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엄마는 처음으로 눈을 감았다

영화 리뷰 < 딸에 대하여, 2024 >

by 스미스

60대 엄마(오민애 분)는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사람이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부가 ‘특혜’로 취급받던 시절, 그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끝까지 학업을 이어가 대학을 졸업했고, 자신의 딸을 딸을 대학 강사로 키워냈다. 남편의 빈자리를 대신해 가장의 자리에 선 그는 지금도 요양보호사로 일하며 집안을 지탱한다.

2층짜리 주택을 마련하고 윗층에는 세입자까지 들였지만, 현실은 여전히 냉혹하다. 집을 담보로 대출조차 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지만, 어느 날 딸은 전세자금 마련을 위해 엄마에게 집을 담보로 한 대출을 요구한다. 노년이 되었어도 ‘엄마’라는 이름이 짊어져야 하는 무게는 사라지지 않는다.


영화 '딸에 대하여'는 바로 이 엄마의 삶을 정면에서 응시한다. 불안한 대학 강사 생활 끝에 본가로 돌아온 딸 그린(임세미 분)은 오랜 기간 교제 해 온 동성 애인인 레인(하윤경 분)과 함께 돌아온다. 자신이 담당하고 있는 노인의 병세 악화와 점점 더 힘겨워지는 직장생활로 지쳐가는 엄마는, 딸의 선택 앞에서 또 하나의 고민과 마주한다. 이 작품은 엄마와 딸, 노인, 그리고 각 세대가 맞닥뜨리는 '나이 듦'과 그들의 '고군분투를' 다각도로 포착한다.


남편 없이 딸 그린을 키우는 엄마는 남편의 빈자리를 크게 느낀다. 그래서 딸만큼은 적당한 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안정된 삶을 살기를 바란다. 그런 마음은 낯선 존재인 '레인'을 대하는 태도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린은 걔 이름이 아니에요"

레인이 딸을 '그린'이라고 반복해 부르자 엄마는 이런 말을 내뱉는다. 그린이라는 호칭은 단순한 이름 문제가 아니다. 엄마가 바라는 딸의 모습과 딸이 스스로 원하는 자신의 모습이 다르다는 것을 드러낸다. 엄마는 딸이 ‘정상적인’ 가정을 꾸리길 바라지만, 딸은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하고자 한다. 같지만 다른 행복의 형태를 두고 두 사람은 결국 충돌할 수밖에 없다.

"너희들이 하는 건 그냥 애들 소꿉장난 같은거야"

이 한마디는 엄마가 딸의 사랑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를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그린과 레인의 관계는 엄마의 눈에 철없는 아이들의 일탈처럼 보인다. 그들의 사랑을 인정하지 못하는 순간, 레인은 딸이 사랑하는 사람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고 그저 ‘남’으로 남게 된다.


그녀의 시선이 바뀌기 시작한 건 자신이 돌보는 할머니를 통해서다. 점점 병세가 악화되자 사람들은 하나둘 곁을 떠나고, 가족도 없이 남겨진 할머니는 세상으로부터 배척된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동안, 엄마는 진정한

가족이란 무엇인지, 누군가의 곁을 지킨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고민하게 된다.


"우리라고 저렇게 안 될 줄 알아?"

영화를 관통하는 이 대사는 결국 우리 모두에게 닿는다. 언젠가 우리도 저렇게 늙고, 홀로 남겨질 수 있다는 사실. 돌봐줄 가족도, 곁을 지켜줄 사람도 없이 남겨진 할머니를 대하는 재단 사무장과 요양병원 과장의 태도, 그리고 다른 요양보호사들의 시선까지 하나같이 냉정하게 다가온다. 딸에게 늘 “옳지 않은 것에 저항하라”고 가르쳐온 엄마였지만, 이번만큼은 ‘남의 일이니까 어쩔 수 없다’는 말에 흔들린다. “그냥 이번만은 넘어가자”는 주변의 반응 앞에서 엄마는 깊은 고뇌에 빠진다.


자신이 현실에 타협해 갈 무렵,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생각한 바를 당당히 밀고 나가는 딸의 모습에서 엄마는 큰 변화를 겪는다. 정의롭지 않는 것에 대해 저항하라고 가르친 딸이 그대로 행동하고 있는 것과, 자신이 할머니에게 느끼는 것처럼 생판 남일 수 있는 다른 동성애자 교수를 위해 모든 걸 내던지는 딸의 모습이 겹쳐보인다. 엄마는 딸의 모습에서 자기랑 비슷한 점을 본다. 다른 사람들이 탐탁지 않아하는 동성 애인을 당당하게 집에 들이고, 그녀를 지키는 그린. 생판 남인 할머니를 집에 들인 엄마. 엄마와 닮은 그린을 사랑하는 레인은, 엄마가 하고싶어 하는 일인 할머니를 케어하는 일까지 적극적으로 돕는다.


"우리라고 저렇게 안 될 줄 알아?"와 더불어 이 영화를 가장 잘 설명하는 대사는 "내 일이 될 수 있으니까"다. 딸과 엄마는 서로 다른 길 위에서 같은 마음으로 움직인다. 믿는 것을 지키기 위해 몸을 던지고, 사랑하는 사람이 외롭지 않도록 곁을 지키려 한다. 비록 그 형태는 다를지라도, 이루려는 지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


"나처럼 우리 딸이 혼자가 되지 않을까 걱정했어요"

영화의 후반부, 할머니를 극진히 모신 엄마는 할머니의 장례식장에서 레인에게 조용히 묻는다. 내가 할머니를 내 방식대로 지킨 것처럼, 레인도 그린을 그렇게 지킬 수 있느냐고. 레인은 긴 대답 대신 “피곤해 보이신다”며 눈을 붙이라고 말한다. 레인은 긴 대답 대신 “피곤해 보이신다”며 눈을 붙이라고 말한다. 레인과 그린, 친구들이 함께 웃고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엄마는 한 귀퉁이에 앉아 눈을 감는다. 그리고 깊은 잠에 빠진다.


영화 속에서 엄마가 잠을 자는 장면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영화의 초반부 장면에서도 엄마는 잠든 척을 하지만 딸이 집 안으로 들어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있다. 후반부에도 곤히 잠든 할머니에게 레인이 자신의 딸이 아니라는 점을 이야기하지만 그때도 엄마는 눈을 뜨고 있다. 결국 레인을 자신의 딸의 사랑으로 인정하기로 한 날, 엄마는 비로소 마음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게 된다. 그동안 자신이 짊어왔던 짐을 겨우 내려놓은 채.


엄마의 이름이 작품 속에서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것은 그가 한 개인이 아닌 ‘모든 엄마’를 상징하기 때문이다. 세상의 수많은 엄마들은 끝없는 시간을 들여 딸을 이해하려 애쓰고, 때로는 좌절하고, 다시 다가가기를 반복한다. 그 긴 여정을 보여주는 작품이 바로 ‘딸에 대하여’다. 정답이 없는 삶 속에서 결국 남는 것은 사랑하는 이를 이해하고 지키려는 마음임을, 이 영화는 조용히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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