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가장 불완전한
식도락을 위해 만나는 친구 두 명이 있다. 달이 바뀔 때마다, 혹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누군가가 "애슐* 신메뉴 나왔대!" 같은 말로 단톡방의 문을 연다. 같이 있으면 편한 이 친구들은 먹기 위해 만나는 동시에 만나기 위해 먹는 친구들이기도 하다.
일명 '먹자팸'의 구성 인원은 세 명이다. 둘도 아니고 넷도 아니고 딱 셋.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세 명. 그 친구들이 아니더라도 셋의 관계는 많다. 매일 저녁을 함께 하는 동네 친구들의 모임도 세 명. 매번 정자에 앉아 새벽까지 이야기를 쏟아내곤 하던 모임도 세 명. 예전부터 나에게 특별한 의미를 갖는 모임의 구성원은 셋인 경우가 많았다.
셋은 완전하다. 세 변과 세 각이 같은 정삼각형이 완성되어 있듯, 셋의 관계도 그렇다. 동일한 세 사람의 거리, 그리고 각도는 굉장한 안정감을 준다. 셋은 더 이상 나뉘지 않기에 그 자체로 완전하다. 어떤 꼭짓점을 위로 향하게 하든 나머지 두 사람이 그를 받쳐줄 수 있는 것이 셋의 관계다.
그러나 나는 셋의 관계에서 가끔 불안감을 느낀다. 아니 어떤 관계에서는 항상 그렇다. 대체 왜? 신해욱은 평론 '정삼각형의 사랑법'에서 만화 <미녀는 못말려> 속 셋의 관계를 언급한다. <미녀는 못말려>에는 삼각관계가 등장하지만, 결말은 셋 중 어떤 두 명도 이루어지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그에 대해 신해욱은 말한다. '영원한 트리플의 결성, 따뜻한 동화풍의 마지막 멘트에 의하면, 셋은 셋이서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나는 이 친절한 멘트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모종의 불안감을 느낀다.'
내가 거의 가족처럼 여기던 셋의 관계가 있었다. 언니 한 명과 동갑인 오빠 한 명, 그리고 나로 구성된 관계였다. 서로에게 수많은 질문을 던지고, 수많은 얘기를 나누며, 서로에 대한 수많은 것을 알아갔던 이 관계를 나는 정말 좋아했다. 더 신경을 써 주어야 할 사람, 상대적으로 불편한 사람 같은 것은 없었고, 그렇기에 내가 어떤 모습으로 있든 이 관계는 항상 편안했다. 그렇게 우리는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은 채 몇 년을 보냈다. 그런데 어느 날 두 사람의 관계에 균열이 생겼다. 그러자 두 사람이 은연중에 내게 던지는 질문은 이런 것이었다. 너는 누구 편이야? 너는 누구의 입장에서 우리의 관계를 바라볼 거야? 그때 나는 두 사람과 각각 똑같은 거리를 두고 이 관계를 바라보고 싶었다. 그러나 두 사람은 끊임없이 움직였고, 내가 거리를 유지해나갈 틈조차 주지 않았다. 이등변삼각형이 되었을 때부터 이미 각도는 틀어져 있었고, 나는 가장 중립적인 말들을 뱉으려 했지만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게 두 사람 중 더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이러한 내 위치와 마음의 불일치, 한 관계의 거리와 다른 관계의 거리의 불일치 속에서 셋은 더 이상 셋으로 존재할 수 없었다. 나는 그 후로도 그 언니하고도, 오빠하고도 잘 지냈지만, 각기 다른 두 개의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일 뿐 셋의 관계가 제대로 유지될 순 없었다.
셋이라는 숫자가 2 더하기 1이 되는 순간 그 관계는 무너진다. 무너지지 않는 셋의 관계를 사수하기 위해 세 사람은 항상 간격과 각도를 조정해야 한다. 이 사람과 지금보다 더 멀어지지 않게. 이 사람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리지 않게. 혹은 저 사람에게 시선의 각도가 쏠리지 않게, 지금보다 더 가까워지지 않게. 셋의 관계를 유지한다는 건 수많은 둘의 관계를 포기한다는 것과 같을지도 모른다.
셋 자체는 완전하다. 하지만 그것이 2 더하기 1로 나누어지는 순간, 그리고 세 삼각형이 이루는 변의 길이에 길고 짧음이 생기는 순간 그 균형은 무너진다. 셋이라는 수는 그렇다. 한 순간 완전하지만, 무수한 삼각형 중 정말 완전한 것은 정삼각형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