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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스 Dec 15. 2022

단절은 선택

<생각꾸러미>

누군가와 마주 서서 대화하는 내 모습이 보인다. 나는 나보다 몸집이 1.5배 정도 더 큰 상대방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짬보’라는 별명소유자답게 눈에는 눈물을 머금고 있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이내 아쉬움을 뒤로한 채 터덜터덜 집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의 기억이다.    

 

어린 시절, 가정환경 탓에 잦은 이사를 해야 했던 나는 그나마 친해진 학교 친구와 이별한 적이 많았다. 전학이 익숙해져 새로운 친구와 빨리 친해지는 법도 알게 됐지만 이별은 언제나 씁쓸했다. 그중 현우라는 친구가 기억난다. 그는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나와 제일 친했던 친구였다. 하지만 이내 그 친구와도 이별을 맞게 됐다.     


이별 직전, 우리는 약속했다. 스무 살이 되면 꼭 다시 이곳에서 만나자고. 왜 하필 스무 살이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지만 그 당시 나와 현우는 꼭 해외로 파병을 떠나야 하는 가족의 마지막 모습처럼 훌쩍거렸던 것 같다.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온 후에도 현우와는 두세 번 정도 편지를 주고받았다. 현우가 내게 알려준 주소로 내가 먼저 편지를 보냈고, 답장도 받았다. 편지 내용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떻게 지내느냐는 안부 인사 정도에서 더 나아가진 못한 것 같다. 어린 날의 우정은 깊었지만 길지 않았으니 딱히 주고받을 말이 없던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었다.     


내 키가 자라고, 내 주변 친구들이 많아질수록 자연스레 현우와의 거리는 멀어졌다. 나중에 가서는 현우의 얼굴은 물론, 그와 내가 어떻게 친해졌는지, 무엇을 하고 놀았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현우는 마치 어린 시절 읽은 위인전에 등장하는 ‘에디슨’이나 상상 속 동물처럼 느껴졌다. 당연하게도 스무 살이 된 후 만나자는 우리의 약속도 결국 지켜지지 않았다.     


하지만 현우는 여전히 내 기억 속에 좋은 친구로 남아있다. 그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지만 그를 생각하면 아련했던 그때의 마음이 따사롭게 다가온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가 내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이유는 ‘서로 연결되고자 애쓴 마음’이 아름답게 보여서인 것 같다. 눈물을 머금고 이별한 추억에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안부를 물었던 아날로그 감성이 더해져 한 폭의 그림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가 내게 보내온 편지에는 눈에 보이는 글귀뿐만 아니라 편지지를 사고, 편지를 부치기 위해 우체국을 향하던 시간도 함께 담겨있어 따뜻했다. 현우가 편지와 함께 전해준 ‘마음’은 만나지 않아도 우리 관계를 돈독하게 했다.


카카오톡으로 대표되는 메신저 서비스가 흔해진 요즘에는 내가 현우와 맺었던 관계가 가능할지에 대한 의문이 든다. 큰 어려움 없이 언제든지, 누구에게나 연락할 수 있는 환경에서 단절의 소중함도 많이 희미해진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누군가를 진심으로 그리워하기 위해서는 그 사람과 단절되는 상황이 필요하다. 이별 후에야 비로소 연인과의 추억을 정리할 수 있는 것처럼 잠시 떨어져 있어야 누군가의 소중함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특히 단절된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누군가가 노력한다면 그 모습만큼 고맙게 보이는 것도 없다.     


초연결사회를 지향하는 사회적 분위기에서 ‘단절의 필요성’은 단지 친구나 연인 관계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과거에는 누군가와(어떤 것과) 연결되기 위해 노력해야 했지만, 지금은 누군가와(어떤 것과) 단절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도 때도 없이 울려대는 카톡 알람을 멈추기 위해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휴가 중이라는 문구로 바꾸는 것도, 직장인들이 연결되지 않을 권리를 요구하는 것도 단절이 필요해진 세상의 한 단면이 아닐까 싶다.


또 별 생각 없이 휴대폰을 열었다가 유튜브나 인스타그램이 추천하는 알고리즘의 쾌락에 빠져 한나절을 날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점도 단절은 선택사항이 됐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한다.     


초연결사회가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지금, 단절의 중요성에 대한 고려는 많지 않은 듯하다.

‘흐름이 연속되지 아니함’이라는 단절의 사전적 의미도 부정적인 어감으로 들리는 것을 보면 우리 사회에서 단절은 나쁜 의미로만 사용되는 게 맞는 것 같다.     


하지만 나는 단절이 주는 소중함이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 약속 장소에 미리 나가 친구를 기다렸던 추억, 스트리밍 서비스가 없던 시절 일요일 아침마다 ‘티몬과 품바’ 애니메이션을 보기 위해 기다리던 설렘, 짧은 카톡 메시지보다 2~3일에 걸쳐 도착한 손 편지를 받았을 때 느낀 감동이 더 큰 것도 그래서인지 모른다. 이게 바로 내가 선택으로서의 단절을 응원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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