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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환 Apr 17. 2017

사상 5

<낯선 여행자의 시간 | 개정판> 연재 #32

현실적이라는 말이 대부분 비논리적이고
비상식적이거나 거짓을 뜻한다면 
이 세계에는 부조리와 부정과 거짓만이
현실이 될 자격을 갖췄다는 뜻이 된다.




학문적 지식으로서 사상이란 막연한 관념의 우물 속에서 미미한 파문만 일으킬 뿐이다. 인간 존재의 삶 속에서 번민과 함께 소용돌이치는 사상은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존재자 실체를 전제로 한다. 그래야만 그것이 타자와 존재자의 관계 속에서 객관적인 사실 사태를 일으키는 동력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 사회에 문명의 창조라는 진보 현상—물론 반드시 진보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참된 사상은 어떠한 장애에 부딪힌다 하여도 우연이 아니라 필연적으로 진보를 향하는 커다란 줄기 내부의 나이테를 형성한다—을 이루어 나갈 수 있다. 인간 존재의 철학 혹은 사상, 이념이라는 것은 우리의 의식 속에 길게 드러누워 있는 막연하고 희미한 그림자이거나 바람따라 떠돌아다니는 뜬구름이 아니다. 사상이란 존재자의 행복을 파괴하거나 상실하게 하는 번민으로서 추상적 관념으로 머무는 고단하고 쓸데없는 생각 같은 것도 아니다.


인간 존재가 행복하지 못한 까닭은 사유하는 철학적 번민 때문이 아니라 욕망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오히려 존재자의 행복 지표 자체라고 할 수 있는 사상이 결핍되어 있거나 부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행복해지기 위해서만 살아가는 존재가 아니다. 인간은 행복이라는 신기루를 욕망하며 그 욕망이 마치 삶의 본질인 것처럼 착각하고 이 착각 역시 그의 삶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 인간 존재의 삶 대부분은 사실 고통과 이를 버텨내는 인내와 생물학적인 본능에 대한 집착이 지배한다. 사상은 이 피지배 속에서 번민하며 탄생하고 이러한 완강한 삶의 모든 사태에 대해 저항하게도 하고 또 다른 욕망을 창조하기도 한다.


인간은 죽음이라는 삶의 완성을 위해 살아가는 필멸의 존재다. 만일 행복해지기 위한 것이 삶이라고 한다면 인생은 끊임없이 한 편의 연극을 완성하기 위해 아첨하고 아부하며 삶 자체를 기만해야 한다. 행복이란 선량함과 마찬가지로 궁극적인 어떠한 것이라기 보다 삶에 소여(掃如)되는 하나의 재료에 불과하다. 뿐만 아니라 그 의미의 크기나 깊이가 유감스럽게도 고통이나 번민의 부피와 무게에 비할 바가 못 될 만큼 미미할 수도 있다. 


고통이나 번민이 그 자체로 기쁨의 원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들 자체가 원인 된 사태가 될 수 없듯이 행복이나 기쁨 또한 목적적인 본질일 수는 없다. 삶의 주인인 존재자의 태어남, 살아감, 죽음이 존재의 원인이 된 사태이며 과정이며 목적으로서 이것들 모두가 존재자의 고유한 삶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행복이나 고통은 거대한 실존 본질을 잠시 잠깐 스쳐 지나가는 신기루와 같은 순간의 사태들에 불과한 것일 수도 있다.



인간 존재의 입을 통해 거룩하고 아름다운 말과 노래가 흘러나올 때 그의 마음에는 추함과 사악함이 동시에 도사리고 있다. 그것처럼 한 인간의 삶에는 불행과 행복이 동시에 존재한다.


인간 존재는 의외로 자주 신의 거룩함이 아니라 악마의 저급함과 닮은 집단의 광란 앞에서 경악하고서야 후회를 하고 오류에 대해 자각한다. 오류 속에서 광분하는 인간에게 신의 계시나 성인들의 예언은 냉소적 무관심의 대상물이거나 자기 정당화의 도구로서 광기를 부채질하는 중요한 동기로만 취급된다.


인간의 선량함은 선량하다는 확신과 믿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 본질로서 나는 진정 선량한 존재인가, 나의 행위는 진정 선량한 결과에 기여하였는가? 라고 ‘성찰’하며 ‘회의’하는 데에 있고 목적적 본질로서 ‘실천’하는데에 있다.


‘당신은 선량한가’라는 타자의 양심에 대해 회의하는 자는 근본적으로 비열한 본성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는 선량하지 못한 부덕에 대하여도, 심지어는 그 야비함에 대하여도 당당한 주체가 되지 못하고 타자의 사상의 원인을 회의하거나 비난함으로써 자신을 정당화하는 것 같다.

모든 결과적인 사회 악에 대한 모든 책임은 인간 존재의 침묵이 져야 한다. 그러나 침묵이라는 비열함은 능동적으로 무엇을 하지도 않고, 어떤 일을 당하지도 않으며 부조리한 사태를 외면하고 먼 산을 바라보며 언제나 평안하기만 하다.


또 다시 강조하지만 우리는 정말 정직해져야 한다. 우리 스스로의 천박함과 위선과 비열함과 탐욕에 대해 솔직해져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부조리들에 대해 정직해진다 하더라도 우리가 더 비열해지는 것도 아니고 더 천박해지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좀 더 솔직해지고 좀 더 양심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타자의 거짓과 오류에 대해 관대해질 수 있고 타자의 천박함에서 자신의 천박함을 보며 그에 대해 인내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나는 바로 이것—정직은 상대 타자가 없는 존재자 단독으로는 그의 내면에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이 존재자와 타자의 관계를 통해 이루어 낼 수 있는 부조리와 부정에 맞서는 저항이며 선량함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간은 자신의 선량함을 과시하기 위해 자선을 하고 또 그것을 권장한다. 그러나 인간 존재의 인간에 대한 동정에서 비롯되는 자선이란 가진 자들이 가지지 못한 자들에 대한 저항의 의지를 짓밟는 매우 우아한 경멸이며 폭력이다.


나눔이라는 배분적 정의의 실현은 개인의 우월감이 아닌 사회 체제 혹은 국가 체계의 제도를 통해 이루어져야 하며 이것은 구체적인 법체계를 통해 이루어진 ‘국가’의 의무다. 만일 이를 게을리하면서 자선을 권장하거나 이에 나서게 된다면 부자나 세도가들은 신적인 우월감 위에서 오만해지게 되고 수혜자인 인간 존재들은 계속해서 그의 존엄성을 모욕당한 채 비참 위에 엎드려 다음 자선 때까지 마치 구세주의 재림을 기다리듯 좌절과 고통 속에서 시간을 보내야만 한다. 적어도 메시아에 의한 구원이라는 신앙의 관점이 아니라 인간 이성에 의한 사상의 관점에서 본다면 자선은 구원이 아니라 인간 존재의 평등에 대한 경멸이며 모욕이고 저주이다.


이렇듯 사상은 분별의 빛이 된다. 그리고 사상으로 인해 인식하는 인간 존재는 사상의 구체적이고 객관적인 징표이며 의식과 문명의 주체자가 될 수 있다. 인간은 자신이 생각하는 만큼 살아갈 수 있고 그만큼의 인간이 될 수 있다. 인간은 생각하고 신은 심판한다. 그리고 둘은 모두 창조한다. 신은 생명을 창조하고 인간은 그 생명력인 사상을 창조한다.



‘그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은 쉽게 편견을 심어주게 되고 그 결과는 오류로 이어진다. 이 관점에서 본다면 단순한 기억력은 매우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다. 그 기억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이라는 믿음만 되풀이하게 한다면 어쩌면 그 기억력이라는 것은 가지지 않으니만 못할 수도 있다. 이러한 기억에 대한 의존은 새로운 사상을 창조하는 데에 매우 큰 장애물이다. 기억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는 것은 인식에 대해서도, 사유라는 인간 내면의 관념의 운동에 대해서도 나태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입맛이 없다는 것이 병이 났다거나 운동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생기는 활동능력감소에 따른 기능 저하를 의미한다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성의 왕성한 활동력을 상실했거나 따라서 이성적 존재로서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기억에 대한 의존은 바로 이성의 창조 능력에 대한 하나의 퇴행적 기만이며 기계적이면서도 가끔 유용한 단순 사고일 뿐이다.


기억에만 의존하는 이성의 창조 활동의 나태함은 실체와 허상을 식별하는 인식 능력 또한 상실하게 한다. 적극적으로 속이지 않고 인식의 오류를 통해 쉽게 속아 넘어가도록 유혹하는 황홀한 그것이 허상의 실체이다.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을 때에는 그 오류를 수정하기에 늦었다는 자각보다 훨씬 더 가혹한 좌절을 체험하게 된다. 그것은 허상을 통해 즉, 황홀한 이미지를 마주했을때 무엇이 사실인가 하는 것보다 무엇이 좋은가에 더 관심을 갖고 좋은 것이 옳다는 착각 속에서 발생하는 오류가 안겨주는 필연적인 대가이다.


당연한 이야기이겠지만 모든 인간 존재는 자기 판단에 대해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언제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더구나 무엇이 더 좋을까 하는 관심이 이성적으로 잘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공상과 결부되면 개인의 파탄으로, 이 비이성적인 공상과 더불어 집단의 욕망이 결부되면 사회적 파탄으로, 그 두 가지와 더불어 맹목과 편협성이 결부되면 그 역사는 집단 광기의 파탄으로 내몰리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부로부터 지성을 향해 닿는 인식을 바탕으로 우리 내면의 관념의 뜰을 거닐고 사유하며 생각하고 회의(懷疑)함에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인간의 관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쉽게 망상을 비약시키고 오류를 증폭시킬 수 있다는 점을 늘 경계해야 한다. 허상이라는 것은 결국 스스로를 속이도록 현혹하고 그 오류를 통해 파멸하도록 유혹한다.

착각, 허상 등의 오류를 굳이 탐구하는 이유는 사유의 과정이 언제나 분별 있는 사상으로만 나아가는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의 사유는 언제나 상상과 사실의 경계에서 쉽게 혼란을 일으키기도 하고 이것을 통해 진실을 분별하기도 한다. 


냉철한 인식을 통해 밝히고자 하는 진실에는 최소한 세 가지의 속성이 있다. 이미 잘 알려진 불편함, 그것으로 인해 번민해야 하는 혼돈으로서의 우울, 그리고 그것 모두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의지로서의 용기가 그것이다.



사상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시간과 안정된 사유의 책상이 필요하다. 그러나 안락 자체는 사유의 무덤이다. 더는 괴롭지 않다는 것은 더 이상 번민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그것은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성에게는 죽음의 전조와도 같은 것이다. 


안락함이라는 부드럽고 따스한 유혹이 사유를 향해 감미롭게 다가온다. 희미하던 어둠은 더욱 짙어진다. 날카롭고 차갑게 빛나던 이성의 빛은 맥없이 죽음을 향해 스러진다. 생각하는 존재자에게 번민이란 노동자들이 흘리는 땀의 신성함과도 같은 것이다. 인간의 숨결이 멎는 순간 사유는 멈춘다. 


아무리 어리석은 인간이라도 어리석은 만큼은 생각하며 아무리 비참한 인간이라도 비참만큼은 존엄하다. ‘비참’을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자는 그 어느 곳에서도 온전하게 존재할 수 없다고 나는 확신한다. 이러한 존재와 존재의 과정을 관통하지 않고서는 인간의 사유는 사상으로 탄생할 수 없다.


어떤 사상이 결과적 오류 그리고 내재적으로 있을 수 있는 오류에 대해 회의하고 자각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이미 사상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자의 사상적 가치를 파괴하거나 맹목적으로 추종하게 하는 어떤 것도 참된 사상 혹은 이념적 가치를 갖지 못한다. 사상적 가치가 존재자를 위해 헌신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 순간 이후로 모든 의미를 상실하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든 비판할 수 있고 누구나 비난할 수 있다. 이 비판과 비난으로부터 자유롭고자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선입견이나 편견을 가질 수도 있는 사람이며 오류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겸손하게 말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이러한 위선적인 노력은 한 인간의 오류를 기만하기 위한 증거로서 객관화될 뿐이다. 비판과 비난으로부터 자유롭다면 그것은 인간의 사상일 수가 없다.


논리적이지 않거나 최소한 상식적이지 않은 것을 현실적이라는 이유로 타협해서는 안 된다. 물론 현실이 논리적이거나 이상적일 수는 없다. 그러나 논리는 현실의 일부로서 사태의 규명을 위한 중요한 도구이며 과정이다. 현실은 사실들의 연속된 사태이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현실 현상들이 재구성되고 진실이 규명될 수 있다. 논리라는 과정을 통해 우리는 거짓을 걸러낼 수 있으며 이 이유만으로도 논리는 현실에서 배제되어서는 안 된다. 


인간이라는 종(種)만이 거짓말을 한다. 현실적이라는 말이 대부분 비논리적이고 비상식적이거나 거짓을 뜻한다면 이 세계에는 부조리와 부정과 거짓만이 현실이 될 자격을 갖췄다는 뜻이 된다.


인간이라는 종만이 의지를 통해 스스로가 거듭나는 존재임—이것이 니체가 주창한 힘에의 의지이며, 새롭게 거듭나고자 하는 인간다운 참된 인간형 즉, 위버멘쉬였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위버멘쉬는 초인적이거나 신적인 어떤 능력을 가진 인간이 아니라 이러한 진화 진보하는 인간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을까—을 자각하고 깨우칠 수 있다. 인간 존재만이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번민하고 생각하며 창조한다. 신의 인간 원형을 비롯한 피조물의 창조는 신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권능이지만 인간의 사상 창조는 신에 의해 인간에게 유보된 인간 의지의 자유로운 권리이다.


인간은 사상을 창조한다. 그러나 그 사상은 필연적으로 오류를 수반한다. 인간은 사악한 사상도 창조한다. 가장 사악한 사상은 결코 그것이 무엇을 주창하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 사악한 사상은 얼마나 비논리적으로 주창되며 맹목적인 과정을 통해 완성되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오류는 스스로의 오류를 입증하지 못하도록 폭력적 궤변을 정당화한다.


사상은 말과 글과 논리를 통해 형제를 띄게 된다. 사상이 정의를 부르짖는다고 해서 진리를 외친다고 해서 그 자체가 곧바로 참된 것, 옳은 것으로 되지는 않는다. 옳다는 것은 옳음 그 자체보다 왜 옳은지가 더 중요하다. 논리는 맹목의 오류를 제일 먼저 배척한다. 그리고 맹목은 이성적 논리를 배척함으로써 사상의 적이 된다. 인간의 사상 자체를 단죄하고 배척할 수 있는 길은 없다. 인간이 전지전능한 신보다 더 전지전능해짖 않는 한 절대적인 사유(思惟)를 사유(私有)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존재자의 사상을 반동으로 몰고 단죄한다는 것만큼 끔찍한 죄악은 없는 것이다. 참된 것, 옳은 것도 반드시 왜 그러한가라는 회의적 의문에 대해 논리적으로 정당한 응답이 있어야만 한다.


인간이 인간의 목숨을 해치는 범죄를 저질렀다면 신이 신 스스로에게 유보한 최후의 절대 심판 영역을, 인간이 인간의 사상을 반동으로 단죄하였다면 신이 인간에게 유보한 인간 존재 자유의지의 절대적 고유 영역을 침범한 것이 된다. 인간 존재의 사상은 창조주의 신성도 침범할 수 없는 인간 존재만의 절대 자유의 영역에서 탄생한다. 생각한다는 사유의 운동은 특정 세력의 규율이나 어떠한 인간의 허락을 통해 부여받는 ‘제한된 권리’가 아니다. 인간의 자유의지가 시작되는 출발점이 신의 절대적 권능이 멈추는 최종 종결점이다. 인간의 사상은 무한의 자유를 신으로부터 부여받았다.


인간의 기본적인 그리고 사상적 자유를 분할하여 부분적으로 누릴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틀림없이 똥이 마려울 때 방귀만 뀌고도 똥을 싼 것처럼 시원함을 느낄 수 있다고 믿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사상의 자유가 변비약 같은 것처럼 물질적 재화나 물리적, 생리적 조치와 치환할 수 있는 어떤 것이라고 믿는 불온하며 어리석은 생각이다. 그러한 불온한 믿음은 자신의 사상마저 질식시키게 되고 그 자신으로 하여금 피의 대가를 치르게 할 수도 있다. 사상의 자유는 많은 피의 대가를 치르며 투쟁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는 저항하며 외치는 존재자들만 쟁취할 수 있는 숭고한 대가이다.


사상은 인간의 혼을 숨 쉬게 하는 절대적 자유이다. 고요함을 뿌리치고 외칠 수 있는 자유의 본질이며 모든 분주함 속에서 홀로 고요히 멈추고 태양을 바라볼 수 있는 그러한 존엄하고 숭고한 자유인 것이다.



알렉산드로스는 디오게네스가 태양을 가리지 말라고 한 말의 의미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에게는 세상을 정복—전쟁에는 희생이 필연적으로 수반된다—하려는 야만적 폭력은 있었으나 차마 자신의 어리석음을 고백할 용기는 없었던 인간이었다. 그래서 그는 영토 확장에 더욱 열을 올렸을 것이다. 그러던 중 모기에게 물렸고 뇌염에 걸려 열병으로 숨졌다. 그의 사인(死因)이 뇌염으로 인한 열병인지 불타는 야망에 의한 광분의 열병인지 분명하지는 않다.


그의 삶의 이유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혹시 침략과 약탈과 살인을 일삼던 그를 후세들이 영웅으로 추앙해 주기라도 바랐던 것일까.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이론과 사상도 시간이 지나면 오류가 드러나게 마련이다. 가설로부터 시작된 하나의 명제가 미래의 모든 현실까지 그 전제에 포함시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신만이 원하고 꿈꾸는 세계를 이룰 수는 없다. 인간 존재는 인간의 세상에서 숨 쉬며 살아가는 또 다른 한 존재자라는 사실을 겸허히 받아들일 때 타자를 존재자로서 존중할 줄 알게 된다. 그런 연후에야 존재자들의 세계보다는 작지만 소중하고도 고유한 자기 자신의 세계를 이룰 수 있게 된다.


인간은 스스로 사유하고 번민하며 그 속에서 의미를 찾아 살아가는 만큼의 존재자가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사상은 존재자의 고유한 징표이며 결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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