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뜨끈한 국물이 생각날 때가 있다.
얼큰한 그런 국물 말고 부드럽게 속을 달래줄 수 있는, 그런 국물 말이다.
오랜만에 한가한 주말, 냉장고에 뭐가 있다 들여다보았다.
냉동실에는 덩어리 소고기를 사다가 구이용으로 손질하고 남은 자투리 고기들을 국을 끓여 먹을 요량으로 비닐봉지에 둘둘 말아 넣어둔 덩어리가 있었다. 부챗살 덩어리에는 근막이 있고 가운데 힘줄이 두꺼워서 구이용으로 몇 덩이하고 나면 최소 1/5 정도는 근막이나 힘줄이 붙어있는 자투리 고기가 생기기 마련이다.
근막이나 힘줄은 그냥 구워 먹으면 질기지만, 약한 불에 오랫동안 끓이면 부드러워지고 맛도 좋다.
국물 내기 좋다는 생각이 들어 냉동실에서 꺼내었다.
한번 물을 끓여서 얼어서 엉겨 붙어있던 고기들이 모두 떨어질 때쯤, 핏물이나 불순물, 기름 등이 잔뜩 나왔다. 물은 모두 버리고 찬물로 씻어냈다.
불순물이 붙어있는 냄비도 다시 깨끗이 씻어서 새로 물을 붓고 한번 익힌 고기를 넣고 끓인다.
바쁠 때는 부드러운 고기들을 살짝 볶듯이 해서 국물 요리로 쓰지만, 이렇게 한가한 주말에는 시간이 걸려도 천천히, 귀찮지만 하나하나 재료들을 살펴보며 생각하며 요리를 하는 시간도 즐겁다.
냉장고에 어떤 야채들이 있는지, 어떤 맛을 먹고 싶을지 생각한다.
우선은 알배추가 한 포기 반 정도 있다. 다 썰어서 넣으면 샤부샤부에 들어간 배추처럼 맛있게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손질해 놓은 대파도 하얀 부분이 온전하게 두 대가 있다. 어슷썰기 해서 넣어 익혀 먹으면 맛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주방 옆 팬트리 공간에 재료가 뭐가 있는지 들여다본다. 초록색 싹이 살짝 나왔지만 아직은 알이 튼실한 양파가 하나 있다. '카타마루'라는 품종이라고 양파망에 쓰여있는데 그냥 하얀색 양파다. 알이 작지만 단단하니 상태가 좋다.
양파는 얇고 길게 썰어 둔다.
알배추 한 포기 반 - 진한 초록잎은 없이 거의 노르스름한 잎만 붙어있는 고소한 맛과 단맛이 잘 나올 것 같이 생겼다. 겉절이로 먹어도 맛있겠지만, 이런 겨울에는 국물이다.
대파 두 대와 양파 한알, 너무 강하지 않게 소고기 국물의 느끼함을 잡아줄 정도의 시원한 맛을 우려낼 수 있을 것 같다.
간은 어떻게 할까?
된장을 부드럽게 풀어볼까도 생각했지만 오늘은 된장의 텁텁한 느낌은 당기지 않는다.
냉장고에서 참치액을 꺼내 두어 스푼 넣고 맛술을 두어 스푼 넣었다. 얼마 전 일본 여행을 다녀와서 그런가 오늘은 일본 느낌의 국물을 좀 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소고기 국물에 참치액까지 하면 너무 과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의외로 잘 어울린다.
다만 오늘은 너무 자극적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서 마늘이나 생각 등 강한 향은 좀 피했다.
대신 굴소스를 약간만 넣었다.
국물을 먹을 생각인지 배추를 먹을 생각인지 모를 정도로 냄비는 배추로 가득 찼다. 뚜껑을 닫아두고 배추가 푹 익으면 국물은 더 많아질 거다.
그래야 배추에 있는 단 맛이 우러나와서 소고기 국물과 어우러져 내가 생각했던 그 부드러운 국물이 완성될 것이다.
국물에 우동 면을 삶아서 먹어도 맛있을 것 같다. 마치 일본의 니꾸우동처럼.
벌써 한 시간은 넘게 끓였을까, 집게로 고기 덩어리를 들어 가위로 먹기 좋은 크기로 썰어놓는다.
고기 손질할 때는 그냥 버릴까 싶었던 부위들도 훌륭해 보인다.
오늘은 후춧가루도 뿌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익힌 고기와 배추는 샤부샤부처럼 참소스에 찍어먹어도 맛있겠지만 오늘은 그냥 부드럽게 익은 배추와 고기 그대로를 국물과 함께 즐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물 맛을 봤다.
혹시라도 싱거울까 싶었는데 간이 딱 맞다. 살짝 단맛이 부족한 느낌이지만 배추가 더 익으면 내일은 정말 완벽한 국물이 될 것 같다.
아직은 배가 고프지 않아 한 두 시간 더 약한 불로 끓였다.
냉장고와 냉동실에 자투리 고기와 자투리 야채들을 모두 털어 맛있는 요리를 했다는 뿌듯함도 마음을 편하게 했다.
사실 이 집에서 살 날이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새롭게 이사 갈 집으로 모든 짐을 옮기기 전에 냉장고에 식재료들은 최대한 소진하고자 하는 생각도 좀 있었다.
하지만 남아있는 재료가 이렇게도 완벽한 조합으로 남아있다니.
큰 국그릇에 부드럽게 익힌 배추를 가득 담는다. 고기도 몇 점 함께 국물도 자박하게 담았다.
배추는 아주 맛있게 부드럽게 입안에서 녹듯이 부서지며 생각했던 그 맛이 났다.
아까 살짝 달큼한 맛이 부족했다고 느꼈지만 이제는 완벽한 맛이다.
오늘은 밥도 없이 배추로만 배를 채우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국물도 부드럽고, 후추나 마늘을 넣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고기도 한번 끓여내서 씻어서 그런지 잡내도 없이 맛있다. 맛술을 넣고 끓여서 그런가.
그런 날이 있다. 그냥 부드러운 국물이 생각나는 그런 날.
오늘은 그런 날이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