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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슬빛 Sep 01. 2019

[영화 <벌새> 리뷰]"제 삶도 언젠가 빛이 날까요?"

영화 <벌새> 리뷰

이 영화는 한 소녀에게는 너무나 버거웠던 인생의 짐과 그녀에게 가해졌던 폭력에 관한 이야기이다. 영화의 초반부부터 은희의 아빠가 언니를 혼내고 있는 장면이 나온다.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언니, 수희는 아빠의 말을 고스란히 다 듣고 그것을 속으로 묵힌다.    


“아니, 네가 어떤 년이냐. 대치동에 살면서 공부를 못해서 고등학교를 떨어져서 강북에 있는 학교를 다니면서...그렇게 부모 가슴에 못을 박고...창피하게...나가 뒈져, 똥 멍청이 같은 년!”    


수희로 삭여지지 않은 아버지와 가족의 분노의 남은 몫은 은희의 것이다. 학교에서는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가자”라는 구호로 교육받는다. 그러한 교육에서 도태되면 아버지는 열불을 내며 혼낸다. 그런 답답한 학교에서 일탈하는 일환으로 친구와 장난삼아 펜을 훔친 은희를 아버지는 나 몰라라 한다. 차라리 경찰서에 가라고 한다. 오빠는 자신이 가하는 부당한 폭력에 대항했다는 이유로 은희를 무차별적으로 구타한다. 급기야는 은희의 뺨을 때려 고막이 찢어지게 한다. 오빠가 폭력을 가할 때마다 무심한 태도로 “싸우지 좀 마”라며 일방적인 폭력을 사소한 폭력으로 축소시키고 넘어간 부모의 탓이다.     


이는 ‘집안의 코끼리’ 이야기를 연상케 한다. 집안에 작은 코끼리가 있다. 처음에는 아무도 그게 별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 안에서 코끼리는 점점 더 자란다. 그리고 급기야 집에 꼭 끼일 정도로 몸집이 커져버린다. 이때가 되면 코끼리는 문제가 된다. 누구에게나 그렇다. 그러나 코끼리가 문제라는 걸 알면서도 이걸 해결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집 자체를 부수어버리지 않는 이상 코끼리를 뺴낼 방법이 없을 것 같다. 그냥 같이 사는 게 속 편해요. 모른 척 딴청을 피운다. 코끼리에 대해 말하는 건 암묵적으로 금기시된다. 어차피 다 알고 있거든? 혼자 똑똑한 척 하지 마. 그렇게 코끼리는 집의 일부가 된다. (허지웅)    

우리는 모두 가족이라는 코끼리를 기르고 있다. 공공연한 폭력의 최전선은 전쟁터가 아니라 가정이다. 그러나 가정은 가정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이루는 최소 단위이자, 소우주로서의 가정이다. 그런 가정이 모여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노래방 대신 서울대” 가는 것만이 답인 성과중심주의의 사회, “대원외고, 서울대”라는 외연만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과정은 무시해버리는 사회가 곪아 터져 성수대교 붕괴라는 사건으로 이어진다. 은희는 성수대교가 붕괴되는 사건이 터진 그 시대를 오롯이 통과한 세대에 속해 있다. 여기에 더해, 은희는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이고 어리다는 이유로 폭력에도 가장 무방비하게 노출되어 있다.     


위태로워 보이는 은희는 사실 성수대교보다 강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강함이 아니라 유연함일 것이다. 대나무는 하중을 받으면 쉽사리 부러지지만, 버드나무는 한 없이 무거운 무게에도 자신의 몸을 기울이면서 버텨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항상 죽음과 폭력에 맞닿아 있던 위태로움이 역설적으로 은희를 더 잘 버텨낼 수 있게 한 것이 아닐까? (은희는 종종 스스로 목숨을 끊는 상상을 한다.) 영화 상에서, 은희는 귀 뒤에 생긴 혹 때문에 몇 차례 혼자 병원을 다니다, 침샘 조양 진단을 받고 수술을 위해 아예 병원에 입원한다. 은희는 부모의 간호도 없이 그 과정을 홀로 겪지만, 병실에 입원한 다른 환자들 사이에서 어느 때보다도 안정돼 보이고, 자신의 입으로도 이 상황이 집에 있을 때보다 편안함을 준다고 말한다. 평소 가족들에게 군림하는 아버지도 은희의 병을 듣고 울음을 터뜨리지만 은희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런 아버지를 멀뚱하게 쳐다볼 뿐이다.     



은희의 선생님이었던 영지의 가르침도 마찬가지이다. 그녀는 은희에게 폭력의 순간들과 맞서 싸우라고 긍정적으로 살라고 함부로 충고하지 않는다. 자신에게도 힘들고 우울한 순간이 있다고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을 때가 있다고 고백할 뿐이다. 그저 들어주고, 위로해주고, 공감해줄 뿐이다. 영화에서는 구체적으로 나타나지 않지만, 영지 또한 깊이 상처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관객은 그녀의 말을 듣고, 표정을 보고 이해할 수 있을 뿐이다.     


“힘들고 우울할 땐 손가락을 봐. 그리고 한 손가락 한 손가락 움직여. 그럼 참 신비롭게 느껴진다. 이무 것도 못 할 것 같은데 손가락은 움직일 수 있어.”    


영지와 은희가 함께 하는 장면에서 영화는 유독 인물들의 얼굴 클로즈업에 공을 들이는데, 그런 장면들은 종종 은희 쪽으로 향하는 영지의 얼굴에서 끝나곤 한다. 은희 앞에 있는 이 얼굴의 응시를 서사적으로 의미화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은희가 사는 세계의 구조, 이를테면 가족과 학교와 국가제도의 폭력성을 환기하는 시대적 징후로서의 얼굴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의미화는 그 얼굴에서 우리가 감지하는 미세한 떨림까지 온전히 해명하지는 못한다. 그 떨림은 영지의 외적인 조건들이나 그가 말하는 대사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해소되지 못한 시간과 사연이 예민하게 꿈틀대는 듯한 얼굴. 영지의 얼굴은 은희를 쳐다보고 있지만, 은희의 눈을 넘어 영지 자신에게만 보이는 세계의 어떤 심연을 대면하고 있는 것 같다. 배우 김새벽의 독특한 연기가 빚어낸 장면들이겠지만, 은희와 영지가 함께하는 장면이 영지의 얼굴에서 멈추며 끝날 때, <벌새>라는 세계는 끝내 완전히 알기 어려운 이 얼굴로부터 시작된 것은 아닐까, 혹은 거기에 닿아 보려는 안간힘으로 지탱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이 영화의 중반부쯤에 영지(선생)가 하는 대사가 이 생각을 더욱 확실하게 한다. “무수한 사람의 얼굴은 알지만, 여러분이 알고 있는 사람 중에 속마음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사실 이 영화도 실제 작가의 과거를 다루고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작가의 과거 고백인 셈이다. 그도 그럴 것이 현재의 상처는 개시하기에는 너무나 뜨겁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범주화에 실패할 것이다. 발화자 입장에서는 자기연민과 자의식 속에서 균형을 잃고 객관적으로 서술하기가 어렵다. 또한 자칫하면, 현재의 상처를 개시하는 것은 그것을 이용하려는 사람에 의해  뒷담화나 왕따라는 집단적 폭력의 대상이 되기 쉽다. 그러나 현재에도 어쩌면 더한 고통과 아픔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영화는 말한다. 영화 속에 은희 말고 영지처럼 현재에도 끊임없는 고통을 겪고 있지만, 서사화 되지 않은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과거의 고백 이야기들은 현재의 서사화되지 않은 고통스러운 얼굴들에 의해 대리보충된다. 그 얼굴들은 눈빛으로 표정으로, 자신이 고통을 오롯이 감내하거나 속으로 삭이고 있다는 것만 말할 것이다. 우리는 그 사람의 속마음에 다가가려 안간힘 치지만, 그저 얼굴에 다가가 멈출 뿐이다.    


물론, 그렇게 실패를 전제하지만 다가가려는 마음-위로해주고 같이 애도해주려는 마음-과 같은 역설적인 것이 ‘세상을 신기하고도 아름답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한번 날기 위해 수천번의 날갯짓을 해야 하는 벌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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