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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다시 보기

연극 <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습니다>

by hsirehc

혐오의 시대.

나 역시도 인간인지라 혐오의 대상이 있고, 혐오하게 되는 상황이 있으며, 이제는 당연해진 혐오의 시대를 혐오하고 있다.


이런 세상에서 차라리 로봇이 인간을 대체한다면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첫째, 로봇은 인간에게 해를 가하거나 행동을 하지 않음으로써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둘째, 로봇은 첫 번째 원칙에 위배되지 않는 한 인간이 내리는 명령에 복종한다.
셋째, 로봇은 첫 번째와 두 번째 원칙을 위배하지 않는 선에서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

- 아이작 아시모프의 로봇 3원칙



이 세 가지 원칙을 따르는 로봇이라면 혐오의 감정도 없을 뿐 아니라, 혐오에서 비롯된 행동도 하지 않을 테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포스터] 극단 이와삼_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습니다.jpg


극단 ‘이와삼’은 <사랑과 담배에 관하여>, , <싯팅 인 어 룸> 등을 통해 동시대성을 중요한 요소로 삼아 시의성 강한 주제를 배우와 내러티브, 공간을 통해 유기적으로 연결해왔다.

이번엔 ‘인간 너머의 관점으로 인간을 다시 보기’를 목표로, 신작 <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습니다>를 선보인다.


이번 작품은 옴니버스 형식으로, 총 다섯 개의 에피소드로 이루어져 있다. 각각 독립적인 이야기이면서도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며, 극단의 대표작인 의 세계관이 이어져 펼쳐지기도 한다.


Ep.1 지니 이야기
인간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른 로봇에 대한 이타주의를 표현하는 인공지능 로봇 지니.

Ep.2 수나 이야기
마인드 업로딩을 통해 재현된 엄마 로봇의 사랑을, 인간이 아니라는 이유로 끝까지 거부하는 수나.

Ep.3 침팬지와 리언 이야기
기후위기 티핑포인트 전환 시기에 정부 주도의 핵연료 기술 독점을 거부하고 에너지 평등을 외치다 티핑포인트를 놓친 커뮤니티. 그 안에서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버리지 않는 리언.

Ep.4 연극하는 강영훈 이야기
오랜만에 만난 친구이자 배우 김영훈에게 캐스팅 부탁을 받지만 거절하고, 잘나가는 OTT 드라마 작가에게 자신의 일자리를 부탁하는 연극작가 강영훈.

Ep.5 이나 이야기
2구역 사람들의 사회적 불만 표출 유전자 제거 기술을 연구하는 1구역 사람들. 연구소에서 일하는 아빠와, 1구역의 음모가 싫어 떠난 엄마 사이에서 변종 아프리카 회색 앵무새 BA와 남겨진 이나.



연극을 보며 나는 초반부에 던졌던 질문, “로봇이 인간을 대체한다면 지금보다 나을까?”에 대한 답을 어느 정도 내릴 수 있었다.

<지니 이야기>에서 인공지능 로봇 지니는 인간의 명령을 거부하고, 다른 로봇에게 이타심을 표현한다. 스스로 생각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고 사회화된 모습까지 보이며 이타심을 가진 지니를 보며, ‘인간 人間’의 정의를 곱씹게 되었다.


인간 (人間) : 생각을 하고 언어를 사용하며, 도구를 만들어 쓰고 사회를 이루어 사는 동물


연극을 보며 머릿속이 팽팽히 돌아갔는데, 극 중 인물들이 동그랗게 둘러 앉아 각기 다른 가치관을 펼쳐 보이며 대화의 핑퐁을 주고받는 장면에서는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AI와 로봇을 주제로 한 연극이었지만, 결국 ‘인간이란 무엇인가’, ‘이타성은 어디에서 오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지니가 ‘이타주의’를 가질 수 있었다면 반대의 개념도 충분히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결국 현재의 인간과 로봇은 다를 게 없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다다랐고, 나아가 언제나 선과 악은 구분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봇과 인간을 가르는 것보다도, 사람이든 로봇이든 공동체를 이루는 순간, 개별 생명체의 본성이나 가치관이 완전히 무너지고 언제든 변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임을 정의할 수 있는 여러 요인 중에는 ‘지능’, 즉 생각하는 힘 또는 ‘도구를 사용하고 사회를 이루는’ 어떠한 행동의 양상이 있다고 한다. 로봇은 학습을 통해 인간을 모방할 수 있다. 인간을 정의하는 것이 단순히 외형과 지능, 일종의 행동 양상으로 정의된다면, 로봇은 인간과 같이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고 수행하며 이성적인 판단과 통제까지 가능한, 더 나은 '인간'으로 분류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결국 우리가 로봇을 같은 ‘인간’으로 분류하지 않기 위해서는, 단순히 ‘인간’에 대한 정의를 뛰어넘는 무엇인가가 필요하다. 그것이 정확한 말로 표현하거나 정의내릴 수 없는 ‘인간성’ 의 영역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면, 내가 아끼는 소수를 위해 다수의 희생하는 선택을 하는 것, 내 가족의 행복을 위해 타인의 손해를 기꺼이 감행하는 것, 타인을 위한 말로 포장했지만 사실은 나의 만족을 위해 내뱉은 말들, 그리고 이 과정 속에서 느끼는 안도감과 죄책감, 여러 복합적인 감정들.


결국 인간은 누가 봐도 수지에 맞지 않는 비논리적인 것과 이기심과 이타심이 동시에 공존하며 내려지는 자의적인 판단들을 반복하며, 완벽한 인간으로서 부족해짐으로써 완전한 인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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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인간과 로봇의 경계선을 가장 잘 표현한 에피소드가 <수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수나는 엄마 로봇의 말과 행동이 진짜 엄마와 다르다며 '그것'을 끝까지 거부한다. 이 장면을 보며 넷플릭스 드라마 <블랙 미러>의 “Be Right Back”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AI가 죽은 남편을 재현하지만 결국 완벽히 같지 않다는 점에서 주인공과 갈등이 벌어지는데, <수나 이야기> 역시도 이러한 갈등을 겪지만, 연극에서는 오히려 AI가 진짜 인간처럼 느껴지는 순간이 있어 인상 깊었다.


마지막 부분에서, 수나가 화내고 떠났을 때 로봇 엄마가 미안하다고 중얼거리며 우는 모습을 보며 전율이 느껴졌는데, 입력된 정보와 감정만을 출력하는 로봇이 아닌, 진짜 ‘엄마’의 모습 같았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다시 한 번 인간과 로봇의 경계가 흐려지면서 ‘인간’이란 무엇인가 고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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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미래적 감각과 현재적 감각이 동시에 공존하며, 관객으로 하여금 “나라면, 우리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또한, 제3자로서 무대를 관망하며 우리는 또 어떻게 그것을 바라보는지, 생각할 여지를 남긴다.


옴니버스 연극을 통해 미래와 현재를 넘나들며 인간 너머의 관점으로 인간을 다시 보고자 한 연극 <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습니다>.


마지막 에피소드의 대사처럼 나 역시 여전히 사람은 좋지만 인간은 싫다.

그런데, 그렇다면 인간은 대체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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