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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쓰다 Xeuda May 30. 2023

[이름 없는 것들]

- 쓰다Xeuda 정규 1집

   살아있는 것만이 반대로 가는 것을 할 수 있다. 흐르는 감정을 그대로 흘려보내지 않고, 보고 멈추고 다시 쓴다. 내 안에 존재하였으나 동시에 존재하지 않았던 감정들, 이름 없는 그 감정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부른다. 이름 없는 것들이 스스로 이름을 붙인다.



   1집 앨범 [이름 없는 것들]의 짧은 소개 글입니다. 이번엔 이 글을 조금 더 풀어보려합니다.  종종 제 곡의 가사나 내용이 너무 어렵다는 평을 듣곤 하는데요. 저는 되도록 작업물에 대해 길게 설명하지 않는 방향을 택해왔습니다. 지난번 글에 적었던 것처럼 음악은 글보다 음악 그 자체로 느낄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공연 때마다 관객분들께 앨범과 곡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덧붙여드립니다. 그러니 훨씬 더 풍성한 표정으로 공연을 집중해서 즐겨주시더라고요. 그 모습을 보면서 문득, 어쩌면 해석의 여지를 준다는 핑계로 설명하기를 외면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선 난해한 1집 앨범 소개 글부터 찬찬히 뜯어 보려고 합니다.



   살아가면서 긍정되지 못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분명히 거기 있지만 사람들 앞에 꺼내 놓을 수 없는 감정, 그렇게 끊임없이 삭제되고 탈락되는 감정을 밖으로 꺼내보고 싶었습니다. 꺼내놓은 감정에 대한 가치판단은 하지 않고 그냥 ‘여기 있고, 그걸 보았다.’ 선언함으로써 있음을 인정하고자 했습니다.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딱 거기까지만 할 수 있는 앨범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이름 없는 그 감정들에게 이름을 붙이고 부른다.”라고 적었습니다. 이름이 없던 것에게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것이 거기 존재할 수 있게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소개 글 끝에 한 줄 덧붙인 문장, “이름 없는 것들이 스스로 이름을 붙인다” 이것이 저에겐 제일 중요한 부분입니다. 분명 제가 이름을 붙였지만, 결국은 그 ‘이름 없는 것들’이 스스로 자신을 드러냈기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습니다. 인정의 주체가 누구였는지에 따라 해석의 여지가 달라질 수 있으니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고 적었던 문장입니다. 수동적으로 이름이 붙여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이름을 붙인 것입니다.


   이름이 있는 존재는 그 자체로 생명력을 지닙니다. 죽어있는 것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고, 생각할 수 없으니 어떤 것에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살아있는 것은 반대로 갈 수 있습니다. 오직 살아있는 것만이 반대로 갈 수 있습니다. 이름 없는 것에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것의 존재를 인정함과 동시에 살아있음을 느끼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감정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고 보고, 멈추고, 다시 썼습니다. 그렇게 이번 앨범 [이름 없는 것들]이 탄생했습니다.



   이 앨범은 오롯이 저를 위해 만든 앨범입니다. 감정을 기억하는 일이 서툴고, 자주 상처받고 때때로 우울한 ‘나’의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토하듯 만들어 낸 음악입니다. 비록 저를 위해 만들어진 음악이지만, 진짜 위로는 자신을 위로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서 시작된 이 앨범이 자기를 부정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자꾸만 부정당하게 되는 사람들이 듣고 힘을 얻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힘을 주고 싶다, 위로가 되고 싶다는 말은 ‘감히' 하게 되는 것 같아서 좋아하진 않지만, 어쨌든 저와 비슷한 위치에서 그런 기분을 느끼는 사람들이 듣고 자기를 너무 부정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습니다. [이름 없는 것들]은 그런 앨범입니다.



쓰다 (Xeuda) 1집 [이름 없는 것들] 듣기 : https://www.youtube.com/watch?v=1f9D4ru2r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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