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여행자의 시간 | 개정판> 연재 #34
인간의 운명이 수천만번 바뀌어도
인간 존재의 한계는 변치 않는다.
인간 존재는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극복하거나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울 수도 없고
또 그러한 신의 은총은 얻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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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불고 비가 내린다. 한 생명체의 귓가를 적시는 빗소리와 바람소리, 미숙한 동물에 불과한 한 존재자의 가슴 속에서 꿈틀거리는 움직임이 나를 짐승이 아닌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게 한다. 비록 바람에 흔들리고 침몰하듯이 이 세계 가장자리에 머물다 사라질 운명일지라도 나의 삶에 새겨진 시간과 의미들은 모든 인간의 생을 통틀어 오직 나 자신만의 신성으로 남게 된다.
누군가에게 귀중한 것, 값진 것, 희귀한 그것이 타자에게는 종종 눈길 한 번 끌지 못하는 조잡하고 비루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다 하여도 그것이 쓸데없는 것,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이 한 인간의 삶의 모습이거나 혹은 그 안에 내재하는 그 자신만의 어떤 것이든 볼품이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은가와는 상관없이 그것은 삶의 본질 일부로서 온전하게 남게 된다.
스치는 바람결을 따라 나의 삶을 돌아본다. 눈을 감고 서늘한 대기의 흐름 사이에 맺힌 가느다란 시간을 느껴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겨울 어느 공간에 나는 홀로 서 있다. 매서운 바람이 살을 엔다. 찢어질 듯한 감각이 피부를 지배했던 그 시간, 그 건조한 고통은 겨울의 차가움 때문이리라 기억 속에 각인되어 있다. 어쩌면 그 기억은 틀렸으며 살을 파고들어 마음까지도 시리게 했던 그 고통은 인간 때문은 아니었을까.
나는 다시 인간에 대해 생각한다. 인간은 가장 가식적일 때 가장 차갑다. 눈을 감고 나의 마음을 내가 섰던 곳, 내가 걸었던 도시 속으로 이끌어 본다. 진심이라는 것을 잃어버린 인간들의 도시, 그곳에서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그저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 자신의 외로움에 대해 깊은 연민을 가지게 되며, 그때 비로소 사람이 그립다고 고백하게 된다. 모든 인간의 운명은 삶도 죽음도 외롭다.
운명이라는 것을 마주하게 되면 인간은 나약해질 수밖에 없다. 비참이 인간 존재의 근본 속성이기 때문이다. 이 비참한 운명은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으며 인간의 운명은 다른 길로 나아갈 수 있는 선택이라는 여지를 남겨두었다. 선택은 그 누구도 아닌 나 자신만이 할 수 있다.
나의 마음속, 나의 의식은 서울 혹은 도시라는 거대한 야만의 미로 속에 서 있다. 그 미로 한가운데를 거대한 강이 관통한다. 강 표면에 드리운 것은 가로등의 불빛에 물든 도시의 야경이 아니다. 인간들의 좌절이며 절망이며 절규가 뛰어들어 흐느적거리는 파문이다. 시간이 흐르고 가을에 접어들어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짐승들의 가슴도 인간의 가슴에서 일렁이는 파문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저녁 해가 떨어지기 시작하면 야수의 시선 조차 저 먼 곳 어딘가를 바라보며 떠도는 바람을 뒤쫓아 떠나기를 열망한다. 그처럼 나의 마음도 어딘가를 향해 떠나기를 열망한다. 그러나 그렇게 발버둥칠수록 나는 현실로 곤두박질 치곤 한다.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 초월할 수 없다. 여전히 의식과 무의식 사이를 방황하며 나는 누구이며 무엇인가라는 반향없는 질문만 끊임없이 던질 뿐이다.
나는 다시 어린 시절 한 때의 기억 속으로 돌아간다. 쓰레기들이 떠다니는 바닷가 어시장을 걸었던 고교 시절의 기억이다. 사타구니가 부풀어 올라 주체할 길이 없었던 어린 수컷의 절정기였다. 그때 나는 발정난 가련하고 어린 한 마리 짐승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것 역시 한 인간의 운명 속에 존재하는 부정할 수 없는 삶의 모습이었다.
어느 날은 바람이 불었고 어느 날은 비가 내렸다. 바닷가에는 파도 소리가 시끄러웠고 고기잡이 배들이 떠 있는 썩은 바닷물 위로 빛이 내리고 있었다. 사람들은 오염된 바닷가를 가고파라 불렀다. 철없던 어린 그 시절에도 가고파는 권력에 아첨하던 비열한 위선의 수사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썩은 바다 가고파 위로 내리는 빛내림과의 조우는 황홀한 것이었다.
빛은 구름의 틈을 가로질러 바다 표면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어린 짐승의 눈에 빛의 형상이란 그렇게 각인되었고 그 뒤로 나는 선창가 어시장을 좋아하게 되었다. 생선 비린내가 자욱한 그곳에는 마지못해 살아가는 인간의 운명 역시 뒤섞여 있었고 나는 시장 골목에서 시간을 토막 내며 생선을 파는 사람들, 외롭고 누추한 인간들의 삶과 마주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가버린 어느 날 고향을 잃고 우정을 잃고 사랑마저 잃어 버리고 강가에 홀로 섰던 적이 있었다. 구름 사이로 영롱한 빛이 강을 향해 비치고 있었다. 그 빛과 마주하며 초췌한 낯빛의 어린 짐승이 비린내나는 바닷가에서 존재자의 눈을 뜨기 시작했음을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개별 자아로서 존재자가 세계의 현재성과 실존성을 인식한다는 것이 곧 세계와 사람이 존재한다는 의미를 알게 된 것이다.
어시장의 비린내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음을 발견함으로써 나는 존재의 타자성이라는 피상적인 인식에 다가갈 수 있었다. 나는 그들에게, 그들은 나에게 다른 운명으로서 타자였으나 그들에게 나는 분명히 냉혹한 현실이었고, 과거의 그들은 내게 하나의 환상이었다. 그 실존의 현재성이 서로를 관통하는데는 무려 25년이 넘게 걸렸던 것이다.
열병을 앓던 사춘기였다. 지칠 때까지 걸었고 그 걸음 속에서 나는 자신을 잃었고 또 되찾기도 했다. 온전하게 나 자신으로 있음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그로부터 수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비가 내린 뒤 질척이는 시장 바닥의 비린내는 고약했다. 그 시절 고약한 비린내 속에서 나는 사람의 향기를 맡았던 것이다. 지치고 병들고 고달픈 인간 존재의 땀과 한숨과 눈물범벅이 된 그들의 삶이 흘러 질퍽거리는 더러운 바닥에서 피어난 삶의 향기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야 인간의 숨결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 바닥을 딛고 서서 자신의 온전함—당시 나는 온전함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다—을 미미하게나마 처음으로 느꼈던 것이며 그 이후 떠도는 외롭고 여린 짐승의 허물을 조금씩 벗을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빛내림! 그것은 인위적으로 바다를 메워 해류의 숨통을 막아버린 매립지 저 멀리 일렁이는 파도 위로 떨어지는 신비였다. 그 순간은 의식 밖으로부터 ‘보여짐’을 수동적으로 인식하는 어리석음에서, 능동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뜰 수 있었던 동기가 되었던 사건이었다. 나는 그 순간을 시간 속에서 버무리며 인식의 객체에서 주체로, 인식을 신비의 영역에서 이해의 영역으로 가져올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어리고 철없는 짐승, 준비되지 않은 미성년의 어리석음을 향해 버겁게 다가온 힘겨운 체험은 그 이후, 소음과 매연이 날리는 세계에서 잔인한 언어들이 인간 존재의 가슴을 베고 지나다녀도 아무렇지도 않게 살아갈 수 있게 했다. 인간 사회라는 인식하지 못하는 무리들의 생태계를 떠도는 외로운 짐승들의 삶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인간의 운명이 수천만번 바뀌어도 인간 존재의 한계는 변치 않는다. 인간 존재는 그 어느 것으로부터도 극복하거나 초월할 수 있는 능력을 배울 수도 없고 또 그러한 신의 은총은 얻을 수가 없다.
나는 이제 중년에 접어들어 가끔 마주치는 빛내림을 마주하며 여리디여린 어린 짐승의 시간을 떠올리며 어쩌면 저것은 화사한 빛의 내림이 아니라 무언가 멀리 떠나보내는 환송의 환영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갖기도 한다. 또한 나의 생각들이 그것들 모두를 등지고 걸어가는 인간 존재를 위한 감상적인 위로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회의하게 된다.
번민, 회의, 세계에 대한 염증. 이 모든 것을 거부할 수 없는 것이 나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의 시간이 엮어낸 순간들의 무게감만큼 변두리 진 곳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한 인간의 운명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는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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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식은 과연 인간 존재를 고유한 존재자답게 운명 지울 수 있는가? 나는 여전히 근본적인 의문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빈곤한 지성의 한계 한가운데 높은 하늘을 향해 기다란 솟대라도 세우면 뭔가 새로운 영감이 빛처럼 내리지 않을까 하는 소망은 늘 간절하다.
하늘이 차가울 때 세계는 진실을 드러낸다. 차가운 하늘 아래에서 인간은 야수의 본색을 드러내며 그러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살아가는 문명인의 탈을 쓴 미개인이 된다. 우리는 진심이라는 것을 잃어버리고 외로워하는 인간들의 거대한 도시 속에, 물질문명의 감옥에 갇혀 있다.
역설이다. 인간은 스스로 자랑하는 문명을 창조했으나 그 피조물은 자신을 창조한 인간의 의식을 가두었다. 그리고 문명이 번성할수록 인간성은 타락하고 있다. 우리는 ‘미래’와 ‘희망’을 말하며 ‘낙관주의자’를 자처하지만 그러나, 결국에는 ‘진심을 잃어버린 인간이란 짐승’들의 도시 어느 길목에서 배회하며 버림받은 외로움을 안고 깊은 자기연민에 빠지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그냥’ 문명의 부속품이거나 그것을 움직이는 세력의 힘에 기꺼이 부역하는 자기 자신을 버린 무리 속의 한 마리 짐승이 되어버린다.
이렇게 우리는 길모퉁이를 돌아설 때마다 영혼을 얼어붙게 하는 차가운 시선을 향해 인간성을 구걸하며 쓸쓸하게 생의 순간들을 이어가고 있다. 간혹 이를 거부하고 저항하는 인간 존재의 삶과 인식의 성장은 조금씩 더디게 이어지는 반면, 문명은 그에 내재된 야만과 함께 급속도로 비약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존재가 현대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부속품으로 전락했다는 사실은 그렇게 새삼스럽지 않다. 어쩌면 우리는 인간의 운명을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능력을 인간성과 더불어 상실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 섬뜩한 진실은 우리로 하여금 과연 우리는 과거에 어떠한 인간이었으며 미래에는 어떠한 존재로 남아있게 될 것인지 회의하게 한다.
세계의 한쪽에는 상처입은 인간 존재들이 눈물을 흘리고, 다른 쪽에서는 이들을 노리는 야수들이 으르렁거리고 있다. 어디를 가나 인간 존재는 외로움 속에서 이러한 위협을 견디지 못하고 맹수들의 무리 속으로 섞여 든다. 존재자로서 비참이라는 인간의 진실을 외면하기 위해, 그리고 탐욕의 덩어리로부터 떨어지는 마약 같은 유혹을 떨쳐내지 못해 인간은 더욱 비참해지게 된다.
미래와 희망을 말하기에는 우리는 들개나 하이에나처럼 인식하지 못하는 짐승들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들 인식하지 못하는 짐승들은 절대로 무리 지지 않고서는 살아가지 못한다. 개체 한 마리 한 마리로는 어디에도 나서지 못하고 심지어 신음조차 내지 못한다. 아무리 인간 역시 동물이라고는 하나 개별 고유성이 전제되지 않는다면 다른 동물과 어떻게 다르다고 할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성과 지적 능력을 지닌 비열하며 잔혹한 인간은 틀림없이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라면 그것들을 비난하기보다 저 처연하도록 애처로운 무리 진 짐승들을 인간이 보살피지 못하였음을 탓해야만 한다. 야수들에게 굴복하거나 맞설 일은 아닌 것이다. 이미 그들은 인간의 존엄을 거부한, 신이 누리지 못하는 인간 존재의 신성을 스스로 포기한 짐승들이기에 우리는 그들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런 연후에 맹수들은 처단되어야 한다. 맹수는 먼저 연민으로 길들인 이후에야 운명을 거두어 들일 수 있다. 한때 인간이었던 맹수들에 대한 최후의 연민은 그러한 것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생명체와 인간 존재로서의 존엄은 품위를 잃지 않을 수 있고 우리는 인간 사회의 정의를, 맹수들은 그들 생태계의 정의를 세울 수 있게 되는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