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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율시 May 17. 2017

고미와 고마

너를 기억해

아직 유치원에 다니던 꼬마 시절, 집에 곰인형이 하나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다. 하나는 고미, 하나는 고마. 고미는 여자 곰, 고마는 남자 곰이었고, 대여섯살 난 아이가 품에 안기 딱 좋은 크기였다.      


우리는 그 인형을 참 좋아했다. 나는 고미를, 언니는 고마를 매일 끼고 살았다. 고미가 입고 있던 주황색 옷, 고마가 입고 있던 푸른색 옷은 어느 순간 사라져 버렸지만, 여전히 고미에게는 작은 리본이 달려 있어 고마와 구분할 수 있었다. 우리는 어딜 가든 고미와 고마를 데리고 다녔다. 나들이를 갈 때도 곰인형을 옆자리에 앉혔고, 잠을 잘 때도 옆자리에 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고미가 사라졌다.     


어느 날, 이라고 할 뿐, 누구도 정확히 고미가 언제 사라진 건지 알지 못했다. 고미는 그냥 어느 날 사라져 있었다. 아무도 모르게, 의식도 못 하는 새에. 나는 남은 고마를 보다가 문득 고미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주황색 리본을 달고 있던 고미는 집 안 그 어디에도 없었다. 어린 나는 꽤나 큰 상실감에 휩싸였지만 그 마음이 오래 가지는 않았다. 새로 생긴 인형들도 많았고, 주변 사람들은 모두 고미는 어딘가에 잘 있을 거야, 하고 말해주었고, 무엇보다 고마가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렇게 고미를 잊지 않은 척 잊은 채 지냈다.     


시간이 조금씩 흘렀다. 나와 언니는 고마를 함께 데리고 놀았지만, 잠을 잘 때 고마를 안고자는 건 항상 언니였다. 고마는 내가 아닌 언니의 단짝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느 날, 사실 남아있던 곰인형이 고마가 아닌 리본이 떨어진 고미였음을 알게 되었다. 알게 된 것도 우연이었다. 우연히 인형의 귀 부분을 살펴보다가 리본이 떨어진 자국을 발견한 것이다.     


이제 나에게는 없는 인형이었던 고미가 돌아오자 반가운 한편 당황스러운 감정이 올라왔다. 지금까지 고마인 줄 알고 있었던 인형이 사실은 고미였다고? 이 인형이 내가 항상 끼고 자던 고미였다고? 무언가 낯설었다. 그 순간 그 인형은 고미로서도, 고마로서도 내게서 멀어진 것 같았다.     


그럼 고마는 어디로 간 걸까. 고마를 발견한 것은 그리고 나서도 시간이 지난 후였다. 고마는 창문 뒤 좁은 틈새 사이에 끼어 있었다. 먼지가 듬뿍 쌓인 채로 누워 있는 고마를 보며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때 들었던 것은 고미가 사라진 걸 알았을 때와도, 고마가 사실은 고미인 걸 알았을 때와도 다른 감정이었다. 나는 슬프고 무섭고 두려웠다.      


왜 난 고마를 보며 무서움을 느꼈던 걸까?     


그 인형들에 대해 생각할 때면, 항상 내가 나도 모르게 잊고 살아가는 다른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반대로 나도 모르게 잊거나 외면하고 있던 어떤 것들을 생각할 때도, 창문 사이에 푹 쳐박혀 있던 고마의 모습이 언뜻 언뜻 스쳐지나가곤 한다. 잘 지내겠지, 하는 말에 가린 채 먼지 속에 누워 있던 고마. 그 속에 박혀 있었던 것은 내가 잊은 존재에 대한 미안함과 무엇이든 그렇게 잊혀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나는 왜 그 인형들을 잊어버렸던 걸까?      


항상 붙어지내던 고미가 없어졌음에도 나는 괜찮았다. 분명히 괜찮았고, 곧 잊어버렸다. 그건 그렇게 하는 편이 편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라지거나 떠나버린 모든 것을 찾고, 공허해하고, 아쉬워하고, 서글퍼하기엔 너무 지치니까.      


사람 사이도 마찬가지란 걸 알게 된 건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뒤였다. 한때 내게 정말 중요한 존재였던 누군가에게 연락하는 것을 미루고, 누군가 지금 혼자일 수 있음을 모른 척하고, 누군가의 자리는 또 다른 누군가로 대체되어 버리고, 어떤 소중한 기억은 점점 흐릿해져서 누구와의 것인지도 불분명해지곤 한다. 그걸 알아차렸을 때 창틀 사이의 고마가 떠오른다. 벌떡 일어나 창틀 위로 올라오지 않고, 내가 찾아낼 때까지 눈만 동그랗게 뜬 채 하늘을 보고 있던 고마가 말이다.


어린 내가 바라보던 고마와 고미는 지금의 나에게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면 창틀 혹은 그 너머까지 찾아보길. 눈치챘다면 바로 손을 내밀길. 관계의 회복을 시간에만 미루지 말길. 어떤 자리를 채우는 누군가가 아니라 그 사람 자체를 기억하길. 이는 고마와 고미가 내게 주는 조언이자 내가 나에게 바라는 소망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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