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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머뭇펭귄 Aug 26. 2021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마음에 두시나이까

네이버 웹툰 - "당신의 과녁" 리뷰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대단하게 여기십니까. 어찌하여 사람에게 마음을 두십니까?

어찌하여 아침마다 그를 찾아오셔서 순간순간 그를 시험하십니까?


 언제까지 내게서 눈을 떼지 않으시렵니까? 침을 삼키는 동안 만이라도, 나를 좀 내버려 두실 수 없습니까?


 사람을 살피시는 주님, 내가 죄를 지었다 하여 주께서 무슨 해라도 입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의 과녁으로 삼으십니까? 어찌하여 나를 주의 짐으로 생각하십니까?


- 욥기 7장




https://comic.naver.com/webtoon/list?titleId=738194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경험해 본 적 있는가? 



 우리는 살아가며 많은 고통의 순간을 직면하게 된다. 오래 준비한 시험에서 낙방하기도 하고, 운명이라 생각했던 애인에게 이별 통보를 받기도 하고, 소중한 사람들을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떠나 보내야 하기도 한다. 그러나 고통의 원인이 납득 가능한 것이라면, 또는 노력에 의해 극복이 가능한 것이라면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고통은 성장과 각성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고통을 유발한 나의 과오를 다잡기도 하고, 고통의 문제를 담대히 해결해 나가며 성장해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마치 격한 운동 후 느껴지는 근육통에 어느정도의 뿌듯함을 느끼듯, 우리는 고통을 통해 성장하고 비로소 어른이 되어간다고 믿는것이다.



 그러나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임계치는 엄연히 존재한다. 불치병, 끔찍한 범죄 사건에의 연루, 전쟁 등 극한 상황 속의 인간은 내 목을 조르는 세상이라는 괴물 앞에 철저한 무력감과 공포를 느낀다. 이러한 극한 상황이 오래 지속되다보면 반드시 마주하게 되는 감정이 있는데, 바로 '의구심' 이다.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내가 그 정도로 많은 잘못을 저질렀는지, 이 고통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답을 우리는 묻고 따지기 시작한다. 철저한 낭패감을 마주할 때 백치였던 소년이 사유하는 어른이 되는 법이다.


 

 개인에게 불어 닥친 극한의 고통은 도무지 그 이유를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극한상황의 개인이 선택할 수 있는 해결책은 두가지가 있는데, 첫 번째는 삶이 우연과 고통 뿐임을 인정하고 초탈하는 길이고, 두 번째는 분노에 잠식당한 나머지 모든 것의 파멸을 추구하는 길이다. 본 웹툰의 주인공 최엽은 두 번째 길을 선택하고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선사한 세상을 향해 활을 겨냥한다. 그러나 타고난 선한 본성 탓인지 그는 좀처럼 타락하기를 버거워한다. 사랑하는 가족, 때로는 분노를 유발하기도 하지만 그의 곁을 지켜주는 친구들, 또한 인간관계의 생동감에서 느껴지는 적절한 삶의 활력이 절대 꺼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그의 분노를 누그러뜨려 주기도 한다. "그냥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과거에 집착하지 말고 현재에 충실하며 살아가면 되지 않을까?" 라는 현실적인 타협점은 그의 선택과 결심에 의구심을 품게 하고, 그를 동요하게 만든다. 



 그렇게 원래의 목적이 흐려져 갈 때 쯤, 잠잠했던 심지에 불을 놓는 몇 몇 사건이 발생한다. 그 사건들은 타락을 향한 최엽의 열망에 다시금 시동을 걸게 만들고, 그를 회유했던 주위 사람들은 어찌할 줄 모르고 갈팡질팡 한다. 그러나 계획을 실행에 옮기려던 찰나, 친구 요한의 방해와 예상 못했던 납치 사건등을 계기로 계획은 완전히 실패하게 된다. 인생의 목적을 상실한 최엽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하지만 어이없게도 억셌던 밧줄이 끊어져 버리며 이마저도 실패하고 만다. 이후 다급한 전화가 들려오고, 엽은 완전히 회복된 어머니를 품에 안는다. 


 

 이 웹툰은 구약성서 중 '욥기'의 내용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주인공 이름인 '엽'도 욥의 모음만 바꾼 것이고, 아예 웹툰 중간에 욥기의 구절이 직접적으로 인용되기도 한다. 욥이란 인물은 누구보다도 선한 인물이었다. 그는 신을 경외했으며 신이 보기에도 그보다 자신의 기준에 합당한 인물은 없었다. 그러나 욥은 사탄의 시험으로 엄청난 고난을 받게 되고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은 참된 신앙인의 표본이었던 욥 마저도 신을 원망하도록 만든다. 내가 무엇인데 나를 이리도 못살게 구느냐, 내가 죄를 짓건 안 짓건 그게 신인 당신과 무슨 상관인가, 너무 힘들어서 그만 죽고 싶다... 등 욥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원망 섞인 토로를 신 앞에서 쏟아 놓는다. 이를 듣고 있던 신이 끝부분에 등장하는데, 그는 욥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한다. '네가 이 세상을 창조했느냐? 네가 뭔데 내 뜻에 의문을 품느냐?'.



 욥기를 읽는 사람들은 자신이 비신도이건, 신도이건 모두 신의 이러한 답변에 찜찜함을 감추기 어려울 것이다. 모든 것은 피조물인 네가 이해할 수 없는 나의 온고하고도 완벽한 섭리이니 받아들이라는 말은 포악한 독재자의 엄령 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점은, 욥은 이후 말끔히 회복되었으며 많은 복을 누렸다는 사실이다. 마치 고통의 세월이 있었기는 하냐는 듯, 그는 이후 그 누구보다 행복한 인간으로 세월을 만끽한다. 마지막화에서 보여지는 최엽의 모습도 그러하다. 평온한 일상을 되찾은 최엽의 얼굴에 그림자가 가시고, 태양은 여전히 그를 내리쬔다. 



 요한은 그에게 신을 인정하냐 묻지만, 엽은 의구심이 여전히 풀리지 않았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그의 삶에 분명히 어떠한 이해할 수 없는 개입이 있었다는 사실, 또한 그러한 개입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인정하게 만들었고, 또한 발목을 붙잡는 과거로부터 해방되게 만들었다. 더 이상 내려쬐는 태양이 오만하고 독선적이게 보이지 않고, 그가 내뿜는 거부할 수 없는 햇살을 음미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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