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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정수 Aug 03. 2024

[기독서간문] 5. 진부함의 위험성에 관하여

사유하지 않는 자의 착시/착각에 따른 그릇된 신념에 대한 경고

오늘은 많이 아는 얘기를 해 보겠습니다.


1. 발단


    며칠 전, 지인들 간의 모임이 있었습니다. 오래 만나왔던 지인들입니다. 함께 모여 식사를 나누고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겨 담소하던 중에 지인 중 한 명이 갑작스럽게 정치인과 관련한 이야기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이00은 정리가 되려나요?”

   발언은 짧았지만 의도는 분명했습니다. 야당 대표에 대한 적의가 분명하게 드러나 있었습니다. 그는 범법자이자 파렴치한이고 패륜아이기에 반드시 사법처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였던 것이고, 동의를 구하는 발언으로 보였습니다. 가장 핫(hot)하다는 이슈를 본인이 점했다는 당당함이 내포된 듯도 했습니다. 극우 성향 인사들이 갖는 예의 그 당당함과 확신에 찬 태도 속에는 예의 그 자랑스러움 비슷한 느낌까지 내 비쳤습니다. 


    좌중에 앉아있던 한 분이 황급히, “자, 자, 정치 얘기는 그만하시죠” 하고 화제를 바꾸었습니다. 그 순간은 지나갔고 모임은 마쳤습니다만, 그냥 지나간 그 상황이 생각에서 지워지질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납니다.  


2. (연계되어) 떠올랐던 생각


(case I)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_한나 아렌트

    1961년, 뉴요커지의 기자였던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으로 한 사람의 재판을 참관하기 위해 갔습니다.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취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아돌프 아이히만, 그는 나치 치하의 공무원이었습니다. 제국안전중앙부에 있으면서 유럽 각지의 유대인을 모아 강제수용소로 보내는 열차수송의 최종책임자로 일했습니다. 1942년에는 “500만 명의 유대인을 열차에 태웠다”라고 스스로 자랑하기까지 했었죠. 그 실적으로 인해 나치정부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1944년에는 헝가리로 파견되어 그곳에서 무려 40만 명의 유대계 헝가리 인들을 아우슈비츠의 가스실로 보냈던 것입니다. 


(그림) 1942년 6월 반제회담에서 아이히만이 작성한 유대인 수 1,100만 명의 정리 리스트, <아이히만 리스트>라고 불린다.



    전후 전범으로 수배 중이던 그는 1960년 이스라엘 정보기관(모사드) 요원들에 의해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었죠. 성형 수술을 하고 신분을 감추며 철저히 숨어 살던 아이히만은 장남이 그의 유대인 여자친구에게 아버지가 과거 전쟁 중 ‘유대인 제거’에 앞장섰다고 자랑했던 것이 빌미가 되어 결국 덜미가 잡힌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압송되어 1961년 비로소 법정에 서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재판 과정에 대한 기사 작성을 목적으로 한나 아렌트는 뉴욕에서 예루살렘으로 이동, 재판의 전 과정을 참관하게 된 것입니다.


(당시의 국내 뉴스) https://youtu.be/mnhOzo8Uuf0?si=_vlw34N3VbBcfmRD 


    아이히만의 재판을 취재했던 한나 아렌트는, 1961년 《뉴요커》에 낸 <아이히만 공판에 대한 보고서>(나중에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제하의 단행권으로 발간)에서 악이 근본적인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진부함(banality; 평범한 사람들이 그들의 활동이나 비(非) 활동이 낳을 결과에 대한 비판적 사고 없이 명령에 복종하고 다수 의견에 따르려 하는 경향)의 작용인지에 대한 질문을 합니다. 아렌트는 순전한 ‘무사유(無思惟)’, ‘생각 없음(thoughtlessness)’이 결과적으로 ‘악의 진부함을 낳는다’는 결론을 내렸으며, 이는 철저히 파편화되고 소외된 개인들과 그들의 수동적이고 마치 죽어 있는 듯하며 ‘생각 없이’ 모든 것을 안이하게 수용하는 생활(위키백과 참조)을 강한 비판적 메시지로 제시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생각 없음'과 '착각', '인지오류' 등은 다양한 형식으로, 많은 예술가 및 학자들이 다루었던 주요 화두였습니다. 



(Case II)
<판화> : [(착시)라는 개념을 예술로] _판화가 M.C. 에셔

    M.C. 에셔는 <착시>란 단어의 개념을 그림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아시다시피 현실에선 존재할 수 없는 상호 모순된 개념을 착시 예술로 보여준 판화가입니다.


(좌) <말씀> 1942년  /  (우) <도마뱀> 1943년, 에셔


    가상과 현실을 넘나들고, 불가능한 공간의 뒤틀림을 보여주었고, 하나의 화면에 명과 암으로 대비되는 상반된 메시지를 보여주는 등의 방식으로 우리의 정신세계를 표현하고자 했던 화가로 기억됩니다


(좌) <발코니> 1945년   /  (우) <원의 극한(천국과 지옥)> 1960년, 에셔


    특히 1945년작 <발코니>는 2차원 평면에 마치 볼록 렌즈를 덴 것과 같은 효과를 보여줍니다. 그림의 어디가 실제일까를 묻는 모양새입니다. 모두가 허구겠죠. 다만 화가는 그 그림에서 유독 발코니에 집중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는 마치 렌즈로 확대한 것과 같이 발코니라는 대상을 봤던 것이죠. 그 의식의 흐름을 화가는 나름의 렌즈 비전의 화법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됩니다.


    결국 개인이 인식하는 것은 실제와 다를 수 있고, 보고자 하는 것 듣고자 하는 것에 따라 달리 인식될 수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인식된 것은 실제가 반영된 것은 맞으나, 실제 그 자체는 아닐 수 있음>을 말이죠.  


 


(Case III)
<보이지 않는 고릴라> : [인지능력의 한계 - (착시/착각)] _크리스토퍼 차브리스, 대니얼 사이먼스 
공 전달의 횟수 세기, 보이지 않는 고릴라

    인지 심리학자인 크리스토퍼 차브리스와 대니얼 사이먼스는 그들의 공저 <보이지 않는 고릴라>에서 우리의 인지능력에는 명백한 한계가 있음을 역설하였습니다. 우리의 ‘직관적 믿음은 틀릴 때가 많다’는 것을 실험적으로 증명해 냈던 것이죠. 이러한 인지의 한계는 우리의 삶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6가지의 착각(주의력 착각, 기억력 착각, 자신감 착각, 지식 착각, 원인 착각, 잠재력 착각)을 그들은 저서에서 정리하고 있습니다. https://youtu.be/kSv6jn2bUNA?si=qPsr4gZ0kfauhFIS


인지 실험 관련 방송 프로그램

     저자들의 실험과 관련한 유명한 동영상도 있죠. 우리의 신념과 직관에 결함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좀처럼 생각을 고쳐먹지 못한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결함을 인정하고 바른 관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학습이 필요함을 역설한 것 아닐까 생각도 해 봅니다. <아는 만큼만 보이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방송에서 많이 다뤄진 내용입니다. https://youtu.be/GDSLBIFsdeE?si=dd6HbuEAkKELkmO1



    다시금 <보이지 않는 고릴라>로 돌아가봅니다. 저자들은 서문을 아래와 같이 마무리합니다. 


'일상의 착각을 이해하게 되면 직관의 한계를 알고 삶의 방식을 재정비하게 되며,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다시금 돌아보게 된다. 어쩌면 이러한 깨달음을 통해 재미를 느끼고 인생에서 성공을 이루는 방법을 발견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과 세상에 대한 인식을 왜곡하고 있는 장막을 걷어내고, 어쩌면 처음으로 진실과 대면하게 될 것이다.'


    착각이 되었든 인식의 오류가 되었든 진실을 바르게 대면하는 능력은 결국, 각자의 몫이라는 얘기로 들립니다. 




(Case IV)
<폴리티컬 마인드> : [무의식적 사고를 넘어서는 힘, 뇌와 마음을 움직여야] _조지 레이코프

    조지 레이코프, <코끼리를 생각하지 마>를 쓴 인지과학자이자 언어학자입니다. 그는 미국에서 민주당원이죠. 진보주의자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그가 우리나라의 선거 캠페인이나 언론의 보도 관점에도 많은 영향을 미친것도 사실입니다. 우선 그의 저서를 살펴봅니다. 책꽂이에서 보이는 것만도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프레임 전쟁>, <자유 전쟁>, <자유는 누구의 것인가> 등이 있고 오늘 얘기하고자 하는 2006년작 <폴리티컬 마인드>가 있습니다. 


    ‘18세기 뇌로는 21세기 정치를 이해할 수 없다’고 저자는 얘기합니다. 

그가 강연 때마다 받았다는 많은 질문은, 꼭 지금의 우리 정치현실과도 유사합니다. 



민주당은 왜 이렇게 무기력한가? 
무엇 때문에 그들은 분열하는가?
어쨌든 그들이 신봉하는 것은 무엇인가? 보수는 왜 자신의 개념을 훨씬 더 잘 전달하는가? 왜 민주당은 2006년 의회를 장악한 이래 더 많은 성공을 거둘 수 없었는가? 가난한 보수주의자는 왜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투표를 하는가? 왜 민주당의 포퓰리즘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는가? 민주당의 후보는 왜 공화당의 후보와 달리 상세한 프로그램의 목록을 들고 나오는가?
"


    이러한 질문에 수많은 답을 하고 있지만, 민주당은 많은 경우 그다지 효과적인 설명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역설합니다. 그들이 사용하는 통상적인 설명 양식이 설득력을 가지지 못했다는 평가입니다. 그 설명 양식이 부분적일뿐더러 추가적인 설명이 더 필요하다는 의견인 것이죠. 그러면서 민주당의 설명에서 빠져 있는 것으로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즉 <인간의 뇌와 마음의 역할>이라고 설명합니다. 대중의 인식을 바꿀 방안의 마련이 필요하다는 얘기로 이해됩니다. 쉽지 않은 일이죠. 생각보다는 별로 답이 없어 보이기는 합니다. 우리가 제삼자의 관점으로 대중을 바라볼 때는 그렇다는 겁니다. 아래의 글을 읽으면서 저는 묘하게 저자의 절망적 현상 인식이 읽혔었습니다.


"
만일 이 이성관이 옳다면, 정치는 보편적으로 합리적일 것이다. 만일 정확하고 자세한 정보를 알게 된다면, 사람들은 당연히 추론을 통해 올바른 결론에 이르러야 한다. 유권자들은 자신의 이익에 맞게 투표해야 한다. 어떤 정책과 프로그램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장 좋은지 계산하고, 그러한 정책과 프로그램을 옹호하는 후보에게 투표해야 한다. 그러나 유권자들은 그런 식으로 행동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분명한 사익에 반하는 투표를 한다. 즉, 선입견과 편견, 감정에 따라 결정을 내릴 수 있다. 그리고 가치와 우선순위, 목적을 열광적으로 지지한다. 아니 그들은 이유를 의식적으로 알아보지도 않은 채 말없이 자신의 이익과는 무관한 결론에 도달한다. 계몽주의 이성관은 거짓이기 때문에, 계몽주의 이성으로는 실제적인 정치 행위를 설명하지 못한다.
"


    그는 정치적 뇌, 정치적 마음의 작용을 기대하는 것으로 글을 마칩니다. 상호작용이 필요한 시대임에 따라 감정이입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죠. 


     ‘진보적 사고의 도덕적 토대는 감정이입의 정치이며 이 감정이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책임감과 강인함이 필수적이라고 사람들은 이해할 것’이라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리의 삶-그리고 우리의 정치-을 지배하는 것은 무의식적 사고(思考) 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각해 볼 일은 이렇듯 멀찍이 떨어져 제삼자의 화법 즉 세상을 관조하는 태도만으로는 나와 당신, 그렇게 파편화된 우리들 각자의 변화를 이끌어 내기에는 너무 고상한 진단이자 설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좀 더 명확하고 단순한 메시지가 필요합니다. 직관적으로 인식될 문구이자, 행동을 유발할 언어가 필요합니다. 


    상징으로서의 언어는 도구, 즉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뇌의 영혼이 아니라 표층’이라고 합니다. 때문에 ‘언어의 이면’을 고려한 명명백백한 메시지가 필요합니다. 물론 듣는 자들이 그 의미를 해독할 능력은 각자가 갖추어야 합니다만.


3. 정리하자면...


결국에는 학습, 사유하는 힘을 길러야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정치적 의도 또한 바르게 꿰뚫어 보기 위해서는 개개인이 그 능력을 기르는 것만이 어쩌면 유일한 답이 되겠습니다. 데이터를 읽고, 의미를 해석하고, 팩트를 체크하고, 그 모든 정보를 종합하여 나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힘, 그 능력을 기르는 것이 현대를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요소인 듯합니다. 


    결국 개인인 내가 <어떤 의도를 가진 그들로부터> 휘둘리지 않기 위해서는 나의 굳건한 지력이 필요하다는 결론입니다. 그리하여야 좁은 시야를 가진 꼰대를 벗어날 수 있는 길임과 동시에, 시대의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여유 또한 지닐 수 있을 것이라고 보이기 때문입니다.


    지인의 뜬금없는 한 마디로 시작된 나의 생각은, 멀리 돌고 돌아도 결국은 나에게도 돌아옵니다. 스스로 설 힘을 기르는 일, 통시적으로 노력하는 길로 이어집니다. 


    스스로의 역량 강화를 향해 찾았던 지름길은 없더군요. 소걸음으로 뚜벅뚜벅 갈 일입니다.


    우보천리 동행만리(牛步千里 同行萬里)라 합니다. 함께하시죠.




 * 참고도서

1)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한나 아렌트, 2006, 한길사

2) <괴델, 에셔, 바흐> 더글러스 호프스태터, 2017, 까치

3) <보이지 않는 고릴라> 크리스토퍼 차브리스/대니얼 사이먼스, 2011, 김영사

4)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 조지 레이코프, 2015, 와이즈베리

5) <폴리티컬 마인드> 조지 레이코프, 2014,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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