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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환 Jan 14. 2017

사상 3

<낯선 여행자의 시간 | 개정판> 연재 #30


사상은 신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며 인간 존재의 신성이다





다수의 무지—그러나 이 다수는 무지의 상태에 있으면서도 스스로 무지하지 않거나 그럴 수 없다는 확신을 갖고 있으며 그들은 소수의 지성에 대해 심한 불쾌감을 폭력적으로 드러내기도 한다—와 몰인식 앞에서 힘은 소수의 인식과 진실을 향한 저항을 체제, 체계에 대한 위협으로 왜곡, 날조한다. 이러한 작용에 의해서 다수의 무지와 무관심 앞에 소수가 인식하고 기억하는 사실이란 결과적으로 거짓에 불과한 것이 되어버린다.


다수 중 소수의 무리에게 ‘무지와 무관심, 몰인식’의 폐해가 자신의 이익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때에 사람들은 그제서야 진실에 대한 인식의 소중함을 알기 시작하고 절규하게 된다. 인간은 그 어떠한 사태도 개별적으로 자신의 일이 되기 전까지는 진실을 소중한 미덕으로 다루려 하지 않는다. 그러한 비겁과 비열함에도 우리는 끝까지 선량한 인간 존재로 평가 받기를 원하고 위대한 인간이기를 원하며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자신이 악의 대열에서 제일 앞장선 앞잡이라 할지라도 그가 개인 인간으로서 살아가는 삶은 지극히 평범하고, 보편적이며, 지극히 일반적이다. 그들은 악에 대한 위험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몰인식과 비겁을 무리 속에서 섞여 합리화하고, 자신만의 것—그것이 고유한 사유이든 의견이든 옷을 입든 음식을 먹든 무리의 유행에 의해 결정된 획일성을 그대로 따른다—이라고는 단 한 가지도 없다. 그들의 손쉬운 그리고 비열한 생존법이란 유행이라는 정체 불명의 제복을 입고 무리를 따라다니기만 하게 되는 것이다. 그 무리 속에서 그는 또 다른 그이며 또 다른 그는 그와 구분이 불분명한 다른 개체일 뿐이다.


인간은 자신이 알고 있는 ‘어떠한 사태 혹은 어떤 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하지 않거나 거짓으로 결론이 나더라도 그것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더구나 자신이 고등 지식으로 알고 있는 ‘어떤 것’이 현실 이해와 함께 절대적인 믿음으로 융합되어 있을 때 더욱 그렇다. 종종 이러한 절대적인 것은 이념, 관념 혹은 사상—물론 사이비이다—의 형태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이 허위여도 이미 이 오류에 대한 믿음으로부터 유추되는 것만이 진리이기 때문에, 즉 이미 오류여도 그것의 전제로부터 결론으로 이어지는 절대 오류 자체를 하나의 진리라고 굳게 믿는 한 그것이 거짓이거나 오류라는 것을 밝혀낸다 하더라도 어떠한 진리도 이 무모한 맹목적인 믿음을 깨뜨리지 못한다. 이것은 광란의 정체이지 사상의 정체가 아니라는 것 역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오류는 참된 사상이며 참된 이념으로, 참된 사상은 반동으로 그리고 오류로 단죄된다. 이것은 하나의 참된 사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 거의 필연적으로 거쳐 나왔던 지독하고도 잔인한 인간 이성의 광기의 역사적 과정이었다.


모든 오류는 한 치의 흔들림 없는 확신으로 행동하고 모든 사상은 진리에 대한 회의에 의해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인류 역사를 통해 사상과 법들이 평가한 모든 부정적인 가치들에 대해 냉정하고 이성적인 재검토는 반드시 필요하다. 


사상과 관념은 오류에 직접적으로 접촉하고 이성의 사유를 통해 그 부정적인 가치를 통한 가치 척도를 분명하게 인식하고 재정립할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문명은 범죄와 부도덕, 부조리가 혼재하고 있다. 사상은 이 문명이라는 패륜의 모태이기도 하다. 사상은 문명을 낳았고 그것을 진보시켜 왔으나 문명의 오류들은 사상을 파괴하려 하기 때문이다.



인류가 창조한 문명 중 말과 글만은 사상 속으로 순수하게 동화될 수 있으며 그것에 순종하는 오랜 벗이기도 하다. 통합체로서 문명은 언어와 개념의 논리와 직관의 결합으로 사상을 이해하게 된다. 그러나 육체와 호흡만의 결합을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듯 어느 누구도 사상을 말과 글의 혼합물로 이해하지는 않을 것이다. 존재자의 사유가 말과 글을 통해 사상으로서 의미를 갖게 되며 이것들에 의해 사상을 인식함으로써 의식을 깨어나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상은 관념 속에서 지식의 힘을 빌린 사유에 의해 잉태되기 시작한다. 인간의 감각 또한 사상의 재료가 된다. 인간의 감각은 때로는 그 어떤 명제나 가설보다 앞서 가기도 한다. 그러나 어떠한 필요가 절실하게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면 대게 이러한 감각은 언어와 함께 최후에 가미되는 부수적인 것이다. 인간의 감각은 최소한 그 확률의 절반이 오류로 치달을 수 있는 이성적인 것이 아닌 충동적인 것이다. 이러한 감각의 충동은 언제든 거짓을 동반한 오류를 유발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 거짓에 논리적인 이유는 없다. 이런 까닭에 인간의 사상에도 근본적으로 한계는 있을 수밖에 없다. 사상 자체가 아무리 참이라 하더라도 그 태생의 유한성 때문에 갖게 되는 태생의 한계—이것은 작용의 무한성, 자유로서 사상의 무한성과는 다른 일반적인 한계이다. 사상은 무한하게 작용하며 사상의 무한의 자유를 누릴 특권이 있으며 또한 그 특권을 검증할 수 없는 무한의 영역에 있다. 그러나 그 무한한 사상을 탄생시키는 이성의 육체는 유한하다—, 즉 진리로서 진실성에 접근하고 그 관념의 정체를 밝히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사상은 신의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것이며 인간 존재의 신성이다.


진실의 한계란 ‘그렇다’하는 순간에 참인 것은 참일 뿐이며 ‘아니다’ 하는 순간에 거짓인 것은 거짓일 뿐이라는 단순성에 있다. 그 순간이 지난 뒤에 거짓과 오류가 밝혀지더라도 말과 글이 지닌 진실의 한계는 거기까지인 것이다. 진실이라는 것은 흘러간 과거의 시간을 통해 더 쉽고 더 뚜렷하게 발견되며 증명된다.


인간 존재는 미래를 내다볼 수 없다. 진실은 순간적으로 결정된다. 그러나 그 진실을 입증하는데에는 시간이 필요하고 화석보다 더 오래 보존된다. 인간은 미래를 알지 못한다. 그러나 진실은 미래—과거의 관점에서 밝혀진 현재의 진실 역시 사실은 미래인 것이다—에만 영원할 수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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