다의 '말할 수 없는 사랑'을 품고 살 것이다. 그것은 때로 사회적 시선에 어긋나는 것일 수도 있고, 스스로가 감당하기엔 너무 벅찬 감정일 수도 있다. 혹은 너무나 소중해서 누군가에게 꺼내어 보여주는 순간 그 빛이 바래버릴까 두려워 꽁꽁 숨겨둔 비밀일 수도 있다. 그런 우리에게 <The Shape of Water>과 ‘You'll Never Know’는 다정한 위로를 건넨다. 누군가에게 이해받지 못해도, 그 사랑의 모양이 비록 기괴하고 뒤틀려 보일지라도, 그 안에서 온전한 안식을 찾았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말이다. 당신은 결코 모를 것이라 노래하지만, 사실 그 진심은 이미 온 우주를 적시고도 남을 만큼 가득 차 있다.


사랑은 형태를 규정하지 않는다. 그것은 때로 엘라이자가 좋아하는 달걀처럼 단단하고 매끄럽기도 하고, 그들이 사랑을 나눌 때 욕실 바닥을 적시던 물줄기처럼 무질서하고 격정적이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그 형태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온기다. 영화의 엔딩에서 내레이션으로 흐르는 시 구절처럼, 사랑은 우리 주변 어디에나 존재하며 우리의 눈을 채우고 우리의 마음을 겸허하게 만든다. 그 사랑의 모양은 'You'll Never Know'라는 선율을 타고 영원히 흐른다. 우리가 더 이상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순간이 와도, 혹은 세상이 우리를 괴물이라 부르며 배척할지라도, 이 노래를 기억하는 한 사랑은 길을 잃지 않는다.


결국 기적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나의 결핍을 알아보고, 나의 침묵을 음악으로 읽어주는 누군가를 만나는 것. 그리고 그 존재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세계를 포기하고 물속으로 뛰어드는 용기. 그 찰나의 순간들이 모여 우리 삶의 가장 아름다운 모양을 만들어낸다. 르네 플레밍의 고혹적인 보컬이 잦아들고 엘라이자가 물속에서 눈을 뜰 때, 우리는 비로소 알게 된다. 그녀가 건넸던 "You'll never know"라는 고백이 사실은 "I've always known(나는 언제나 알고 있었어요)"이라는 운명적인 대답이었음을. 사랑은 그렇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를 완성하고 있었다.


영화가 끝나고 극장의 불이 켜져도 이 노래의 여운이 쉽게 가시지 않는 이유는,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결코 전할 수 없었던 그 진심을 이 선율에 투영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아마 평생 그 진심을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관없다. 사랑은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물처럼 스며드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 스며듦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각자의 모양을 찾아갈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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