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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인환 Jan 08. 2017

사상 2

<낯선 여행자의 시간 | 개정판> 연재 #29

무한성,
그것이 유한한 인간 존재가 탄생시킨
사상의 넓이이고 높이이며 동시에 깊이이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은 예외 없이 소멸하게 마련이다. 때가 되면 모든 생명체는 이 예외 없는 죽음의 법칙을 받아들여야만 한다. 우리는 사상을 통해 이 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진지하고 성숙한 용기를 갖게 된다. 동시에 이 의연한 의지가 사상의 깊이를 더해 주기도 한다. 인간 존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 바로 이 사상에 의존하고 이성은 그렇게 생각하고 사유하는 동력을 부여한다. 


때로는 한없이 인간을 부끄럽고 비참하게 하며 인간 존재 자신의 관념 속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그것이 이성이다. 차갑고 섬뜩하기도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성은 사상의 모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 존재가 사회 혹은 문명세계의 일부이기 이전에 온전하고 고유한 존재자로서 눈뜨고 깨어나는 사유의 운동이다. 동시에 그것은 인간의 육체적 본능과 더불어 원초적인 것이기도 하다. 인간 존재에게 관념이 없다면 본능 또한 없을 것이다. 즉, 인간 정신의 관념과 육체의 본능은 그 어느 것도 선후를 다툴 수 없는 것이다. 


사상을 탄생시키기 위한 사유의 뜰 안은 때로는 오만과 시기의 낙원이 되기도 한다. 그 감미로운 사상들의 달콤함에 도취된 오류와 교만과 맹목은 인간 존재를 광란으로 날뛰는 파탄으로 내몰수도 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인간이 원하고 인간의 입맛에 맞는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은 ‘참된 진리’를 찾아 나서야만 한다. 이 끊임없는 의지의 갈구는 진리에 대한 막연한 믿음으로부터 새로운 것, 참된 것을 발견하고자 하는 이성의 몸부림이기도 하다.


‘이 세계에 진리란, 참된 사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가 참 혹은 거짓이라고 할 수 있다면, 즉 존재자의 ‘의식적 믿음’에 근거 지울 수 있거나 만일 그럴 수 없다고 한다면, 이미 이 명제의 진실성은 진리란, 참된 사상이란 ‘인식을 통한 발견’에 의해 새롭게 재정립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은 개별 존재자로서 다른 존재이기도 하지만 다른 종족으로서 다른 존재자들이기도 하다. 인간 존재는 각각의 개별적이며 고유한 인식 체계와 이해의 바탕을 가지고 있다. 이 고유성은 생각보다 훨씬 깊고 광활한 새로운 사상 세계를 이루고 이것은 곧 우주라는 미지의 세계에 비견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존재자가 생각한다는 것은 앎에 대해 끊임없이 추구하고 사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생각한다는 사유의 운동을 통해 앎과 모름의 분별이 생기고 분별은 인간의 지성을 무지로부터 빛나게 하는 빛과 어둠의 경계선이 될 수 있다. 이러한 인간 지성의 관념이 논리와 직관이 융합된 통찰력과 결부되어 새로운 사상으로 탄생하게 된다.


생각하는 인간은 생각하고자 하는 지적 의지를 통해 저항하고 투쟁하며 변화하는 인간이 된다. 반대로 어리석은 인간은 사유와 최대한 멀리 거리를 두려 한다. 평범한 인간은 자신의 욕망이 좋아하는 것만 좋아한다. 지적인 인간은 왜 좋은 것인지 더 좋은 것은 없는지 생각한다. 참된 인간은 끊임없이 생각하며 그 자신만의 지적 능력을 가지고 인식하기 위해 현실사태를 회의한다. 어리석은 인간은 위대해지고 싶어만 하고 평범한 인간은 살던 대로 살고 싶어 하며 지적인 인간은 비판하고 비난하며 참된 인간은 회의하고 사유하며 이를 통해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다.



어떤 학자의 위대한 지성도, 사상가들의 깊은 사유도 생각는 그 순간의 흘러가는 시간을 따라잡지는 못한다. 따라서 고유한 사유란 유명한 사상가의 특별한 이론 안에 머물러 있는 특별한 어떤 것이 아니다. 사유는 모든 존재자들 생각 안에서 각 존재자의 것이며 또한 매 순간 새로운, 고유한 사상으로 거듭 탄생하게 된다.


인간 존재가 존재자로서 스스로의 의미를 퇴색시키지 않기 위해서는 언제나 생각하고 생각하는 삶을 살기로 결심할 수 있어야 한다. 생각하는 삶을 살기로 한다는 의지가 자신을 배고프게 하고 고통스럽게 하더라도 생각하고 다시 생각하며 ‘나’라는 자아를, 그 자아만의 관념 속에서 사유의 신대륙을 찾아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은 사유하는 수고를 꺼려서는 안 된다. 그리고 고난과 수고를 통해 살아가지 않는 이와는 우정과 사랑을 나누어서도 안 된다. 그들의 구김살 없음이 어떻게 그대의 번민과 인간 존재의 고통을 이해하고 공감하겠으며 위로와 안식이, 의지처가 되어줄 수 있겠는가.


진주처럼 빛나는 영혼을 가진 사람이어야 할 필요도, 맹렬하고 비참한 번민 속으로 일부러 뛰어들 필요도 없다. 어차피 인간 존재의 삶이란 적어도 한 번 정도는 스스로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삶의 고통과 번민의 소용돌이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그것을 단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구김살 없는 해맑은’ 우정과 사랑에 대해 과연 그것이 따뜻한 한 인간의 가슴으로서 그대가 기댈 수 있는 곳인지는 최소한 한 번쯤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인간의 실존은 유한성을 가진 존재의 한계의 정도 최소한에 가까운 최저점의 비참을 실체로 하는 것이다. 인간의 삶 대부분은 이것을 터전 삼아 이루어지게 된다. 탄생도 죽음도 인간의 실존적 현실이다. 삶이란 탄생 직후부터 곧바로 죽음을 향해 소여(掃如)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인간 존재가 필멸의 존재로서 가질 수밖에 없는 가장 극단적인 한계이다. 삶의 물리적 유한성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인지, 인식할 수 있으며 결론지어진다. 그러나 삶의 내면적 무한성은 정도 자체를 판단할 수 없다. 


인간의 삶이라는 범위 안에 사상이라는 것이 갇혀 있다고 생각하고 그러므로 유한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관념으로서 미완의 사상도, 이성적 결과물로서 구체적 사상도 무한하다.


무한성, 그것이 유한한 인간 존재가 탄생시킨 사상의 넓이이고 높이이며 동시에 깊이이다. 의지는 그 깊이로 뛰어들게 하며 넓이의 평원을 누리게 하는 존재자의 열정이다. 이것이 사상에 대한 적절한 평가라고 생각한다. 이성으로부터 유래하는 사상의 힘은 바로 유한한 인간 존재의 무한한 내면의 힘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사상은 종종 편협한 그러므로 온전하지 않은 이성에 의해 날조되어 오용된다. 무엇보다 이러한 현상은 사상을 박해하며 문명 세계를 지배하고자 하는 야만적 탐욕과 힘에 의해 자행되어 왔고 또 이러한 만행은 앞으로도 계속 시도될 것이다.


사상은 그 자체로 인간 이성의 형상이면서도 광분하는 완력에 의해 사악한 힘으로 단죄되기 일쑤다. 


사상은 그 자체로는 어떠한 악의 작용도 일으킬 수 없다. 사상의 궁극적 지향은 인간 존재의 관념과 사유를 향해 있고 광분하는 악의 작용은 궁극적으로 지배를 위한 물리적 완력을 동반한다. 그 완력의 대표적인 것이 바로 국가 체계의 법이 될 수도 있다. 법 제도는 언제든 사상을 박해하고 탄압하기 위한 가장 유용하며 합리적인 악의 도구로 전락할 수 있다.


스탈린처럼 법이란 것 자체가 필요 없이 반동 몰이를 통해 피의 숙청을 할 수도 있지만 히틀러처럼 형식적인 법의 껍데기를 동원해 인간의 이성은 물론 그 근간이 되는 생명체 자체를 파탄낼 수도 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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