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살.
내 과거를 들어가기 전에 내 나이부터 이야기하고 시작해야 할 것 같아.
내 나이에는 겪을 수 없는 어린 시절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서야.
나의 과거들을 읽으면서 너무 놀라지 않았으면 해.
누구에게나 힘듦이 있겠지만 나도 이겨냈으니 누구나 이겨낼 것이고 나의 이야기들로 또다시 힘이 나길 바라고 내 글을 읽는 이들이 본인의 삶들이 행복하였구나 지금도 행복하구나라고 작은 긍정 에너지를 얻어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적는 거야.
나는 7살까지 부모님과 살았어.
너무 어릴 때의 기억은 없어.
하지만 사회복지 시설에 들어가기 직전의 기억들은 나를 항상 후회의 순간으로 기억하게 해.
사회 복지시설에 들어가기 전에 살던 동네에서는 우리들에게 상처도 있고 행복함도 있었어.
난 어릴 때 작은 동네에 아주 허름하고 누추하지만 따뜻함이 있는 지푸라기 초가집에서 살았었어.
어릴 때는 그 초가집 주변에 높은 집도 없고 빌딩도 없어서 들어오는 햇빛을 그대로 받아 항상 밝고 따스함이 느껴져 마냥 좋게만 생각했었어.
따스함만 있는 건 아니지만 초가집이라 비가 오면 천막을 쳐서 막아야 했고 방 한 칸과 아궁이가 있는 부엌, 잡다한 짐들이 쌓여있는 그런 작은 초가집이었어.
내 나이에 어린 시절을 그렇게 살았다면 어느 누구도 믿질 않겠지만 우리는 그렇게 허름하고 어렵게 하루하를 이겨내고 견뎌내며 살았던 것 같아.
지금은 가스가 있겠지만 내가 사는 집에는 가스도 없었고 심지어 부탄가스도 없었어.
믿을 수 없겠지만 진짜야.
우리 집에는 할머니 세대때에 볼 수 있는 아궁이가 있었어.
아궁이에 불을 때어서 밥도 하고 목욕물도 데우고 더러운 빨래도 빨고 우리가 자는 방도 따뜻하게 데웠어.
너무 텔레비전에서만 나오는 이야기 같지?
하지만 난 그렇게 살았고 그 아궁이에 불을 때기 위해 산에 가서 나무를 해야 했었어.
옛날 말로는 땔감이 맞겠지?
추운 겨울엔 추운 겨울대로 더운 여름엔 더운 여름대로 필요했기 때문에 짧으면 2~3일마다 나무를 구하러 갔었어.
그런 일들은 150cm 정도 되는 작은 체구인 우리 엄마가 아빠를 대신해 매번 지게를 매고 땔감을 구하러 가셨었지.
집에서 조금 올라가면 큰 도로가 나왔어.
그 도로를 건너면 산이 있었어.
마음대로 나 있는 나무와 풀들로 빼곡한 숲을 엄마는 이리저리 헤쳐가면서 땔감이 될 수 있는 나무들을 주워 안 그래도 무거운 지게에 엄마 키보다 높게 쌓아서 산을 내려오곤 했었어.
항상 그 모습으로 산에서 내려오는 엄마에게 우리는 반가움에 손을 흔들며 뛰어가서 아기새 마냥 조잘조잘거리는 어린아이들이었어.
철부지 없는 그런 아이들처럼.
한 날은 산에 나무 하러 간 엄마가 너무 보고 싶어 겁도 없이 산속 어딘가에 있을 엄마를 보러 나와 동생은 손을 잡고 막무가내로 찾아 나섰어.
큰 도로를 건너야 했는데 겁이 많던 동생은 건너질 못해 누나인 내가 먼저 시범을 보이면 건너기로 하고 동생의 손을 놓고 도로를 건너었어.
건너면서도 다치진 않을까 조바심으로 불안해서 뒤돌아 보곤 했는데 난 그때 어린 내 동생을 끔찍이 생각했던 것 같아.
도로를 건너 지켜보는 와중에 동생이 용기를 내서 건너다 멀리서 오던 차를 보질 못했고 다행히 속도를 줄인 차에 살짝 튕겨 나가었어.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하긴 해.
너무 겁이난 나는 소리를 지를 뿐이었고 엄마도 없는 상태에서 운전자가 동생만 데리고 갈려는 것을 보고 정신이 혼미해 데리고 가지 말라고 소리치면서 울부짖었었어.
그때는 데리고 가면 다시는 못 볼 것 같은 생각에 하늘이 노랗고 세상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두발을 굴렸고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서라도 동생을 지키고 싶었었어.
운전자는 혹시나 동생이 심하게 다쳤을까 걱정이었지만 나는 내 동생을 잃어버릴까 걱정이었던 것 같아.
끝까지 놓지 않으려는 나와 끝까지 병원을 데리고 갈려던 운전자 사이에서 한참 실랑이를 벌이던 중 동생이 깨어났고 운전자는 그냥 가버렸어.
너무 놀랬을 동생을 달래면서 다친 다리를 닦아주고 있었는데 나무를 하고 내려오던 엄마 소리에 벌떡 일어나 우리는 엄마에게 달려가서 안겼었어.
너무 무서웠던 악몽 같은 상황은 엄마품에서 사르르 사라졌고 다리의 상처는 뛰다가 넘어졌다고 둘러대었어.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엄마가 걱정할까 봐.
우리는 그렇게 저녁노을을 뒤로하고 엄마와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왔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 동네에 비슷한 또래의 친구들이 두어 명 있었지만 친하지 않았기에 동생이 내 친구였고 동생도 내가 친구였을 거야.
그랬기 때문에 서로의 우애는 좋았고 서로를 의지하면서 그 힘들고 어리기만 했던 우리의 시간들을 잘 넘겼던 것 같아.
시설에 들어가기 전까지 몇 년 동안 부모님이라는 작은 울타리에 살면서 자식을 풍족하게 키우지 못한 우리 부모님을 원망한 적은 없어.
6년이라는 시간 동안 드문드문 기억이 나지만 알코올 중독자였던 아버지 밑에서 술 심부름을 하러 가는 그 길도 행복했었던 것 같아.
그건 다 엄마의 헌신적인 사랑과 내 친구였던 동생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동생은 너무 어려서 기억도 못하지만 하나씩 떠오는 사건, 사고들을 이야기해주면 신기해할 뿐이야.
그렇게 시설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함께였지만 시설에 들어온 이후부터는 떨어져 지냈고 퇴소를 한 후에는 각자의 인생을 살기 바빠서 지금은 서로의 생사 확인만 하고 있어.
어릴 때의 형제는 커가는 과정에서 싸우고 지지고 볶고 하면서 성인이 되면 서로의 생사를 확인하다 나이가 들어 다시 또 친구가 된다고 주변 어른들은 말씀하셨어.
요즘은 다들 자식을 1명씩 낳아서 키우는 것도 버겁고 힘들어하는 세상이지만 형제라는 유산을 남겨주는 것도 괜찮은 것 같아.
단, 앞부분의 발언은 부모가 자식에 대한 욕심과 부모의 대리만족을 위해 키우지 않는다는 전제조건 아래인 거 알지?
만약에 자식이 2명을 좋다, 3명이 좋다, 주변에서 그런 이야기를 해서 낳게 된다면 하나부터 열까지 부모의 스트레스가 되고 돈 들어가는 기계로 밖에 생각하게 되니 처음부터 자식에 대한 형제 유산은 포기하는 것이 맞아.
그냥 난 세월이 흘러 넓은 하늘 아래에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위로가 되고 모든 것들을 내려놓고도 서로 의지가 되는 형제가 있었으면 해서 적은 거아.
잘 이야기하다가 너무 꼰대 같은 조언들을 해버렸네.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지금 형제들에게 생사 여부 문자 한 통이라도 하길 바라는 마음이야.
동생 이야기를 쓰니 전화 한 통으로 또 생사 여부를 확인해봐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