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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환 Feb 05. 2017

사상 4

<낯선 여행자의 시간 | 개정판> 연재 #31

법은 언제나 악법일 수밖에 없다. 
또한 법은 악으로서 악을 단죄하는 
정의의 최소한이다. 
악법도 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법이 간직한 악에는 최소한의 정의가 있기 때문이다




사유함에 있어 편협성은 가장 큰 죄악이며 오류이다. 이것은 인간 존재의 정신을 압살하는 최악 중의 최악이다. 그러나 매우 기이한 것은 이 편협성이 선량하고 순결하게 살아야 한다는 강박과 억압을 앞세운 사상에 대한 탄압이 미신적 신념을 형성할 때, 이 맹목에 의한 공격적인 폭력성은 무자비한 야만의 극단을 달리면서도 아무도 이를 알아채지 못한다는 것이다.


흔히 그것은 역사적 사례로서 애국이나 신앙의 형태로, 인종과 민족의 형태로, 집단에 의한 존재자 개인 혹은 소수의 사상과 생명에 대해 이해할 수 없는 폭력과 학살이라는 만행을 일삼아 왔다. 어떠한 보편적 가치에 입각한 정당성도 없이 심지어 애국의 전제인 국가 체계의 법—법은 필요악이라는 것을 늘 잊어서는 안 된다. 법은 이미 양심을 상실한 상태에서 국가와 개인, 개인과 개인의 이익을 판가름하는 최후의 필요이며 최종 결과에 대해 누구도 책임지지 않는 악이다. 이 책임은 분쟁 당사자만 떠안게 된다. 법은 대부분 악하다. 법이 적용되는 상황 역시 악의 발현 이후이다. 따라서 법은 언제나 악법일 수밖에 없다. 또한 법은 악으로서 악을 단죄하는 정의의 최소한이다. 악법도 법이 될 수 있는 까닭은 법이 간직한 악에는 최소한의 정의가 있기 때문이다—이 금지하고 있음에도 파괴와 살인은 예사로 저질러지고 반동에 대한 폭력은 일상적으로 저질러저 온 것이다.


이러한 편협성은 맹목을 합리화시키기 위한 물리적 폭력과 다를 바가 없다. 맹목적인 광기를 합리적인 근거가 있는 어떤 것으로 착각하게 되는 것은 바로 편협성 때문이다. 편협성은 맹목과는 조금 달리 좀 더 교활하게 이성의 파괴에 기여한다. 맹목이 하나의 사상처럼 광풍을 일으킬 수 있는 요건을 바로 이것이 갖추어 준다. 일반적으로 편협한 주장은 설득력을 쉽게 상실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편협한 맹목은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전개되며 획일화된 의식에 의해 통념이 지배되는 무리를 대상으로 삼기 때문에 훨씬 쉽게 다수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 편협성은 반대자를 설득하지 않고 동조자들만 규합하여 반동을 적대시하기 위한 이성 적대적 집단 사고이다. 


인간의 사고를 일정한 논리의 틀에 가두거나 강요하는 상태에서 합리적 지성을 겁박하는 것은 이 편협성의 몫이다. 이성적인 듯하거나 논리적인 듯한 편협성—논리적 결과는 ‘참’으로 귀결될 수도 있지만 ‘거짓’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확률로만 보자면 참일 확률은 절반일 뿐인 셈이다. 다시 말해 편협성은 절반의 다른 가능성을 송두래째 무시한다—은 쉽게 확신하게 만드는 매우 교활하고 효율적인 파괴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참된 사상이 탄생하는 과정에서 모든 대상에 대해 회의 하는 것과는 매우 상이한 모습이다. 그러나 대중은 비판하고 회의하며 사유하는 과정을 염세적이라고 부정적으로 평가하고 거부한다. 오히려 근거 없는 확신에 가득 찬 편협한 맹목과 기계화된 지식에 쉽게 매료되며 열광한다. 그것이 편협한가 혹은 맹목의 광기인가 하는 것은 이들에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다.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무엇이 인간에게 존재의 이유에 대한 물음을 던지는가 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 그들을 확신하게 하며 추종하게 하는가만 중요하다. 그들이 집단 안에서 사상에 대한 성찰을 한다는 것은 마치 벌레들의 무리가 자신들 스스로에게 이성적 존재가 지녀야 할 능력과 의미를 묻는 것과 같다.


그 무리의 편협한 확신을 저지하거나 맹목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맹목이라는 허상에 뜨겁게 열광할 때 하나의 존재자가 허상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품지 않는다는 것에 대해 자신들이 부도덕하다고 여길 아주 희박한 가능성은 있어도 그들이 내린 결론이 비이성적인 오류의 산물임을 인정할 가능성은 전혀 없다. 인정하고 싶지 않겠지만 이것은 인간 무리의 매우 일반적이며 보편적 광란이며 집단 광기의 본질적 속성이다.


의식의 편협성에는 역설적이게도 순결과 선량함에 대한 의심없는 확신이 깔려 있다. 이 믿음이 편협성의 저변에서 선량한 인간에 대한 믿음을 강요—인간 존재 본질의 선함에 대한 반감을 곧 악에 근거한 용납할 수 없는 오류로 단죄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에 이에 강제로 동참시키려 한다. 그리고 이것을 회의하거나 비판하는 것은 곧 인간 존재 자체를 부정하거나 나아가서는 신의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 간주한다—하며 사람들을 광분하게 만들 수 있다. 믿음 이전에 왜 인간을 신뢰하여야 하는가 하는 인간 존재 이유에 대한 성찰은, 즉 회의를 통한 사유의 과정은 반동으로 송두리째 거부되는 것이다. 즉, 인간 본성의 선량함에 대한 단정이 이에 대한 의심 없는 확신에 대한 근거를 가지게 되고 그 확신에 동참하지 않을 경우 적대적인 배척의 대상으로 낙인이 찍히게 되는 것이다.



선량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훌륭한 미덕이다. 이것은 경외심을 가져도 좋을 만큼 인간 존재의 최선의 삶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인간이 언제나 선량하기만 한 것은 아니다. 그가 어떠한 사태에 직면하여 어떤 선택을 하는가에 따라 그는 선량하기도 하기도 하고, 비열한 선택을 통해 사악해지기도 한다. 그것이 인간이다.


선량함의 기준은 물론 존재자 내면에 있는 양심이라는 것이 되겠지만 인간 존재의 선량함의 실체는 그가 어떠한 선택을 하고 그에 따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가 하는 행위에 의해 결정된다. 인간의 양심이 신의 본성으로부터 유래하였기 때문에 인간 존재 모두가 선량하다고 믿는 것은 적어도 인간의 이성이 작동하는 사상의 범주에서는 미신에 불과한 것이다.


선량함에 대한 믿음의 맹목—특히 개인 삶에서의 내면적인 선량함과 사회 집단에 대한 기여를 기준으로 한 업적 지향적인 우상 숭배적 찬양—은 인간 존재의 이성이 사상을 가질 이유와 목적 의식을 박탈하고 파괴한다. 착하게 살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으므로 혹은 신의 절대적 정의의 편에 설 수 있기 때문에 아무런 의심과 의혹 없는 선량함은 맹목으로서 삶의 본질이 되어버리고 만다. 착하게 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은 잘살기만 하면 된다는 맹목을 정당화하는 논리적 입장과 차이가 없으며 이러한 태도는 선량함에 기초한, 즉 신앙이나 고태적 도덕성의 논리를 바탕으로 하는 통념에 대해 의심을 갖거나 회의함이 없이 맹신하게 한다. 선량하게 사는 것은 이미 존재자와 타자의 관계 속에서의 삶의 태도가 아니라 하나의 이념이 되어버리고 그것은 전혀 신이 원하지 않는 왜곡된 신앙이 되어 인간성을 파괴할 수 있게 된다.


결국 무리 진 인간의 맹신은 참된 선량함과는 거리가 먼 피지배적 노예근성으로서 비열한 침묵의 선행을 신의 제단에 희생제물로 바치게 한다. 자신의 삶을 위로받고 그러한 사회 집단의 반복된 행위가 신에 대한 믿음을 왜곡하여 오히려 집단 광란의 도구로 전락시키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알료샤 까라마초프의 말을 상기하고 그의 말을 되새기며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먼저 정직한 인간이 된 이후에 착한 인간이 되어야 한다. 그렇다. 우리는 정직해져야 한다. 자신의 무지에 대해 정직해져야 하고,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지 못하는 이기적 욕망에 대해 정직해져야 하고, 이러한 인간 존재의 천박함에 대해 정직해져야 한다. 자신의 저열함에 대해 정직해져야 하고, 나태한 지성의 실천에 대해 정직해져야 하고, 갈등 앞에서 우유부단해지는 비열함에 대해 정직해져야 한다. 이러한 정직으로 인해 인간 존재는 사상에 근거한 존재자로서 행위의 지표와 가치 기준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또한 존재자는 고유한 사상의 등불을 발견할 수 있게 되며 참된 빛과 마주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그런 이후에야 마침내 참된 사상이 존재자 의지의 걸음을 인도하고 밝히는 등불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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