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스미스 Nov 05. 2023

전주의 가을이 또 생각날 것 같아

<생각 꾸러미>

“남자로 태어나 여고에 가보게 될 줄이야.”


얼핏 들어도 흥미로운 일이었다. 가본 적도 없는 여고에서 수업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어느덧 10년이 넘은 나에게 학교라는 단어는 생소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래서인지 독립출판, 글쓰기에 대한 수업을 제안받았을 때는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우연한 기회에 접한 수업 제안에 나는 호기롭게 ‘yes’라고 답했다. 실제 수업까지 몇 달의 기간이 남아있어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은 것이 큰 이유였지만 좋은 기회를 놓치기 아깝다는 생각이 컸다. 황금같이 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학생들 앞에서 내 이야기를 전달할 기회가 또 언제 있을까. 강의를 준비하면서 배울 수 있는 점도 분명 많을 것 같았다. 고등학교 1학년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글쓰기 강의는 이렇게 시작됐다.


‘어떤 이야기를 전달해야 할까?’

구체적인 주제를 정하느라 강의 준비에 쉽사리 속도가 나지 않았다. 나는 글쓰기 전문 강사도 아니고 출판사를 운영하는 것도 아니라서 전문적인 영역에 대해 수업하는 것은 자칫 학생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전달할 우려가 있었다. 그들의 소중한 1시간을 허투루 보내게 하고 싶지 않았다. 고민에 고민이 더해졌다. 야속하게도 시간은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자’

내 마음은 글쓰기와 꿈에 대한 이야기를 접목한 나의 경험을 전달하는 것으로 기울었다. ‘돈보단 꿈을 모으고 싶어’라는 제목의 책을 쓴 만큼 꿈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글쓰기가 내게 준 긍정적인 영향은 무엇인지, 좋아하는 것을 부지런히 좇으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다. 주제를 정하고 나니 하고 싶은 말이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아이들을 만나기로 한 날, 긴장감이 나를 덮쳐왔다. 며칠 전부터 유튜브를 보면서 강의 연습을 수도 없이 해왔지만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원고를 읽고 또 읽었고 원고 순서에 맞춰 혼자 구시렁대며 전주로 향했다. 교실에 들어가기 전 친구가 해준 조언을 떠올렸다. 친구는 내게 “아이들은 네 강의에 큰 관심이 없을 것”이라며 “얼굴이라도 기억하게 그냥 생긋생긋 웃기만 하고 나오라”고 조언했다. 모든 학생이 글쓰기에 관심이 있는 것은 아닐 테니 친구의 조언은 꽤 현실적인 것 같기도 했다.


미소를 한껏 머금고 교실에 들어갔다. 외국인을 보는 듯 신기해하는 아이들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다. 아니 요즘에는 외국인을 그다지 신기해하지 않으니 외계인을 보는 듯했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 같다. 그들에게 나는 완벽한 이방인이었다. 지구인들은 반갑게 외계인의 인사를 받았다. 그들의 환대에 적잖이 놀란 외계인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어찌할 바 모른 채 뚝딱거리기 시작했다. 하필 이날 교실에는 전자칠판이 수리 중이어서 시선을 분산할 만한 어떤 장치도 없었다. 숨 막히게 반짝거리는 시선을 온전히 받아들이면서 수업을 시작했다.


50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 모르겠다. 수업을 마치는 종소리가 울리자 그제야 최면이 풀린 것처럼 정신이 돌아왔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열심히 연습한 말들을 Ctrl+C, Ctrl+V 한 것 같다. 아이들에게 제대로 전달됐을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로봇같이 딱딱한 모습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방인의 모습을 반짝반짝한 눈으로 끝까지 바라봐 준 아이들이 고마웠다. 두 번째 수업하러 갔을 때는 다행히 아이들이 나를 기억해 줘 보다 편하게 수업할 수 있었다. 전자칠판의 수리가 완료돼 시선을 분산할 수 있었던 것도 자연스러움을 더하는 데 한몫 톡톡히 했다.


내가 아이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지금의 행복을 뒤로 미루지 말라'는 단순한 메시지였다. 좋아하는 일을 찾고 좋아하는 일을 조금씩이나마 이어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공부가 중요한 시기인 것은 맞지만 공부만 하지는 말라는 다소 도발적인 조언을 곁들였다. 영화나 책을 본다거나 친구와 노는 것도, 공부 못지않게 한 사람의 인생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의 세계가 넓어졌으면 좋겠다는 마음에서 내가 좋아하는 다큐멘터리를 소개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나의 어린 시절에는 이런 조언을 해주는 어른이 없었던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공부만 한 것은 아니지만.


글쓰기가 삶에 미치는 긍정적인 영향도 꼭 소개하고 싶었다. 이슬아 작가가 '글쓰기는 부지런한 사랑'이라고 말했듯 글을 쓰기 위해 사물을 관찰하고 생각을 정리하는 행동은 나의 하루를 의미 있게 만들어 준다. 내 감정을 살피듯 주변 사람들의 감정도 살필 수 있고 그 속에서 몰랐던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나만의 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보람 있는 일인지는 해본 사람만 느낄 수 있다.


아이들과 함께한 짧았던 그 시간이 종종 생각날 것 같다. 내가 아이들에게 전달한 것처럼 좋아하는 것을 계속하고 있는지 스스로 되돌아보는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호기롭게 수업하겠다고 나선 것은 정말 잘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여 명의 학생 중 몇 명이나 내 이야기에 공감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단 한 명이라도 꿈과 글쓰기에 대해 고민해 본 계기가 됐다면 그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는 경험일 테다. 이번 수업을 하면서 전주라는 도시를 알게 되고 좋아하게 됐으니 오히려 학생들보다 내가 얻어 간 게 더 큰 것 같기도 하다.


가을의 전주는 따뜻한 도시다. 노랗게 물든 은행나무잎은 바람에 흩날린다. 한옥 지붕에 가만히 내려앉은 은행잎은 고풍스러운 분위기에 개성을 더한다. 물이 졸졸 흐르는 전주천은 도시를 찾는 사람들에게 느긋함을 선물한다. 또다시 가을이 되면 아름다운 전주가, 아이들의 귀여운 표정이, 멋쩍어하던 내 모습이 생각날 것 같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