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여행자의 시간 | 개정판> 연재 #35
...어둡고 차가운 심연의 끝을
죽음이라는 낱말 하나로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날이 새고 해가 뜬다고 해서 곧바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듯
한 존재자의 일생이 끝난다고 하여
모든 삶의 과정들이 애당초 없었던 것처럼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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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심과 탐욕, 무관심과 냉담, 그리고 정의롭거나 옳은 체 하는 위선적이며 역겨운 맹목적인 힘이 지배하는 세계가 인간의 사회일 수 있다. 이것은 염세적 세계관이 아니라 진실에 입각한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는 이 세계에서 일어나는 부조리한 사건들과 그로 인해 발생되는 사태가 현실 현상임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그것들과 마주할 수 있고 개별화된 인간 존재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냉철하게 헤쳐나갈 수 있다. 또한 부조리들을 걷어 치워야 한다는 저항의 의지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오늘날 벌어지는 인간성의 몰락은 신의 권능에 대한 반역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인간의 신에 대한 반역은, 그리고 탐욕은 신의 전지전능한 권능에도, 그것을 초월하는 권능에도 만족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그들은 국가를 만들어 신을 대체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전락시키려 한다. 위대한 국가를 창조하고 국가를 소유를 위한 울타리로 삼는 권력자가 되어 마치 합리적인 제도를 통하는 것처럼 기만하여 인간 위에 군림하고자 하는 것이다. 사실 어떤 면에서 국가는 대부분은 권력자들의 탐욕을 채워주고 일부분은 공공을 위해 기능한다. 때문에 그 권력을 영속시키고 문명을 발전시키기 위해 착취하고 평화를 위해 전쟁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대부분 인간 존재들의 운명은 어떤 면에서는 분명 문명의 울타리 안에 갖혀서 살아간다. 문명이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 인간이 문명을 지탱하기 위한 소모품으로 쓰이는 것이 인간 운명의 진실일 수도 있다. 국가와 문명이 인간 존재를 위해 헌신하지 않을 때 그것은 필연적으로 종말을 맞이 하거나 그에 준하는 전환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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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을 잡은 인간들의 신에 대한 반역은 불순종이란 원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인간 존재의 존엄 자체를 지배하기 위해 신의 권능을 탈취한 반역을 인간원형의 불순종이라는 단순 개념으로 정의할 수는 없다.
부정한 그리고 정통성이 없는 반역자일수록 절대 권력을 통해 위대한 국가를 창조하고자 한다. 이들은 국가와 사회 체계를 이루는 본질적 가치를 파괴해서라도 자신의 권력을 영속시키려 한다. 또한 폭압적 권세를 앞세워 물질문명의 발전에 집착한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들이 말하는 물질문명의 발전은 자기 파멸의 주춧돌이 될 뿐이다. 그들의 탐욕에 의한 국가 체계의 파괴에 앞서 그들의 세력이 물질문명의 이해 관계 앞에서 부정과 분란으로 먼저 파멸한다는 것을 인류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인간이 만든 권력의 구조로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게 하고, 인간 위의 인간이 된 지배자의 속성은 역사 속에서도 그러했다. 또한 국가 체계를 운영하는 합법을 가장한 사악한 힘은 여전히 인간 존재의 삶의 터를 빼앗고 파괴하는 것도 변함이 없다. 그러나 그럼에도 인간 존재 존엄성의 본질은 언제나 온전하고 완전한 채로 손상되지 않는 것 역시 변함이 없다. 그렇게 침몰하지 않고 역사의 기록—그것이 진실이든 허구가 가미된 것이든—을 남기고자 하는 인간 운명의 의지는 신의 신성을 닮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예술가들이나 시인들이 자기 고백을 통해 창조한 작품을 통해서도 이 신성을 미미하게나마 엿볼 수 있다. 그들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향기 속에서만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고통의 본질 저편의 비참의 세계를 통해 아름다움을 창조했다. 그들은 관념 속에 각인된 것만을 시로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향한 그들의 번민으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한 것이다.
인간은 존재자와 존재하는 순간이라는 시간을 소모하면서 물질 공간과 의식의 공간에서 새로운 세계를 창조할 수 있다. 누구에게나 그러한 기회—이 기회는 사회적인 것이 아닌 운명적인 것이다. 생명으로 태어나는 모든 인간에게 이 기회는 자연적으로 부여된다—는 주어진다. 기회는 살아가는 매 순간순간의 시간으로 부여된다. 이 기회를 운명으로 한정하는 것은 존재자 자신이다. 그는 이러한 어리석음의 연속으로 시간을 보내다 결국 중요한 사태가 발생했을 때는 그것을 회피하는 비겁한 인간이 되고 타자를 비난하고 탓한다.
나는 많은 인간들의 더럽고 야비한 모습을 보았다. 좋은 날 한없이 좋던 사람이 해가 저물고 어두워지면 얼마나 탐욕스러워지는지, 또 얼마나 위선적으로 돌변하는지 내가 만났던 그들과 나 자신을 통해 인간의 속성을 잘 알고 있다.
수많은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숨 쉬며 눈뜨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 모든 인간 존재의 운명은 깊은 심연 속의 진실을 향해 나아간다. 그러므로 어둡고 차가운 심연의 끝을 죽음이라는 낱말 하나로 단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날이 새고 해가 뜬다고 해서 곧바로 새로운 하루가 시작되는 것이 아니듯 한 존재자의 일생이 끝난다고 하여 모든 삶의 과정들이 애당초 없었던 것처럼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인간 존재는 그의 자아를 통해서만 저 멀리 우주 속에서 폭발하는 초신성의 빛을 목격하듯 운명의 참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존재자가 타자에게 인간으로서의 의미를 물려주고 이어가는 삶의 의미가 아닌가 나는 생각한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