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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네시스 Sep 07. 2023

홋카이도를 여행하는 뚜벅이를 위한 안내서 - 5

요테이산은 안개속으로

굿찬에서 니세코로 향하는 외길



오타루에서 굿찬까지의 산골짜기를 한번 더 업그레이드 한 진짜 산골짝을 거슬러 올라 니세코에 도착했다. 이번에는 한량짜리 열차로 앉은자리에서 앞창과 뒤창을 모두 볼 수 있었다. 앞으로도 뒤로도 한 줄짜리 기찻길이 전부인 숲 속을 지나 도착한 니세코역 자체에는 사실 큰 기대가 없었다. 이렇게까지 깊은 산속에 들어왔는데 역에 뭐가 볼 게 있을까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중간에 지나친 역들도 거의 간이역에 다르지 않은 수준이었다. 그런데 니세코역은 아니었다. 다른 역과 달리 외관부터 상당히 잘 꾸며져 있었다. 중세 스위스의 농장건물을 빼다 박은 외관과 핼러윈을 위해 역 앞에 잔뜩 쌓아놓은 호박과 마차까지, 관광객을 받아들일 준비가 만반이었다. 겨울이 오면 스키장이 오픈되고 사람들이 많이 찾을 곳이라서 관리가 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싶다. 잠시 역 풍경을 구경하다 나의 목적지인 타카하시 밀크공방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찾아보았는데 눈 씻고 찾아보아도 택시가 들어올 분위기가 아니었다. 혹시나 싶어 버스노선도 알아봤는데 찾을 수 없었다. 나의 아름다운 계획표 속에선 우아하게 택시를 타고 "아노 와타시와 타카하시 보쿠죠에 이키타이데스(저기, 저는 타카하시 목장에 가고 싶어요)"라는 문장을 말할 준비가 되어있었는데, 정작 그 대사를 들어줄 택시기사가 오지 않았다. 언제 올지도 모르는 택시를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서 잠시 고민을 하다가 도보로라도 가야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구글지도를 확인해 보니 가는데만 1시간 좀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그래도 풍경도 보고 음악이라도 들으면서 찬찬히 걸어보자는 생각으로 역 뒷방향을 향해 걸었다.   



니세코역 앞 호박무더기



역에서 바로 건너편으로 바로 갈 수가 없어서 길을 빙 돌아 철도 건널목을 건너고서도 또 한참을 걸었는데 아직도 역에서 직선거리로 100미터도 떨어지지 않아 보였다. 슬슬 걷는 것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근처 외국인 노동자가 많이 찾는 가게인 듯 외국어가 잔뜩 적힌 라멘가게가 하나 있었는데 그나마도 영업 중이 아니었다. 배가 고팠지만 근처에서 밥을 먹기는 쉽지 않아 보였다. 편의점은 언감생심 꿈도 꿀 수 없는 곳이었다. 좁은 도로에 가끔이지만 커다란 덤프트럭이 쌩쌩 지나다니는 모습이 전부라 이미 상당히 쫄아있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난 다리에 인도가 아예 없는 것을 보고 기겁했다. 차가 이렇게 달리는 다리인데 인도가 없다니. 건너갈까 말까 고민하다가 그래도 다리 건너서 보이는 교차로까지만 가보자 마음먹고 차가 안 올 때를 골라 잽싸게 다리를 건넜다. 다리 양쪽으로는 단풍이 울긋불긋하게 들은 시리베츠강이 멋지게 흐르고 있었다. 마치 "흐르는 강물처럼"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강 같았다. 어디선가 브래드피트가 나타나 플라이낚시를 멋지게 흔들고 있을 것 같은 그런 풍경이었달까. 차가 오는지 안 오는지를 두리번거리며 살피면서도 강의 풍경에서 한참을 빠져나올 수 없었다.   



니세코 시리베츠강



강을 건너 조금 위쪽의 교차로까지 갔는데도 결국 인도는 없었다. 인도가 없는 도로가 나를 저승으로 인도할 수 있었기에 그 정도 모험에서 깔끔하게 접기로 했다. 여기까지 오는 것도 용기지만, 깔끔하게 포기하고 돌아가는 것도 용기다. 아무래도 타카하시 밀크공방은 다음번에 날씨가 더 좋을 때를 기약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날씨가 좋지 않아서 요테이산의 모습을 전체적으로 보기 힘들다는 점도 빠른 포기에 도움이 되었다. 다시 조심조심 니세코역으로 돌아오니 다음 열차 시간까지 1시간이 넘게 남아있었다. 가만히 앉아서 열차를 기다리기보다는 남은 시간으로 니세코 마을을 조금 돌아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이번에는 역 정면으로 난 길을 따라 올라가 보았다.   



니세코 주변 풍경





역 앞에 제법 크고 세련된 건물이 있었는데 뭐 하는 곳인지 알 수 없어 그냥 지나쳤다. 나중에 알고 보니 꽤나 유명한 온천이라고 했다. 그 옆에는 니세코 라디오 스튜디오가 있었다. 나름 76.2 MHz라는 주파수도 부여받은 본격적인 라디오 스튜디오였다. 작은 도시에 무슨 라디오스튜디오까지 따로 있는가 싶었는데 노령인구가 많아 인터넷 등의 접근이 어려운 사람들에게 NHK 같은 전국단위 방송이 아닌 지역정보를 담은 커뮤니티의 필요성이 대두되어 니세코 리조트 관광협회에서 만들었다고 한다. 라디오 코너 운영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했지만 라디오를 들을 방법이 없었던 데다 들을 수 있더라도 일본어가 일천한 실력이라 그저 궁금증으로 남길뿐이었다. 



니세코 온천
라디오 니세코



이후에도 코인세탁소니 작은 과일가게 등이 나타났지만 모두 문이 닫힌 상태였다. 이른 시간이라서라고 하기에는 동네 자체가 상점이 활발할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었다. 20여분을 언덕을 따라 오르면서도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았고 이따금씩 차가 한두 대씩 지나갈 뿐이었다. 그래도 길을 걷다 예쁜 골목길이라도 나오면 그런대로 즐기면서 걸을 수 있겠는데 그렇지도 않은 정말 평범한 마을풍경이었다. 오기가 나서 길 끝에 다리인지 공원인지 모를 구조물이 있는 곳까지는 걸어가 보겠다며 열심히 걸었다. 여전히 밥집 하나 문 연 곳이 없었고, 아담한 종합병원 앞에 약국 하나가 간신히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리고 있었다. 하지만 배고프다고 약을 사 먹을 순 없지 않은가. 굶주림을 참고 조금 더 걸어가니 구조물이 있던 곳은 니세코정립 소학교였다. 둥그런 운동장 뒤로 학교 건물이 서있었는데 재미난 것은 담장이 전혀 없었다. 축구공이라도 잘못 찼다간 니세코역까지 굴러갈 것 같은 탁 트인 느낌이었다. 운동장에는 정글짐과 미끄럼틀이 있었고 바닥엔 색을 입힌 타이어가 반씩 묻혀있었다. 추억 속의 초등학교 풍경이었다. 이 작은 도시에도 초등학생들이 있어 학교가 운영되고 있구나 싶어 신기하기도 하고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멀리서 본 니세코역
더 멀리서 본 니세코역
니세코 마을어귀
니세코 초등학교



보통 여행지에서 시간이 붕 뜨게 되면 나는 다음 열차나 버스가 올 때까지의 시간을 계산한다. 그 시간을 절반을 쪼개 걸어 다니며 구경하면 돌아올 시간이 절반이 남아서 나름 합리적인 잔잔바리 관광이 가능하다. 물론 구경을 하다 뭔가 시간을 들여 더 볼만한 것이 있으면 열차를 하나 보내고 다음열차를 타도 된다고 생각하면 넉넉하다. 아쉽게도 니세코에서 남은 절반의 시간동안 더 볼 것은 없었고 나는 냉큼 발을 돌려 역으로 돌아왔다. 사실 역에서 초등학교까지 걷는 길이 점차 고도가 높아지는 지형이라서 요테이산을 조망할 수 있는 곳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도 있었는데 날씨 때문인지 방향 때문인지 전혀 볼 수 없었다. 역으로 돌아와 만난 니세코 관광안내표지판에는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씨의 요테이산이 그려져 있어 나를 아쉽게 했다. 이 아쉬움을 언젠가 다시 이곳에 돌아와 풀 수 있을는지. 여전히 아무것도 먹지 못한 상태라 자판기에서 따뜻한 호지차 페트병을 사서 소소하게 배를 채우고 있자니 열차가 도착했다. 오전은 공쳤다 치고 오후에 본격적인 오타루 관람을 해야겠다며 투지를 불태웠다.  



관광안내표지의 근사한 요테이산
오타루역으로 향하는 길에 본 구름 속 요테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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