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능한 희생양, 성스러운 희생양/집단살해를 숨기려는 신화
3. 전능한 희생양, 성스러운 희생양
희생물이 죄가 있다고 믿고, 모든 폭력을 희생물에게 전가함으로서 사회의 구성원들은 화해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화해로 인해 희생물은 최종적으로 찾아온 평화를 가져다 준 존재로 떠받들어져서 신격화된다. 그래서 모든 신화 속에 등장하는 희생양은 전능함과 성스러움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성스러움은 전능함과 연관되어 있다. 신화는 우리로 하여금 희생양이 전능하다고 가정하도록 한다. 사람들은 페스트와 같은 질병의 책임을 전부 희생양에게 전가한다. 만약 희생양이 사람들을 병들게 하는 능력을 갖고 있다면, 병을 낫게 하는 능력 또한 갖고 있다고 ‘박해자’들은 믿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만약 병을 낫게 하는 능력을 가진 유능한 자라면, 분명 병을 들게 하는 능력도 갖고 있을 터였다. 편견과 명성은 하나의 동일한 태도의 두 얼굴이었다. 그렇기에 중세에는 유능한 유대인 의사들이 박해의 대상이 되었다. 이들은 거의 전능하다고 믿어졌다. 사람들은 이들에게 경외감을 가졌고 이것이 그들을 성스럽게 만든 토대가 되었다.
유대인 의사들이 우리에게 악의를 가졌다면 우리에게 페스트를 줄 것이고, 반대로 선의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를 병들지 않게 해주거나 병을 낫게 해줄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병을 유발할 수도 있지만, 최후에는 병을 낫게 할 수 있는 막강한 힘이 있는 존재로 여겨졌다. 이런 믿음이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희생양은 더 이상 그를 해치는 적대적인 힘을 받아들이기만 하는 수동적인 존재가 아니라 전능한 조작자처럼 보이게 된다. 신화는 우리로 하여금 그 희생양을 전능한 존재라고 믿게끔 한다. 이렇게 ‘전능한 희생양’에 대한 가정은 사회적 만장일치로 이뤄진다. 어떤 재앙의 유일한 <원인>이 희생양이라고 말하는 것은, 그 재앙은 바로 문자 그대로 그 희생양의 <것>이라서 그 희생양은 그의 마음에 들거나 들지 않음에 따라서 벌을 주거나 상을 주는 것을 제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신화의 요소들은 중세의 박해에서도 다시 나타나고 있다. 되풀이 되고 있는 악마라는 테마가 그러하다. 동물과 인간이 뒤섞여 있는 것이야말로 신화에 나타나고 있는 악마의 가장 두드러진 중요한 양상이다. 이러한 양상은 중세의 희생물에서도 나타나고 있다. 사람들은 그 마법사나 마녀들은 극도로 해로운 동물인 염소와 특별한 유사성이 있다고 여겼다. 재판을 하면서 사람들은 실제로 둘로 갈라진 쌍발굽으로 된 악마의 발인지를 조사하기 위해 그 피의자들의 발을 검사하기도 하고, 혹시 뿔이나 조그만 혹이 자라나거나 돋아나고 있는지 검사하기 위해 머리를 손으로 더듬어 보기도 하였다. 희생물 징조를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람과 동물의 경계가 쉽게 무너지는 경향이 있다고 믿는 이런 생각에서 사람들은 온갖 수단을 다 강구하였다. 용의자인 어떤 마녀가 고양이나 개 혹은 새 같은 애완동물을 갖고 있으면 그녀는 곧 그 동물과 닮은 것으로 간주되고, 그 동물 자체는 그녀의 일시적인 육화이거나 아니면 어떤 일을 도모하기 위해 일부러 가장한 일종의 변신으로 간주되었다. 이 동물은 레다를 유혹하는 주피터의 백조와 똑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악마라는 것이 중세 세계 속에서 통하던 너무나도 부정적인 의미 때문에, 우리들은 이 같은 유사성을 잠시 잊어버리게 된다.
거의 신화적인 예전 마녀들의 형상은 정신적인 악마성과 육체적인 악마성이 뒤섞여 있는 경향을 잘 보여주고 있는데, 이것은 소위 신화에서 이미 언급되고 있는 것이다. 마녀는 절름발이거나 다리가 휘어 있거나 그녀의 얼굴에는 그녀의 추함을 더해 주는 무사마귀나 여러 가지 혹이 나 있다. 한마디로 그녀의 모든 것은 박해를 부를 만하다. 중세와 근대의 유대인 배척주의에서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는 단지 다수의 과녁이 되는 개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모든 희생물 징조들을 모아놓은 집합체에 다름없다.
그래서 유태인도 염소나 어떤 동물과 연관된 것으로 간주된다. 여기서도 사람과 동물의 차이가 붕괴된다는 생각은 전혀 엉뚱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어, 1975년의 <분데르차이퉁>지는 한 유태인 여자가 두 마리의 돼지 새끼를 보고 있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 돼지를 그녀가 이제 막 낳았다는 것이다.
이 같은 이야기는 세계 모든 신화 속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신화에서는 희생물의 신성화에 이르기 때문에 이 때 이 희생물은 박해자의 왜곡을 숨기거나 때로는 소멸시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캐나다 북서 지방의 신화를 살펴보자. 한 여인이 개와 관계를 맺어 강아지 여섯 마리를 낳는다. 부족에서 쫓겨난 그녀는 먹을 것을 구하러 황야를 헤매게 된다. 숲에서 돌아오던 어느 날 그녀는 그 강아지들이 어린아이가 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가 집을 나설 때마다 그 강아지들은 그 동물의 가죽을 벗는 것이었다. 그래서 밖으로 나가는 척하던 그녀는 아이들이 그렇게 가죽을 벗을 때 그 가죽을 빼앗아버려 그때부터 그 아이들이 자신들의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을 갖도록 했다.
우리가 앞에서 보았던 박해의 전형들은 다소 식별해 내기 힘들지만 여기에 다 들어 있다. 그러나 이것들이 한데 섞여 나타나는 것은 많은 것을 암시한다. 우리가 위기라고 부른 문화의 무차별화는 여기서 아이들에게서 뿐만 아니라 어머니에게서 나타는 인간과 동물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희생물 징조는 여성이라는 것이며 전형적인 범죄는 바로 수간이다. 이 여자는 분명 이 위기에 책임이 있다. 악마 같은 한 무리의 집단을 배태한 것이 바로 그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신화는 은근히 진실을 말해주는데, 그것은 그 죄인과 공동체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는 별 다른 차이도 없는데 그 죄를 징벌한 것이 바로 공동체이기 때문에 사실 박해의 원인은 공동체에 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결국 전형적인 범죄로 비난받고서 <부족에서 쫓겨나서 스스로를 먹을 것을 찾아서 황야를 헤매야만 했던> 한 희생물에 관한 이야기이다.
돼지를 낳았다고 비난받던 유대인 여자와 이 이야기는 상당히 유사하다. 두 이야기 모두 근저에는 희생물 메커니즘이 작동하고 있다. 유대인 여자나 캐나다 신화의 이 여인이나 공동체를 위협하는 무차별화의 범죄를 저지름으로서 공동체의 표적이 된다. 그렇지만 이들에게 비난을 퍼붓는 과정에서 공동체는 다시 결속하게 되고, 이전의 질서를 되찾는다.
그럼으로서 공동체가 다시 태어나는 것은 바로 이 ‘희생’, ‘박해’로부터라고 할 수 있다. 희생물들은 처음에는 먼저 공동체로부터 인간과 동물의 경계를 흐리게 하였다고 비난받지만 뒤에 가서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영원히 정착시킨 공로가 되돌아가는 것도 그 희생물이다. 그 개-여인은 수간뿐 아니라 근친상간과 모든 전형적인 범죄들, 사회의 근본 규칙에 대한 모든 위반들을 징벌하는 위대한 여신이 된다. 겉으로 보기에 무질서의 장본인처럼 보이던 자가 이제 질서의 장본인이 된다. 그 장본인은 처음에는 자신에게 대항하는, 자신의 주위에서 무서움에 떠는 그 공동체의 일체감을 다시 만들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신화에는 두 순간이 있다고 정식화할 수 있다. 첫 번째 순간은 아직은 성스럽게 되지 못한 희생물을 비난하는 순간인데, 이때에는 그 희생물에 대한 적대적인 세력이 커져만 간다. 희생물은 이 비난의 화살을 고스란히 다 덮어쓰고, 희생됨으로서 공동체와 화해하게 된다. 공동체와 화해하게 됨으로서 이 희생물이 신성하게 되는 것이 바로 두 번째 순간이다. 보통 희생물이 박해받는 첫 번째 순간은 희생물이 신성화되는 두 번째 순간에 의해 덮이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두 순간을 잘 분간하지 못하고, 희생물이 박해받았다는 사실을 잘 깨닫지 못하곤 한다.
덧붙이자면, 중세의 마술적 사고도 그 근저에는 희생양 메커니즘이 있다. 어떤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 재앙이 벌어진 것을 두고, 그것의 원인이 무엇일까, ‘인과법칙’을 추적해나가는 방식의 사고에는 희생양 메커니즘과 유사한 면이 있다. 사람들은 종종 재난의 경우에만 마술에서 원인을 찾는데, 이것은 특히 비난의 체계와 유사하다. 마법적 사고는 어떤 인간적 존재, 희생, 희생양, 즉 <사회적 관계의 차원에서 중요한 원인>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테베인들은 이따금 돌림병이 모든 인간 집단에게 타격을 준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테베인들은 하필이면 왜 이때에 우리 도시에 이 질병이 나타나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곤 하였다. 그 때문에 고통 받는 이들은 자연적인 원인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다만 마술이 갑작스러운 불행에 대해 책임이 있었다. 마법에게만 어떤 <징계조치>를 할 수 있었기에 사람들은 징계할 마술사를 찾는 데 모두 혈안이었다. 페스트로서의 페스트에 대항하는 처방은 없는 것이다. 그 반면에 불행한 오이디푸스에 대한 카타르시스적인 징계에는 어떠한 난관도 없다.
4. 집단살해를 숨기려는 신화
신화에 집단살해가 없다고 이의를 제기할 수 있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르네 지라르에 따르면, 집단살해가 없는 신화는 사람들이 ‘집단살해’의 내용을 의도적으로 지워버린 것이다.
북유럽의 한 신화는 다수의 신이 한 신을 박해하여 죽이는 ‘집단살해’를 담고 있다. 그러나 신화적 전통의 해석자들은 집단살해를 진실로 보기에는 엄청난 일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집단 살해에 대한 전통적 표현을 보존 하면서도, 집단 살해라는 전형적인 박해를 제거하고 싶어서, 이 신화에 변형을 가하기 시작했다. 종교적 감수성이 개입하면서 신화는 발전을 거듭할수록, 또는 시간이 지날수록 집단 살해를 없애는 방향으로 흘러가고 한 번 그렇게 되면 그것을 다시 만들어내지는 않는다.
레비스트로스도 신화가 변형의 산물이라는 것은 인정했지만 그는 변형이 방향성 없이 일어난다고 보았다. 변형은 어떤 방향으로든 일어날 수가 있어서 집단살해가 없는 신화에서 집단 살해가 있는 신화로 변형될 수도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구조주의적 관점은 모든 것을 똑같은 지평에 두기 때문에 본질적인 것은 사라지고 시간의 화살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르네 지라르에 따르면 그런 관점으로는 신화분석을 할 수 없고 본질적인 것을 놓치게 된다. 신화는 무조건 집단 살해가 있는 신화에서 집단 살해가 없는 신화로, 방향성을 갖고 변형된다. 즉 집단 살해와 폭력의 흔적을 없애려는 방향으로 변형되어 가는 것이다. 즉 본질은, 모든 신화는 폭력과 집단 살해를 지우려고 한다는 것이다.
집단살해가 못마땅한 사람들은 집단살해의 징벌과 함께 징벌의 원인이었던 죄까지도 단번에 없애버려야 했다. 이제 사람들은 신화 속에서 신들이 행한 죄, 희생물 징표, 심지어는 희생물을 필요로했던 위기 자체마저 지워나갔다. 제의의 의미가 약화되고 도덕성만이 강화되었다.
원초적인 신화에서 신은 선악 그 너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있고 신이 구현하는 차이는 도덕적 분별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구분이 행해지면 선악의 균형은 완전히 선한 주인공과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완전히 악한 악마로 나누어진다. 악마는 <위기>와 <죄> <박해>의 세가지 나쁜 전형을 물려받고 주인공은 살해와 희생적 결단이라는 네 번째 전형만을 이어받아, 그는 악마가 폭력을 정당화할수록 해방자가 된다.
중요한 것은 신화는 집단폭력을 감추고 왜곡하려 한다는 것이다. 신화에 나타나 있는 흔적을 찾으면 문명이 어떻게 위기를 거치면서 변해왔는가를 이해할 수 있다. 위기의 시기, 폭력이 확산되는 시기, 혼란이 절정에 달했을 때 새로운 지식이 생겨나고 희생제의적인 재편이 일어난다. 희생양 메커니즘은 일단 한번 밝혀지면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한다. 성경은 이 박해의 원동력을 해체하고 희생양 메커니즘을 토대로 쌓은 제도를 붕괴시키는 원인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 수난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군중들은 예수에 대한 비난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이고 예수를 십자가형을 받을만한 원인제공자라고 여긴다. 구약의 시편이나 신약의 복음서는 이러한 박해군중을 옹호하지 않는다. 이 점에서 성서는 기존의 신화에 종지부를 찍는다. 성서의 단절은 희생물에게 죄가 없다는 점을 밝힌다. 박해 군중의 학살 장면을 조작하거나 감추지도 않는다. 이야기는 박해자에게서 희생물로 옮겨간다. 이는 희생물을 인간성을 복원하고, 폭력의 자의성을 폭로하는 작업이다. 주로 처형당한 사람들에게 그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은 막강한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면 마녀 사냥에서 마녀추방주도자거나 종교지도자거나 정치 지도자거나 군중들이었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이 부여한 의미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오히려 이들이 박해자임을 폭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