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어느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시계는 오전 10시를 막 지나고 있었지만 구름 한 점 없는 날씨 탓에 태양은 자신의 위세를 떨치기 충분했다. 습한 공기에 존재감을 뽐내는 태양빛이 더해지니 온몸이 녹아내릴 듯했다. 이런 날씨에 가파른 언덕을 오르고 있자니 절로 짜증이 났다.
언덕을 10분쯤 올라가니 너른 평지가 나왔다. 입고 있던 옷은 이미 반쯤 땀으로 젖어 축축한 상태였다. 평지에 발을 내딛자 옷 사이로 바람이 솔솔 불어와 그나마 살만했다. 시원한 바람의 응원을 받으며 계속 걸어가자 조촐한 건물이 보였다. 건물 안에는 또래로 보이는 대학생들이 바쁘게 지나다니고 있었다. 여름방학, 공부를 위해 자주 찾던 한 대학 도서관의 흔한 풍경이었다.
도서관 열람실에 자리를 잡았다. 읽던 책과 토익 교재, 노트북을 꺼냈다. 땀으로 젖은 티셔츠는 어느새 제법 말라 있었다. 에어컨이 켜진 열람실에 잠시 앉아있으니 언제 더웠냐는 듯 한기가 느껴졌다. 책을 펼쳐놓고 화장실로 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자 성난 마음도 조금 누그러졌다.
그날은 공부에 흥미가 없던 날이었다. 책을 펼쳤지만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애꿎은 휴대폰만 하릴없이 만지작거렸다. 공부하기 싫을 땐 목사님 설교도 재밌다던데, 굳이 카카오톡을 열어 숨김친구 목록에 들어갔다.
그 속에는 과거의 흔적이 가득했다. 친했다가 멀어진 친구, 조별과제에서 만난 선배, 아르바이트생 시절 사장님, 옛 연인들까지. 무심코 그들의 프로필 사진을 훔쳐보다 흠칫했다. 왠지 모르게 인사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더운 날씨에 기분도 내 맘대로 되지 않아 연락은 내 맘대로 해버렸다.
“잘 지내?”
너는 내 뜬금없는 안부 인사를 생각보다 담담하게 받았다.
“응 난 잘지내”
내게 온 답장도 담담했다.
“그냥 내 마음이 시켜서 연락했어”
사실 이건 내 문장이 아니었는데, 그때는 이 문장을 꼭 쓰고 싶어서 빌려 썼다.
“아 그래? 연락해줘서 고마워...”
그 뒤로 무슨 말을 주고 받았는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옛 연인 사이의 시시콜콜한 대화겠지. 술 대신 더위에 취해 옛 연인에게 연락한 남자와 쿨하지 못한 사람으로 보이기 싫어 조심스레 연락을 이어가는 여자의 마음이 담긴 대화였을테다.
창피한줄도 모르고 옛 연인에게 먼저 연락한 사내는 그녀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보고싶다고 생각했다. 사내는 대뜸 그녀에게 만나자고 제안했다. 이렇다 할 계획도 없었다. 뜬금없는 제안에 그녀는 약간 당황한 듯했지만 결국 승낙했다. 나도, 그녀도 무슨 생각이었는지 지금까지도 알 수 없다. 사내는 그녀와 만난다는 사실 하나만 가슴에 품고서 서울행 기차표를 끊었다.
먼 곳에서 만난 너는 헤어지기 전 모습 그대로였다. 작은 키에 하얗고 고운 피부. 약간 어색해보이는 높은 구두. 당당함을 흉내내지만 어딘가 수줍은 표정. 난 너의 그런 점들을 좋아했었던 것 같다. 어른스러워 보이고 싶어했지만 빈틈많은 너를, 그때의 내가 얼마나 귀여워했는지 모른다. 다시 만난 그날에도 먼 곳에서 오느라 고생했다며 넌 내게 커피를 사줬다. 별 것 아닌 호의였는데도 무척 고마워했던 내 모습을 기억한다.
그때의 나는 너와 다시 만나면 어떤 어려움이든 극복할 수 있을 거라고 자만한 것 같다. 쉽게 다시 만나자는 얘기를 꺼냈고, 너도 내 제안을 쉽게 받아들였다. 어쩌면 너도 나처럼 조금의 희망을 품었던 건지 모르겠다. 단거리 연애에서 장거리 연애로 바뀌면서 연락 문제로 헤어졌던 우리는 새로운 규칙을 만들었다. 2주에 한 번은 서로 만나기로, 만나지 않는 날에는 연락을 자주 하기로 정하고 각자의 집으로 향했다.
한 번 상처 입은 관계는 조금만 실수해도 쉽게 상처가 덧난다는 점을 그때 느꼈다. 똑같은 문제로 또 우린 서로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겼다. 연락 좀 자주해달라는 나의 요구에 너는 힘들다고, 최선이라고 답했다. 그러면 그게 어떻게 최선인지에 대해 내가 따져물었고 너는 설명하는 노력조차 버거워했다. 다툼은 잦아졌는데 활동시간이 서로 다르다보니 해결책을 찾지 못한 채 넘어가야 할 경우가 많아 답답했다. 우리가 헤어진 첫 이유에 “바빠서”가 있었는데, 결국 우리가 두 번째 헤어진 이유도 “바빠서”였다. 너와 만나다보면 나는 어느샌가 연락에 집착하는 사람이 되곤 했는데, 나는 그 사실을 감수하고서도 연락을 필요로 했다. '연락이 뭐가 중요해'와 '연락이라도 잘해줘'가 평행선을 달린 나날이었다.
너와 헤어진 지 벌써 몇 년이 지나고 나니이제야 좀 알 것 같다. 그때의 너는 나를 적당히 좋아했다는 걸. 홀로서기가 가능해지고 나서야 그때를 되돌아볼 수 있게 됐다. 지금은 분명히 안다. 10시간에 한 번씩 연락 오는 이유가 단지 바빠서가 아닌 것을. 기념일에 편지 한 통 써달라는 부탁을 몇 개월간 미룬 까닭이 단지 바빠서가 아닌 것을. 헤어짐을 말할 때도 시큰둥했던 네 반응이 단지 바빠서가 아닌 것을. 그때는 몰랐다.
어느 더운 날에 네가 생각났다. 카카오톡 숨김친구 목록을 봤기 때문은 아니다. 더위에 취해 연락할 생각도 없다. 네가 받아주지도 않겠지만. 그날처럼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 왜 그때 나는 널 그렇게 좋아했을까에 대해 생각해봤다. 떠올려보면 네가 좋은 것도 있었지만 널 좋아했던 내 모습을 좋아했던 것 같기도 하다. 누군가를 이렇게까지 좋아한 경험은 인생에서 없었으니까. 이런 내 모습에도 우리 관계가 실패로 돌아갔다는 점이 아쉬워 연애를 다시 이어붙이려했던 것 아닐까. 다행히 너를 만난 후로 좋은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그들은 내게 좋은 사랑을 주었다. 내가 사랑받을만한 존재라는 것도 알게 됐다.
난 네가 앞으로도 잘 지내길 바란다. 내가 미처 주지 못한 것들을 채워주는 사람을 만나면 좋겠다. 앞으로의 연애 과정은 부디 바쁘지 않길 빈다. 아참, 나의 기억에 의존한 연애 묘사에 대한 반박도 환영이다. 더운 날씨에도 몸 건강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