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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뜨끈한 콜라 Dec 31. 2023

동아시아 삼국의 인물론② 이자성 - 장락문

장락문의 이자성과 명나라 멸망의 원인 임진왜란

장락문(长乐门) 앞에 선 이자성의 농민군     


명나라 말기 농민군 지도자 이자성은 시안부에 입성하면서 동문인 장락문(長樂門)의 현판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황제를 길이 즐겁게 하려면, 백성은 길이 고통받아야 하지 않겠는가!

如果让皇帝长乐百姓就要长苦了     


이 말을 들은 부하 장수들은 장락문의 누각을 불태워 버렸습니다. 만약 이자성의 나라가 패망하지 않았더라면, 황제의 애민정신을 기리는 의미로 불탄 그대로의 모습으로 오랜 시간 방치되었을 것입니다.    

  

명나라 시안부 성벽 구조도 2021.11.21.촬영


1643년 시안을 점령한 이자성은 다음 해 정월 시안을 수도로 하여 농민의 나라 대순(大顺) 건국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진군하여 순식간에 베이징을 함락시켰습니다. 명나라 16대 황제 숭정제(崇祯帝)는 자금성 북편의 경산에서 목을 매고 자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불과 같은 해 4월 25일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농민군은 산해관을 넘어 온 도르곤의 팔기군과 오삼계의 병력에 밀려 41일 만에 베이징을 잃고 패퇴하였고,  30대 후반의 이자성은1645년 허무하게 생애를 마무리하고 말았습니다.     


장락문 관통도로. 2024. 2. 27. 촬영


영화 ‘신세계’에도 ‘이자성’이라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신세계는 이정재 배우의 표정 연기가 유난히 기억에 남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를 연출한 박훈정 감독은 2013년 SBS와의 인터뷰에서 “캐릭터의 이름을 정하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면서, “정청은 중국 문화혁명의 주역이자 모택동의 부인인 강청(江靑)에서 따온 이름이며, 이자성은 명나라 말기 농민반란을 일으킨 인물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영화 속 ‘이자성’과 역사 속 ‘이자성’은 참 닮은 부분이 많은 듯합니다.  

    

역사 속 이자성은 섬서성 황토고원의 가난한 동네인 미지현(米脂县)에서 태어났습니다. 21세가 되던 해에 은천역참(银川驿站)의 역졸이 되었다가, 이후 감숙성 변방의 하급장교가 되었습니다. 상관의 부패와 식량 부족에 분노한 그는 굶주린 이들을 규합하여 봉기하였습니다.


이후 그는 왕가윤의 농민군에 합류하여 이인자였던 고영상의 오른팔이 되었습니다. 왕가윤와 고영상이 차례로 살해당하고 경쟁자였던 장헌충 몰락하자, 자연스레 그는 농민군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이자성은 농민군에게 규율을 강조하였고 그 결과 백성들의 민심을 얻었습니다. 그는 천재적인 전략과 터운 민심을 바탕으로 한때 그가 녹을 먹었던 명나라를 무너뜨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이징을 차지한 후의 그는 돌변하여 교만해졌으며, 일련의 판단 착오를 저질렀고, 신흥 청나라 군대에 대패하여 몰락하고 맙니다.     


장락문


영화 ‘신세계’ 속 이자성은 젊은 경찰관이었습니다. 그는 상관의 지시로 석동출이 이끄는 범죄조직 골드문에 잠입하였고, 이인자였던 정청의 오른팔이 되었습니다. 회장 석동출과 이인자 정청이 차례로 피살되자 그는 경쟁자인 이중구를 제거하고 홀로 골드문을 장악할 수 있었니다. 먼저 신의를 지키지 않은 것은 강과장(최민식 분, 명나라?)이긴했으나 강과장을 살해함으로써 경찰관으로서의 정체성을 단호하게 끊어낸 것은 본인 스스로의 의지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영화 마지막의 회상 장면에 나온 이자성의 싱그러운? 미소는 앞으로 그가 골드문 회장으로서 승승장구할 것을 암시하는 듯합니다.


만약 신세계 후속편이 나온다면 그 줄거리는 어떻게 될까요? 골드문의 회장이 된 이자성이 역사 속의 이자성처럼 냉철한 판단력을  폭주하게 되, 강과장을 대체하여 나타난 조과장(마동석 분, 청나라?)에 의해 어이 없이 몰락하게 되는 이야기가 펼쳐지지 않을까요?     


마오쩌둥은 이자성에서 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하였던 것 같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으나, 한학적 소양을 갖추었고, 모략과 책략에 능하며, 압도적인 조직 장악력을 갖춘 자. 농민을 사랑하는 농민군의 지도자. 그게 이자성이고 또 나다. 이렇게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마오쩌둥은 이자성의 과오도 눈여겨 보고 있었습니다. 그는 이자성이 저절렀던 실수를 반복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베이징 입성을 눈앞에 둔 1949년 3월 그는 동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는 이자성과 같은  식으로 베이징으로 입성하면 안 된다. 그는 입성하자마자 바로 변질되어 버렸.”

“我们不能像李自成进北京,一进城就变了。”

     

조심해라. 자본계급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자성처럼 되면 안 된다.”

“小心,不要中了资产阶级的糖衣炮弹,不要当李自成。”     


마오쩌둥의 이후 행적을 보면, 확실히 그가 이자성보다는 주도면밀했습니다. 덕분 이자성과 달리 마오쩌둥은 그가 간절히 바라왔던 농민혁명을 성공하고 천하를 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전 글에서 살펴보았던 덩샤오핑과 마찬가지로 마오쩌둥 역시 ‘지킬박사와 하이드씨’의 요건에 충족되는 인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명나라 멸망의 원인 - 임진왜란     


명나라 멸망의 원인을 하나하나 따져보자면 임진왜란 때의 무리한 원군 파병이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진왜란을 비롯한 이른바 만력삼대정(萬曆三大征)은 명나라 재정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습니다. 명나라는 떠밀리듯 다수의 관청을 폐쇄하거나 그 규모를 축소할 수밖에 없었고, 상당 수의 하급 관리들이 생계의 수단을 잃고 유랑하게 되었습니다. 들 중 상당수가 비적 또는 반란군의 간부 또는 지휘부로 흘러들어가, 심각한 사회 불안을 야기하였습니다. 국가의 경제 관리, 치안 유지, 식량 공급, 질병 예방 등 필수적인 기능이 차례로 마비되어, 밑바닥 백성들의 삶이 매우 피폐해졌습니다.     

 

젊은 이자성이 역참에서 해고되지 않았더라면, 아니면 하급 장교로 복무할 때 급료를 제때 지급받을 수 있었더라면, 아마 그는 농민군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도 아니면 백성들의 삶이 윤택했더라면, 이자성의 연설에 아무도 호응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는 굶주린 무리의 리더가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전쟁은 보통 나라와 나라 사이의 총력전입니다. 생존하려면 국가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야 합니다. 당연히 막대한 재정이 투입됩니다. 당나라 태종이 고구려 원정을 중도 포기하고 돌아간 이유는 그가 전쟁의 승리자가 될 자신이 없어서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원정의 장기화로 인해 초 계획했던 예산이 초과하여  초조해졌기 때문니다. 그는 대형 원정이 수나라 같은 큰 나라도 무너뜨릴 수 있음을 잘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주인공이 되겠다는 욕심부리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당태종이 현명했습니다. 먼저 무너진 건 고구려였습니다. 고구려는 수나라 문제, 양제, 당나라 태종, 고종으로 이어지는 중원 황제들의 연이은 침공으로 국가의 역량이 점차 소진되어 갔고, 결국 멸망에 이르고 말았습니다.   

   

명나라 군대가 임진왜란 원정 중 전황의 결정적인 순간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이유도, 미국이 북진을 주장하는 이승만의 요구를 무시하고 휴전협정을 체결한 것도 당태종이 중도에 귀국한 것과 같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그들은 막대한 재정이 투입되는 대규모 전쟁을 운용하면서 말하자면 전체 비용과 가성비를 따지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명나라의 원정군은 만주에 도착하여 전쟁물자의 조달을 위해 막대한 돈을 풀었습니다. 말과 사람을 먹일 식량의 확보 없이 강을 건널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후 만주지역의 경제호황은 계속되었습니다. 8년간 여진족에게 흘러간 은자만 해도 명나라 1년 예산인 400만 냥에 달했다는 추정이 있을 정도입니다.


전쟁 때문에 명나라와 조선은 큰 타격을 입었으나, 여진족들은 이 전쟁 덕분에 국가 건설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명나라 초기의 황제들, 그러니까 홍무제 주원장도, 영락제 주체도, 여진족들이 조선에 붙을까 노심초사했습니다. 고구려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는 조선에 대해 경계심을 풀지 못했던 것입니다. 만성적인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던 여진인들은 조선과의 교역에 사활을 걸고 있었고, 명의 황제들은 여진족의 족장들에게 벼슬도 주고 그들에게 교역 특권을 부여하여, 살 길을 만들어주었습니다.  명나라의 이러한 전략은 조선을 분노하게 만들었지만 결과적으로 성공적이었습니다. 더 이상 조선에 허리를 굽힐 필요가 없어진 여진족 족장들은 명이 부여해준 교역권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하면서 주변의 작은 무리들을 통합해갈 수 있었습니다.

 

임진왜란이 가져다준 만주지역의 경제 호황은 일종의 결정타였습니다. 상대적으로 세력이 약했던 누르하치의 건주여진이 만주 전체를 통합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어 주었습니다.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후금이 조명 연합군을 격파한 1619년의 사르후 전투가 과연 가능했을까요? 아마 어려웠을 것입니다.      


이자성의 대순과 누르하치의 후금, 이 두 나라 모두 임진왜란의 여파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베이징과 산해관을 사이에 두고 농민군과 팔기군이 대치하는 모습은 흡사, 한강과 광화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던 영화 ‘서울의 봄’ 속의 반란군과 진압군의 모습을 떠오르게 합니다.    

 

어느 쪽의 병력이 먼저 서울에 진입할 것인가?

오삼계의 병력이 어느 쪽에 가담할 것인가?      


어리석은 일련의 작은 선택들이 모여, 반란군과 팔기군을 역사의 승자로 만들었습니다. 작은 선택 하나가 좀더 현명했더라면 완전히 결과가 달라졌을 것인데 말입니다. 역시 더 간절한 자들이 살아남는 법일까요?  


명나라의 참전을 이끌어낸 일등 공신은 물론 본인도 인정하듯이 조선선조였습니다.


조선은 그 고구려의 후예인, 일방적으로 당했다니 말이 되는가! 혹시 풍신수길과 결탁한 것은 아닌?! 


선조의 눈물의 호소가 없었다면 명나라는 제때 의심을 풀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명나라의 참전이 전쟁 승리에 도움이 되었던가요? 네, 물론입니다. 그러니 선조에게도 공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선조는 아무리 생각해도 두뇌 회전이 른 똑똑한 인물이었습니다. 간혹 어리석은 선택도 하긴 했으나, 결정적인 순간마다 빛난 그의 명석한 판단은 일본군의 패퇴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중 누구도 그를 위인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존경하기는 커녕, 우리 역사상 최악의 소인배로 여깁니다.    

  

선조는 우리나라 사람의 관념에 부합하는 위인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사람에게 위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이순신 장군, 세종대왕, 김구 선생님 이런 분들 아니겠습니까? 이분들과 선조 이연 사이에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리고 이분들은 중국의 마오쩌둥, 덩샤오핑과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그리고 이분들은 일본의 사카모토 료마,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차차 이야기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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