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읽고
자본주의는 세계를 지배하는 하나의 질서이자 언어이다. 교환체계를 바탕으로 하는 나름의 작동원리가 있고, 그 원리가 작동하는 세계 속에 들어가기 위한 필요조건(자본주의 정신)이 있으며, 이 질서에 편입되지 않고서는 우리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게 만든다.
현대 사회에서 가장 중요하고 많은 사람들을 지배하는 원칙은 돈의 논리, 자본주의이다. 즉, 이 세계는 개인으로서는 사실상 어쩔 수 없이 그 안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공간으로 주어진다. 개인이 자본주의 질서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개개인들이 시장과 얽혀 있는 한 개개인은 자신들의 경제활동에서 이 세계가 정한 규범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이 규범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는 노동자는 거리로 내쳐져서 실업자가 되고, 마찬가지로 이 규범과 지속적으로 대립각을 세우는 공장주는 반드시 망해서 이 경제 질서에서 배제된다.
자본주의는 경제적인 “취사선택”을 통해 자신이 필요로 하는 경제 주체들인 기업가와 노동자를 교육하고 만들어 낸다.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자본주의에 “최적화된” 특정한 형태의 삶의 방식과 태도가 다른 형태들을 이기고 “선택”되기 시작했고, 그러지 못한 삶의 방식과 태도는 도태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규율하는 사고방식과 태도는 자본주의에 적합한 것만이 남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가 의식할 필요도 없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막스 베버의 책은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얼마나 자본주의에 잘 부합했는지, 그 정신이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것과 어떻게 잘 맞아떨어졌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그는 가톨릭교도와 개신교도들을 비교한다. 자본가와 기업가는 물론이고, 고급 숙련 노동자층, 특히 기술 분야나 상업 분야에서 좀 더 전문적인 훈련을 받고서 근대적인 기업들에 근무하는 직원들이 대부분 개신교도인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또한 수공업에서 숙련된 도제들 중에서 가톨릭교도들은 수공업에 그대로 머물러 있으려고 하는 경향이 더 강해서 수공업의 장인들이 되는 비율이 더 높은 반면에, 개신교도들은 상당수가 대규모 공장들로 옮겨가서 숙련노동자들의 간부층과 관리자층을 형성하는 경향이 더 강하다는 것도 드러났다. 개신교도들은 지배계층이었을 때든 피지배 계층이었을 때든, 다수 집단으로 있을 때든 소수 집단으로 있을 때든 “경제적 합리주의”를 지향하는 두드러진 성향을 보여 왔던 반면에 가톨릭교도들은 전자의 위치에 있든 후자의 위치에 있든 한결같이 그런 성향을 과거에나 현재에나 보여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개신교도들이 갖추고 있는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정신’은 무엇인가? 그것은 벤자민 프랭클린의 글에서 잘 드러난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그의 글에서 ‘시간이 돈이라는 것을 명심’할 것, ‘신용이 돈이라는 것을 명심’할 것을 강조한다. 여기서는 돈이 곧 ‘가치’를 의미한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그러면서 신용이 있는 신사의 이상, 그리고 특히 그 신사의 삶의 목적으로 전제되고 있는 자본 증식에 대한 관심을 인간 개개인의 의무로 보고 있다. 즉, 자본증식을 인간 삶의 목적으로 보는 것이다. 돈을 버는 것은 합법적인 범위 내에서 행해지기만 한다면 근대적인 경제 질서 내에서 직업과 관련한 유눙함의 결과이자 표현이었고,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듯이 그러한 유능함은 실질적으로 프랭클린이 제시한 도덕의 출발점이자 종착지였다.
결국 적자생존의 법칙에서 승리한 것은 프로테스탄트였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프로테스탄트들이 내세웠던 논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당연하다고 받아들인다. 처음에는 생소했을법한 돈에 대한 이야기(돈은 가치를 의미하는 것이며, 인생의 목적은 돈이다)가 이제는 우리에게 내재화된 것이다. 이는 마치 자본주의가 언어와도 같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언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남들과 소통할 수 없고 사회에서 살아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는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을 자본주의 질서에서 요구하는 생활양식에 맞춰 살게끔 강제한다. 요컨대 자본주의 질서는 사람들을 포섭하는 동시에, 사람들을 그 질서의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노예가 된다. 돈의 노예가 된다는 말은 이러한 뜻이다. 자본주의는 마치 언어와 같다. 그리고 언어는 트로이의 목마와 같은 위험한 선물이다. 그리스는 트로이 전쟁 당시 트로이에 목마를 선물한다. 트로이 사람들은 그것을 받음으로써 그리스 사람들은 트로이에 침입한다. 언어는 트로이의 목마와 같은 위험한 선물이다. 언어는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진다. 하지만 일단 받아들이면 우리를 식민화한다. 자본주의가 작동하는 방식도 이와 같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많은 편리함을 가져다주지만,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규칙을 지키지 않을 때 우리는 그 질서에서 배제되고 살아가는 게 힘들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