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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점은 C-, 하지만 나는 다시 떠날 수 있게 되었다

by 파도

내가 고등학생 시절 부모님은 내게 목표하는 대학을 가면 여름방학에 유럽 배낭여행을 보내주겠다는 제안을 하셨다. 정말 열심히 했고, 운도 따라서 목표했던 대학에 진학할 수 있게 되었다.

여름 방학이 되자 나는 부모님의 약속처럼 유럽 배낭여행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말이 배낭여행이지, 캐리어를 끌고 여행사에서 다 예약해 준 대로 일정에 맞추어 지도 보고 찾아다니기만 하면 됐기 때문에 아주 어렵지는 않았다. 런던으로 들어가서 나라와 도시별로 2-3일씩 머물며, 10~11개국 정도를 ‘찍먹’하고 프랑스 파리에서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는 여행이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던가. 나는 그렇게 많이 알지는 못했다. 세계사에 별로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내게 유럽의 오래된 건물들은 세계사 덕후들만큼의 감흥을 받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구 반대편 나라에서 한 인류가 우리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에는 매우 큰 영감을 받았다. 전 세계 사람들이 모두 구경을 오는 동네에서 식당을 하는 주인아저씨에게,

“당신은 여기에서 가만히 일해도 전 세계 사람들을 모두 볼 수 있으니 너무 행복하겠어요.”

라고 나는 말했다. 로마의 어떤 식당이었던 것 같다. 중년의 퉁퉁한 체격의 마음씨 좋아 보이는 아저씨는 약간 미묘한 표정을 지으며,

“글쎄, 전 세계 사람들은 저렇게 행복하게 돌아다니는데 나는 이 식당에만 매여 있어서.”

라고 답했다.

그렇다. 나에게는 여행이 일탈이지만, 이곳의 사람들은 이 것이 일상이다. 여행이라는 것은 다른 사람들의 일상 속에 들어가서 그들의 삶을 배우고, 다시 나의 일상으로 돌아가 새로운 삶의 방식을 배우는 것이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다.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지만, 프랑스 파리는 내게 상당히 깊은 인상을 주었다. 웅장한 문화유산들을 지녔지만 무언가 자유로워 보이고, 권위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뭔가 개방적이고 여유로운 분위기. 아주 바빠 보이지만 느긋한 것 같은 이들은 나에게 ‘이 사람들은 어떤 생각이나 마음가짐, 태도로 삶을 살아갈까?’ 하는 호기심을 갖게 하였다.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이 그렇지만 나도 상당히 성격이 급한 편이다. 무언가 하지 못하면 안달하고, 무언가 이루기 위해서 매일 아등바등하는 등. 하지만 프랑스를 다녀오고 나서 좀 더 느긋하게 지금 이 순간을 바라보는 자세를 갖게 되었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 프랑스에서 본 프랑스 사람들은 매 순간을 매우 집중해서 살아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항상 나의 미래, 나중을 생각하며 지금을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즐기지 못하는 기분이었는데, 이 사람들은 매 순간 내 옆에 있는 사람, 내 앞에 보이는 풍경, 내게 당장 들리는 음악과 먹는 음식에 감사하고 즐길 줄 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한국으로 돌아와서 다시 학교 수업을 들었다. 1학년이었기 때문에 교양수업위주로 많이 들었는데, 프랑스에 관한 수업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영화와 관련된 수업도 듣게 되었다. 당장에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과목들이지만 순수하게 나의 ‘교양’을 위해 흥미로서 들었다. 프랑스 관련 수업은 재미있었고, 프랑스에 오래 살고 오신 교수님은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에 대해서 많은 지식을 전달해 주셨다 (과목명 자체가 ‘프랑스의 문화와 예술’ – 일명 ‘프문예’였다). 프랑스에 살다가 한국에 돌아오니 얼마나 빡빡한지, 사고방식의 차이를 설명해 주셔서 내가 받았던 느낌이 맞았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수업은 프랑스와 직접적 연관은 없었지만, 예술에 관심이 생겼달까. 원래도 이런 예체능을 모두 좋아하는 나였지만 고등학생 때까지는 배워볼 기회가 없었기에 한번 듣게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영화 수업에서 영화 한 편을 보고 시퀀스를 분석하고 영상촬영 기법이나 감독의 의도 등을 분석해서 쓰는 과제를 하게 되었다. 어떤 영화를 볼지 고민하던 차에, 모 포털사이트에서 단편 영화 몇 편을 인터넷에서 무료로 배포하고 그 영화에 대한 비평문을 공모하는 행사를 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어차피 과제도 해야 하고 짧은 영화를 여러 번 보며 분석하는 것이 필요했기 때문에 공모전 취지에도 맞을 것 같았다.

영화는 8분짜리로, 모두가 거꾸로 걷는 세상에서 누군가 갑자기 앞으로 걷는 시도를 했고, 모두가 말리고 방해했지만 결국에는 앞으로 가는 세상을 만든다는 식의 영화였던 것 같다. 나는 아주 열심히 과제도 하고 공모전도 준비했다. 그리고 기말고사를 봤는데, 영화수업의 학점은 C-. 솔직히 단순 암기를 굉장히 싫어해서 과제는 열심히 했지만 어떤 용어를 외우고 하는 것들이 너무 싫어서 공부를 안 했더니 학점이 C-로 나온 것이다.

기숙사에서 컴퓨터로 학점을 확인하고는, 마침 공모전 결과가 발표되었다고 메일이 와서 결과를 확인했다. 결과는 1등. 공모전의 1위 상품은 프랑스 여행권이었다. 비행기 항공권과 숙박을 제공해 주고 기타 경비는 내가 내고 가는 것이었다. 제세 공과금 30만 원 정도는 내야 받을 수 있다고 했는데, 기특했는지 부모님이 30만 원을 흔쾌히 내주셔서 공모전 상품을 받아한 학기만에 다시 유럽으로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내가 다시 돌아가고 싶어 했던 그 프랑스에!

그리고 영화 과목 교수님께 메일을 보냈다.

‘교수님, 제가 교수님 수업을 들으며 영화 비평문 공모전을 나갔는데, 1등을 하게 되었습니다. 너무 감사합니다. 이렇게 외부 공모전에서 인정도 받았는데 학점을 조금 조정해 주실 수 있을까요?’

지금 생각하면 좀 뻔뻔할 수 있지만, 나름대로는 영화 관련 전국 공모전에서 1위를 했는데 어느 정도는 인정해줘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답장이 왔다.

‘먼저 축하합니다 학생. 비평문 읽어보니 잘 썼네요. 약간이지만 성적을 상향 조정하겠습니다.’

결과는 ‘C+’로 아주 약간 올라갔다. 별로 대세에 변화가 없는 수준이었지만 안 받은 것보다는 나으니까.

그렇게 나는 한 학기 만에 두 번째 프랑스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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