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20년 전보다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나
지금 되돌아보면 2002년 한일월드컵의 성과가 불가능했던 것만은 아니다. 처음부터 그것은 기적이 아니라 우리가 월드컵에 들였던 정성과 열정에 상응하는 결과였다. 축구 좀 한다는 유럽국가들이 2002년 5월 UEFA챔피언스리그를 마치고 대표팀을 소집해 부랴부랴 훈련에 들어갔던 반면, 우리나라는 1년 반전부터 선수들을 차출해 수시로 장기합숙 훈련에 돌입했다. 물론 그 대가로 K리그는 한동안 파행 운영되었고 각 구단은 걸핏하면 대표선수들을 내어줘야 했지만, 그 누구도 거기에 토를 달지 않았다. 이렇게 비정상적인 지원을 하고서라도 반드시 월드컵에서 성과를 거둬야 한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시절 16강 진출에 대한 염원은 IMF 시대 청산에 버금가지 않았나 싶다.
우리나라가 축구 국가대표팀에 전폭적인 지원을 한 배경에는 위기감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아시아 처음으로 열리는 월드컵에서, 그것도 일본과 공동개최하는 대회에서, 조별예선에서 탈락한다면 그보다 더한 국제적 망신은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실제로 월드컵 개최국이 조별예선에서 탈락한 적은 없다는 전례와 일본 국가대표팀의 경기력이 향상되고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더욱 초조하게 만들었다. 애초부터 이 사정을 잘 알았던 거스 히딩크 감독은 훈련시간을 무제한으로 보장하고 전 세계에서 전지훈련과 평가전을 치를 수 있도록 요청했다. 우리나라는 그것을 재고 따지고 할 여유가 없었다. 16강을 위해 모든 자원과 기회를 밀어주는 것밖에는.
히딩크의 마법이 처음부터 펼쳐졌던 것은 아니다. 그는 그때까지 월드컵 무대에서 단 1승도 건지지 못한 한국축구의 습관을 바꿔놓겠다고 호언장담했으나 당장 우리 눈앞에 보이는 경기결과는 0:5이었다. 프랑스와 0:5 패배, 체코와도 0:5 패배. 그에게는 오대영이라는 치욕스러운 별명이 붙었다. 언론은 요동쳤고 여론은 들끓었다. 문득 4년 전 프랑스월드컵이 떠올랐다. 멕시코에 1:3으로 깨지고 네덜란드에는 0:5로 박살이 난 후 차범근 감독은 대회 도중 경질되는 수모를 당했다. 그가 공항에서 나오는 순간, 플래시는 섬광탄처럼 터졌고 다음 날 스포츠신문들 1면에는 참담한 표정을 짓는 그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한국축구의 전설적 인물이었던 그를 향해 사람들이 쏟아낸 분노는 지금도 생생하다. 그것은 IMF로 가뜩이나 삶도 어려운데 스포츠마저 우리를 화나게 해서야 되겠냐는 고달픈 화풀이였다.
만일 히딩크 감독이 한국인이었다면, 혹은 네덜란드 국가대표팀과 레알 마드리드 감독이었다는 번듯한 타이틀이 없었다면, 그는 여론의 뭇매에 못 이겨 경질되고 평생 실패한 감독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썼을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더라도 한국어에 유창했다면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직접 대면하고 버텨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여하튼 히딩크는 성공했다. 한국사에 길이길이 남을 업적을 남겼고 모든 국민에게 존경받는 인물이 되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외국인이었기에 가능했다. 유럽 축구가 선진적이어서라기보다, 우리 사회에서 한 발 떨어진 이방인의 눈으로 현실을 냉철히 관찰할 수 있었던 덕분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한국축구가 체력은 뒤지지 않되 기술에서 밀릴 뿐이라고 생각했다. 호나우두, 지단 같은 선수들의 현란한 드리블과 마르세유턴을 우리 선수들에게서는 볼 수 없으니.
그러나 히딩크의 의견은 정반대였다. 한국 선수들처럼 양발을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선수는 드물다, 기술적으로는 유럽에 뒤지지 않는다, 문제는 후반 들어 급속히 떨어지는 집중력과 체력이다. 그는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피지컬 훈련을 강조했다. 월드컵을 반년 앞두고서는 레이몬드 베르하이옌 피지컬 코치를 불러들여 그 시스템을 완성했다. 전폭적인 지원 아래 원하는 대로 판을 짜고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 이것은 16강이 절실한 대한민국이 거스 히딩크에게 보장해 준 권한이자 특혜였다. 우리나라 감독이나 선수들이 여론과 인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현실을 감안하면 더더욱 그렇다. 모든 게 실력으로 좌우되는 듯해도 스포츠 역시 외부 요인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쩌면 외국인 감독이 갖는 장점이 이런 데에 있는지도 모른다.
2010년 2월, 나는 캐나다 밴쿠버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것은 나의 첫 국제선 비행기 탑승이었다. 수속과 탑승에 대한 개념이 없었던 탓에 늑장을 부리다가 이름이 공항에 울려 퍼진 뒤에야 부랴부랴 뛰어가 비행기에 올라탔다. 하지만 내 마음은 한껏 부풀었다. 첫 해외여행에 첫 동계올림픽. 이를 위해 과외와 인턴으로 모은 돈을 탈탈 털었단 걸 항공사도 알았는지 자리도 기가 막히게 좋았다. 1A. 맨 앞자리도 행운인데 심지어 가운데 자리도 비었다. 그 자리가 얼마나 좋은 자리였는지는 이후 다른 비행기를 타보고서야 알 수 있었다. 통로석에는 한 어르신이 탑승하셨다. 내가 연신 창밖을 내다보니 그 어르신이 말씀을 건네셨다.
“캐나다는 처음 가보나?”
“네. 해외여행도 처음입니다”
“대학생인가보네”
“네. 그런데 요즘은 한 언론사에서 인턴기자를 하고 있습니다”
“취재?”
“아니요. 여행입니다. 이때가 아니면 동계올림픽을 언제 볼까 싶어서...”
알고 보니 그 어르신은 쇼트트랙 국제심판이셨다. 어린 시절 전이경과 김동성의 압도적인 경기를 보며 쇼트트랙의 매력에 흠뻑 빠졌던 나는 가슴이 웅장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동계올림픽도 쇼트트랙을 보러 가는 거였는데 그 종목 심판과 동석하게 되다니. 뭔가 의미 있는 여행이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나는 동계올림픽에 대해 궁금한 점들을 이것저것 여쭤보았다. 어르신 역시 그간 고충이나 고견들을 허심탄회하게 말씀해주셨다. 10시간이 넘는 비행시간 동안 우리는 잠깐 잔 시간을 제외하고는 꽤 많은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안현수는 단연 뜨거운 화두였다. 토리노 동계올림픽에서 3관왕이나 차지한, 명실공히 세계 최고의 선수가 나서지 못했던 동계올림픽. 나는 안현수가 국가대표에 포함되지 못한 게 가당키나 하냐고 토로했다. 어르신은 씁쓸한 입맛을 다시며 말씀하셨다.
“아마 앞으로 쇼트트랙은 빙상연맹 파벌 때문에 큰일이 날거야”.
그리고 그의 예상은 4년 뒤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현실이 되었다. 효자종목이라던 쇼트트랙에서 남자 국가대표팀이 단 한 개의 메달도 따지 못한 것이다. 반대로 파벌에 밀려 러시아로 귀화한 안현수는 보란 듯이 금메달 3개와 동메달 1개를 따내며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 국민 중 그 누구도 빅토르 안이 된 안현수를 배신자라고 하지 않았다. 그것은 신의를 저버리고 나라를 떠난 선수의 메달획득이 아니라, 탐욕스러운 카르텔에 희생된 영웅의 귀환이었기 때문이다.
2002년 축구 국가대표팀이나 안현수를 보면, 또는 박태환이나 김연아를 보면, 세계무대에서 좋은 성과를 낸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가 생각하게 된다. 그것은 단지 실력만 요하는 게 아니다. 단기적으로 눈에 띄는 결과물을 만들어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동시에 장기적인 그림도 그려야 한다. 내부정치에도 능해야 한다. 여론의 눈총과 연맹·협회의 음해, 압박, 푸대접 속에서 기량을 펼쳐 나가야 한다. 이 모든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고 월드컵 4강이나 올림픽 메달을 이뤘을 때, 그것이 더욱 빛날 수는 있겠지만 그런 현실을 바람직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에게 <하멜표류기>로 잘 알려진 헨드릭 하멜은 히딩크 감독보다 347년 먼저 한반도를 밟았다. 1653년 여름, 일본 나가사키로 향하던 스페르웨르호가 제주도에 난파하면서부터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하멜 일행이 1666년 배를 타고 나가사키로 탈출하는 날까지, 무려 13년 동안 그들로부터 어떠한 정보나 교훈도 얻지 못했다. 심지어 하멜의 국적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남쪽에서 온 오랑캐라고 여겼을 뿐이다. 반면 하멜 일행이 나가사키에 도착하자 에도막부는 조선으로부터 탈출해 온 이들에게 하루에만 54개의 질문을 던지며 조선의 지리와 풍습, 군사 현황 등을 샅샅이 파악해나갔다. 이방인들이 전해준 교훈을 얻지 못한 대가는 훗날 비참하고 혹독하게 돌아왔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거치며 히딩크 감독이 남기고 간 것은 비단 월드컵 4강이라는 성적과 선수들의 유럽진출만이 아니다. 400여 년 전의 하멜처럼, 그는 당대 한국 사회를 이방인의 눈으로 바라본 사람이었다. 이제는 한국 사회가 단기적인 결과에만 집착해선 안 된다는 것,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서는 참고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 성과를 내는 과정이 수직적 위계질서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것, 그리고 파벌이나 인맥보다는 실력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 화려한 축제의 이면에 그가 진정으로 남기고 간 메시지는 이런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뜨거웠던 6월도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는 이때, 과연 우리는 얼마나 더 성숙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